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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알 수 없는 눈물 (요 2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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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즉, 안식후 첫날인 주일 새벽 미명에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의 무덤문을 여시고 다시 살아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의 그날 새벽 미명에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갔습니다. 가서 무덤을 보니 무덤 문은 열렸는데 그 안을 들여다 보니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서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제자들은 단숨에 뒤어와 보니 과연 시체가 없어진 것을 보고 마리아와 여자들의 말을 믿었습니다. 제 자들이 무덤에서 돌아가고 나서 마리아는 혼자 남아 빈무덤 앞에서 슬피 울고 있었 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무덤 안을 들여다 보니 거기에 흰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예수 의 시체 뉘였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은 것을 보았습니다. 마리 아는 울면서 천사에게 이야기 합니다. `내 주를 어디 두었는지 아십니까'하면서 슬 피 웁니다.

이 마리아의 눈물 속에는 오늘날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교훈이 담 겨져 있습니다.

 <본론>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 앞에서 울고 있는 이 장면은 잘 살펴 보시면 뜻밖에도 커 다란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새벽 미명에 일찌감치 달려와서 예수님이 있는 곳을 찾아온 이 일이야말로 우리들의 눈에 아름다운 정성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마리아의 눈물 속에는 앞 뒤가 맞지 않는 또 하나의 모순이 걸려 있 다는 것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문 ( 요 20:13) "천사들이 가로되 여 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는 이 대답은 달리말해, 만일에 주님의 시체가 그 무덤 가운데 그대 로 있었다면 기뻐할 일이겠느냐는 반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의 시체가 무덤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 없음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마리아의 대답으로 미루어 볼때, 예수님의 시체가 무덤에 없는 것으로 인하여 슬퍼 하고 있습니다.

종종 우리의 신앙이 이와같이 되어가고 있지 않는가 싶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사 실과 진리에 입각해 있기 보다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사랑과 감상과 어떤 기대 속에 나를 더 많이 끌어가고 있지 않는가 하는 반성을 때때로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마리아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감정과 기대만을 가지고 무덤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빈무덤을 기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감상에 빠져 주님의 말씀을 잊고 있는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 일깨워 줍니다. ( 마 28:5-6)"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 씀하시던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여기서 `그가 말씀하 시던 대로' 라는 말씀이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 하신 것들 을 다 들었지만 그것을 중요하게 마음에 담아 두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가장 중요한 일이 벌어진 이 순간 앞에서 웃지못할 헤프닝을 연출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 니다. ( 눅 24:5-6)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 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그렇습니다. 모든 소망의 줄이 끊어지고, 어두움과 절망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같 은 절박한 상황 앞에서도 우리가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은 거저 감정이 흘러가는데 로 슬퍼하고 애통하며 고민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가를 기억 해야 합니다. 지금 천사가 나타나서 마리아와 함께한 여자들에게 주는 충고가 무엇 입니까 "이전에 주님께서 너희에게 뭐라고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는 충고입니 다.

엠마오로 향해 가던 두 제자에게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눅 24:25)"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라 고 하셨습니다. 다시말해 우리는 주님의 말씀들을 너무도 가볍게 받아들이고 더디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들을 마음에 잘 두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막상 말 씀으로 힘을 얻어 일어나야 할 결정적인 순간에 말씀의 능력을 힘입을 수 없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를 보십시오. 그의 오라버니 나사 로가 죽은 후 주님께서 찾아 오셨을 때에 주님께 뭐라고 말했습니까 `이제라도 주 님께서 무슨 일이라도 하실 수 있는 것을 내가 믿습니다!라고 고백을 한 사람입니다 그런 고백을 하였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다시말해 주님께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릴 수 있음을 믿으면서도 지금 그의 오라버니를 무덤 가운데서 살려 낼줄을 믿지 못하 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믿지 못했다는 것은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세례받기를 망설이시는 분들의 가장 중요한 걸림돌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그것은 내가 이렇게 우습고도 한심한 꼴을 하고서도 과연 세례를 받을 수 있단 말인가 하 는 점입니다. 아직도 자격이 없어 보인다는 뜻입니다. 이런 문제는 우리가 신앙 생 활하는 가운데 항상 우리를 괴롭히는 명제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확인하고 지나가야할 진리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요청에 의하여 돌아가시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주님의 죽으심 앞에 당신을 가장 가까이 모시고 있던 제자들과 여인들조차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이해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주의 제자였고, 주를 믿는 일을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믿음 생활의 시작이 그들이 믿는 내용을 전부 알고 있었다거나, 그 깊이를 통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음을 아셔야 합니다. 마찬지로 우리들은 우리가 믿는 내용을 다 알고 깨닫기 이전에 먼저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부름받은 것 이 완성되기 위하여 우리의 인생을 지금도 하나님 앞에서 간섭을 받고 있는 사람입 니다. 할렐루야!!

여인들과 제자들은 지금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또 다른 가 르침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 요 20: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 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고 했습니다. 이 기록은 구약의 말씀을 연상시 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님의 머리편과 발편을 어떻게 보는 사람들이 알 아볼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주님을 싸매었던 세마포가 속에 사람의 시체가 빠져 나가고 껍데기 세마포만 그대로 뎅그라니 남아 있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던 것입니 다. 그러니까, 완전히 기적의 현장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 에는 머리를 쌓던 세마포가 개켜 있더라고 번역을 하였는데 개켜 있다는 것은 풀어 서 다시 정리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려있다는 의미로서, 시체를 싼 그 상태 로 둘둘 말려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수건을 개켜 놓듯이 염할 때 그대로 둘둘 말려있는 상태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왜 천사들이 와서 머리 편과 발 편에 나누어서 앉았을까요 출애굽기 25 장을 찾아 보십시다. 여기에 주님의 죽음에 관한 아름다운 한 상징이 나타납니다.

이 본문은 속죄소를 만드는 장면입니다. 속죄소라는 것은 죄를 속하는 제단입니다.

다같이 봉독하십시다.(출 25:10-22)"그들은 조각목으로 궤를 짓되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일 규빗 반,고가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 너는 정금으로 그것을 싸되 그 안 팎을 싸고 윗가로 돌아가며 금 테를 두르고 금고리 넷을 부어 만들어 그 네 발에 달되 이편에 두 고리요 저 편에 두 고리며 조각목으로 채를 만들고 금으로 싸고 그 채를 궤 양편 고리에 꿰어서 궤를 메게 하며 채를 궤의 고리에 꿴대로 두고 빼어 내지 말지며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지며 정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되 장 이 이 규빗 반,광이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 서 만들되 한 그룹은 이 끝에,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하게 할지며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 는 두 그 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 르리라" 여기서 정육면체로 생긴 궤짝을 먼저 만들고 그 안에 십계명을 쓴 돌판을 넣고 만 나를 넣은 항아리를 그 안에 넣게 되어 있고, 아론의 싹 난 지팡이를 그 안에 넣습 니다. 그 상자 위에 제단을 얹어 만들었는데 그 제단 양쪽에는 네모난 쟁반 비슷하 게 생겼는데 천사 둘을 조각하여 세워 놓았습니다. 천사 둘이 날개를 펴서 서로 날 개를 맛닿게 되어 있습니다. 그룹이란 천사들의 직분 중의 하나입니다. 친위대에 해 당합니다. 경호원과 비슷합니다. 그룹이 있는 곳이라하면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 이란 뜻입니다. 속죄소가 그러한 곳이라는 것입니다. 속죄소에는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씩 밖에 못들어 갑니다. 대제사장은 백성들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제물을 잡아 그 피를 양푼에 담아 와서 이 속죄소에 붓습니다. 그러면 일년동안 지은 백성들의 죄가 모드 속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식을 지켜보시는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다시말해 우리의 죄값을 요구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이 속죄소는 죄를 속하는 장소이기도 하고, 은혜를 베푸는 시은좌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죄값을 치르는 자 리이기에 준엄한 곳인 동시에 죄 속함이 베풀어 지는 곳이기에 은혜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들입니다. 우리 죄를 속할 예수 그리 스도의 대속 사역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여기 속죄소의 피흘리는 어린 양으로 누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우리의 죄값을 요구하시는 거룩하신 심판자로서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이렇게 상징적으로 나타난 것이 속죄소에서는 두 구룹의 조각 으로 나타내셨고, 실제로 예수님께서 주 앞에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누우신 그 제물 되심에 하나님께서 심판자로 임하신 장소로써 지금 예수님의 무덤 속의 두 천 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주님의 무덤이야말로 우리의 죄값을 모두 치르는 장소인 동시에 영원 한 은혜를 입는 장소인 것입니다. 그 죄값을 내가 치르지 않았는데도 내 죄가 속해 졌습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생각해도 현재 나 자신의 모습이 영 아니다는 의아로움 에 빠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분명히 은혜받은 것은 사실인것 같은데 나 자신을 돌이켜 보면 나는 아직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것입니다.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일까요 그것은 내가 그 죄값을 치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 가 변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마리아를 보십시오. 이 마리아는 주님의 죽 으심을 바라보는 시각도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주님이 죽으시기 전이나 후에나 거 저 주를 인간적인 사랑과 존경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 있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주님의 시체가 무덤에 없는 것으로 인하여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에 마리아의 기대대로 무덤에 주님의 시체가 있었더라면, 바울 사도가 고린도 전서 15장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가 믿는 바는 다 헛것이로다고 고백하게 되고 말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마리아는 주님의 시체가 없는 것으로 인하여 웁니다. 사실 은 없어서 기뻐해야 하는데 없어서 울고 있는 수준인 것입니다. 우리가 다 이런 주 준에 와 있는 것은 아닐까요 지금 여러분이 주님의 십자가와 죽으심과 부활의 사역 앞에서 어떤 수준을 가지고 있는지 분명하게 정검해보고 지나가야 합니다. 아직도, 여러분이 주님께 기여하고 치른 것이 있기에 안심하는 수준의 신앙입니까 아니면 늘 자신없는 신앙에 전전긍 긍하는 모습은 아닙니까 그래서 엎드릴 때마다 죄인인 것을 고백하는데 그 고백이 반복될 때마다 알수 없는 깊은 좌절감에 빠져드는 모습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지요 그러나, 여기서 확실히 해야 될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예수 그리 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의 경험이나 행위에 근거한 자신감을 버려야 합니다. 주님께 서 일러주신 말씀으로 서야 합니다. 특히 가장 중요한 확신의 기초가 되는 말씀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든든한 믿음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도 여러분을 흔들수 없는 것은 내가 나를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나 를 지키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확신이 우리가 선 기초석입니다.

( 롬 8:31-35)"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 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내가 잘났느냐 못났느냐가 아니라, 하나 님이 내 편이라면 누가 뭐라고 하겠느냐--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어느만큼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냐 하면 그의 아들을 주실 만큼입니다--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 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 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결론>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겠습니까 여러분의 절망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죄책감이 못난 것이 ( 롬 8:38-39)"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 이것이 신자의 믿음의 근거요, 확신의 근거입니다. 여러분은 이같은 사랑 가운데 있는 자입니다. 그러기에 어느날인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는 자리에 까지 기어코 가고야 마는 길에 접어들어선 것입니다. 이 확신과 믿음을 갖고 나아갈 때만이 애매 한 자기 감정에 사로잡혀 말씀을 송두리채 잊어버리는 망각증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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