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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하신 주님의 나타나심(2) (요 20:19-31)

첨부 1


Ⅴ. 주 석

< 19절 >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이 부분은 이 설화를 이전의 사건과 연결시키려는 저자의 시도이다. ofias(저녁)이란 표현은 누가복음 24:36이하에도 나타난다. 누가복음에는 엠마오로부터 두 제자가 돌아온 후의 사건에 이 표현을 사용한다. 아마도 이때는 저녁 늦은 시각이었을 것이다. 오후 8경이 아닌가 여겨진다. 마가복음 16:14에는 그가 예수께서 제자들이 식사할 때 11제자에게 나타났다고 진술한다.

`문이 잠기었다'는 언급을 한 이유는 예수의 부활하신 몸의 본질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곧 상처를 내보일 정도의 육체적 존재이며 닫혀진 문을 통과할 정도의 영적 존재라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부활체는 누구나 인지할 수 있고 의사소통이 가능하며 사물의 제약을 받지 않고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누가복음 24:39-43처럼 예수께서 잡수시거나 만질 수 있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에이레네 휘민] (`너희에게 평안이 있으라')은 동양의 일반적인 인사이다. 그러나 21절에서 eirmne umin이 제자들에게 위임명령을 주기 직전에 다시 반복된다. 이를 볼 때 제자들을 보낸 목적이 평안을 선물로 나누어주기 위함임을 알 수있다. eirmne는 그리스도교적인 용법(참조 14:27; 16:33)에서 일상적인 인사보다는 좀더 깊은 의미를 가진다. 바울의 편지의 서두의 인사에 부활하신 주가 평안을 가져다주신다는 사상이 자주 나타난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바램이나 가능성 곧 가정법적인 표현이 아니라 종말적인 언급 곧 주님의 직접적인 진술로 보인다.

< 20절 >

제자들이 주님을 보고 기뻐했다. 이 사건은 사도들에 대한 약속의 성취이다. 누가복음 24:41에는 `제자들이 너무 기뻐서 믿지 못했다'고 기술한다. 그러나 37절에는 그들이 `예수가 그들 가운데 서 계신 것을 보고 두려워했다'고 진술한다. 그들이 두려워했다는 언급은 요한복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요한복음서 기자는 주님을 지상에서 사역하신 분으로보다는 부활하여 영광 중에 들려 올리신 분으로 생각하고 있다.

누가복음 24:40에는 손과 발을 보이셨다고 되어있으나 요한복음에는 손과 옆구리로 되었다; 누가복음 24:39에는 '손과 발을 보라'로 되어 있으며 요한복음 20:25에는 손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상처로 되어있다. 후대교회는 누가와 요한을 조화시켜 예수의 몸에 다섯 군데의 상처가 났다고 표현한다(두 손과 두 발, 옆구리) 어느 것이 더 원래적인가는 결정하기 어렵다. 많은 학자들은 요한복음서 기자가 19:34의 창으로 옆구리를 찔렸다는 자신의 묘사와 조화시키기 위해 발을 옆구리로 변경시켰다고 가정한다. Benoit는 요한의 것이 더 원래적이라 주장한다. Hartmann은 원래는 손에 대한 언급만 있었는데 요한과 누가가 이것을 발전시켜 제시했다고 주장한다. 사실 고대의 관행으로 볼 때 십자가에 달린 자의 발에 못을 박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사실은 누가의 주장을 의심스럽게 한다. 저스틴은 예수의 발에 못이 박혔다고 주장하며 교부들의 진술은 이 구절이 시편 22:16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수족을 찔렀나이다) 의 성취로 본다. 누가는 시편에 근거해 십자가의 기억을 수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반적으로 십자가형은 손을 십자가의 가로대에 묶던지 손목에 못을 박는다. 후자의 방법을 예수의 경우처럼 속히 죽이려 할 때 사용한다. 그러므로 손에 못 자국이라는 표현은 부정확하다 볼 수있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서는 십자가에 달린 몸을 지탱할 수 없기 때문이다.

< 21절 >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아버지께서 예수를 보내심에 대한 주제가 요한복음에 일관되게 나타난다.(3:17; 5:36; 6:29; 8:42; 10:36; 11:42; 17:3등) 이 말씀을 하시며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신다. 이 파송명령은 마 28:16-20에 나오는 장문의 선교사명의 요한적인 형식으로 보인다.

[아페스탈켄]과 [펨포]가 여기서는 동의어로 사용되었다.(이 구절과 밀접한 병행귀들은 13:20과 17:18이다) 일반적으로 [아페스탈켄]은 보냄을 받은 자가 권위를 부여받음 대리인 되는 보냄의 형태에 사용되며 [펨페이온]은 그렇지 않는 단순한 파송을 나타내는 보냄의 형태에 사용된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는 이 두 가지 보냄이 서로 대조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병행을 이룸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 22절 >

저희를 향해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엠퓌산]은 신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단어이다.

이의 병행구절은 창세기2:7,에스겔 37:9절 지혜서 15:11절-"그는 자기를 만드시고 자기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시고 산 영혼을 주신" philo Op. 133-"참으로 그가 내쉰 숨은 하나님의 영과 다른 것이 아니었다"등이다. 요한은 이 중요한 사건을 태초의 인간 창조사건과 병행하는 것으로 묘사하려 했다. 곧 이것은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다. 상징적으로 요한의 사상에 의하면 사도의 파송은 새로운 창조, 새로운 시작, 새로운 세상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서언에서 창조를 언급한 후 종결부분에서 예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새로운 창조를 말한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사건과 이 기사 사이의 불일치점은 거의 없으나 중요한 차이는 성령이 임하는 날이다. 여기에서는 오순절이 아니라 부활절에 이 사건이 일어났다고 기술한다.

< 23절 >

여기서 중요한 아람어 동사는('닫다')와 ('열다')이다. 요한복음에서 `열다'는 `용서하다'를 뜻하지만 `풀어주다'라는 의미를 암시한다. [아페이나이]는 이 구절에서만은 `용서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크라테인] 은 그 반대의 의미인 '꽉잡다,' `여전히 갖고 있다'는 의미이다.
요한복음서의 중심 주제 중에 하나는 신앙과 불신앙의 주제이다. 마지막에 제자들에게 죄사함을 권세를 줌으로 이 주제를 이어가며 마지막 30-31의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에서 이를 명확히 밝힌다.

< 24절 >

열 두 제자 중의 하나:유다가 없고 11제자만 있기 때문에 이것을 부정확한 표현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제자 그룹을 지칭하는 전통적인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복음서 기자는 이 구절을 전-복음서 전승에서 찾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쌍둥이로 번역된 [디두모스]는 원래 `둘의,' `이중적인'을 의미한다.

< 27절 >

[아피스토스] 는 `믿지 않는 사람' 즉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을 의미한다. 다소 서투른 이 표현은 도마가 '믿지 않는 사람' [아피스토스] 도 `믿는 사람' [피스토스]도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는 `믿는 기독교인' [피스토스]이 되도록 촉구 받는다.

< 28절 >

도마의 고백은 예수의 사역초기에 나다나엘이 한 고백(1:49)을 훨씬 넘어선다. [퀴리오스] 와 [테오스]의 병렬은 칠십인역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거기서 이 두 칭호의 병치는 [야웨, 엘로힘]및 이와 유사함 표현들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것은 이교도의 종교문서에도 나타나며 도미티안이 애용했던 황제칭호로 잘 알려져있다.

[퀴리오스]는 흔히 예수를 지칭하는 그리스도교 칭호이며 `예수는 주님이시다'는 신앙고백에 나타난다(롬 10:9, 고전 12:3) 이 고백이 구약성서 용어로 해석되었을 경우 [퀴리오스]=[데오스]라는 보다 완전한 정식에 가깝게 된다. 그리스도는 요한복음과 목회서신에서만 [데오스]라 불린다. 이것은 1장 1절에서 볼 수 있다. 같은 용어를 사용한 의도는 이것이 새로운 시작임을 의도하기 위해 처음 진술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요한의 궁극적인 그리스도론적 선언이다.

< 29절 >

보는 것과 만지는 것 사이의 대조가 아닌 보는 것과 믿는 것 사이의 대조이며 예수를 보았던 도마와 그를 보지 못했던 후대 기독교인간의 대조이다. 제사복음서가 기록될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는 기독교 1세대가 아니라 2,3세대였다. 이 말씀은 바로 이 2,3세대를 향한 것이다.

요한은 기독교인들에게 보고 믿는 믿음보다 보지 않고 믿는 믿음에 더 좋은 믿음임을 역설한다. 1:50이 나다나엘에게 한 예수의 답변(내가 너를 무화과 나무 아래서 보았다하므로 믿느냐) 와 4:48의 왕의 신하에게 한 말씀(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않고서는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의 결론으로 볼 수 있다.

< 30절 >

원래의 복음서의 결론 부분이며 21장의 후대의 첨가 부분으로 보인다. 요한은 예수의 사역의 모든 이야기를 쓰는 것이 자신의 목적이 아님을 설명한다.

< 31절 >

`믿는다고'는 동사는 부정과거나 가정법 현재 어느 것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가정법 현재로 해석하면 너희가 계속 믿도록이란 의미이며, 부정과거로 보면 너희가 믿게 되도록의 의미로 해석된다. 당시에 요한 공동체의 정황은 보면 숨은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었다. 곧 회당의 압력에 눌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는 기독교인들이다(예를 들면 니고데모, 아리마대 요셉등). 그러므로 바로 이들에게 촛점을 맞춘다면 계속해서 그들이 믿음을 갖게 되도록 하려한다는 의미가 더 강하다. 요한 공동체의 정황을 통해 볼 때, 특별히 앞의 부활현현 설화와 연결시켜 볼 때 이 책을 기록한 목적은 미성숙한 신앙인들(도마와 같은)에게 보다 성숙한 신앙을 갖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Ⅵ. 신학적 메시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평안이 있으라'는 인사를 반복해서 하신 것, 특별히 제자들의 파송의 말씀 직전에(21절)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제자들의 보내신 목적이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기 위함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보내신 것 같이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셔서 그의 사역을 계속하게 하신다. 예수의 사역은 하나님이 주신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며 제자들의 사역은 예수의 사역을 계승하는 것이다. 오늘의 교회 역시 이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제4복음서의 중요 주제중의 하나는 예수께서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시고 (14:16 16:7-13) 사도들에게 성령을 보내신 것이다. 이 부분은 약속과 성취의 주제가 두드러진다.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어 주심으로 인간의 창조가 이루어 진 것처럼(창 2:7) 예수는 성령을 주심으로 인간들을 새롭게 창조하신 분이다. 재창조와 새로운 존재됨은 성령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선물이다.

예수의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강조한 근본적인 의미는 십자가와 부활사이의 연속성을 확립하기 위함이다. 제자들 앞에 서신 부활하신 주는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며 그를 믿는 사람들의 부활을 약속하신 분이다. 우리의 신앙의 근거인 부활과 십자가는 서로 분리할 수 없으며, 어느 한쪽만이 역사적이고 나머지는 가공의 이야기라는 주장을 명백히 부인하고 있다.

예수께서 하신 네가 죄를 사하면 그들이 사함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없는 것과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죄용서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교회의 큰 특권임을 보여 준다. 메시지의 가치는 그 메시지를 전하는 자가 자신을 보내는 자와 어떠한 관계에 있느냐에 달려있다. 제자들은 예수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할 특권을 가진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와 친밀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도마는 그의 성격상 비관론자로 볼 수 있다. 그가 예수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의심할 바 없다. 그는 기꺼이 예루살렘에 예수와 함께 죽으려 가려한다.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도마는 자신이 기대했던 일이 일어났을 때 매우 상심했다. 그래서 예수를 알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비관논자, 회의론자이기에 도마는 예수의 부활을 믿을 수 없어 직접 상처를 만져 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예수의 상처를 만졌다는 언급은 없다. 예수께서 도마가 있을 때 나타나셔서 그의 마음을 알고 그가 요구한 것을 시험토록 초대했다. 도마는 사랑과 헌신의 마음으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 고백한다. 도마의 답변은 교회의 믿음을 표현한 것이다(요 1서 5:4-5) 복음서 서문은 로고스의 신성에 대한 주장으로 시작하여 1장의 나다나엘의 고백으로 마친다. (랍비,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 도마를 입술로부터 들을 수있는 고백은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의 교회의 성숙한 선포이다. 예수는 이에 대한 답으로 복음서의 마지막 복을 선언하신다-보고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되다

도마의 잘못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다른 사람과 함께 있기보다는 혼자 있으려 한다는 점이다. 그가 동료들과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께서 첫번째 나타나셨을 때 만나지 못했다. 신자들의 잘못 중의 하나는 동료 기독교인들과 분리되어 혼자 있으려 한다는 점이다.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있을 때 예수를 잘 만날 수가 있다.

복음서는 예수의 생애에 대한 완전한 이야기를 쓰려는 것이 아니다 곧 자서전을 쓰려는 것이 아니고 구원자요 주로 예수를 소개하기 위함이다. 지식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주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복음서의 독자들은 이 글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을 볼 것이며 그의 대한 믿음으로 영생의 삶의 비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예수께 대한 믿음이 생명에 이르는 유일한 길임이 제4복음서의 중심 메시지다(3:15,16,3

8. 요1서 5:13) 서론 1:4에서 "내 안에 생명이 있다"고 선언하며 결론에서 다시 그가 오신 목적이 사람들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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