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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유하게 하는 진리 (요 08: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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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천년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 내리면서 저주 받은 이름이 있다. 오늘도 그의 이름은 우리들의 입에 부끄러움 속에 들려졌고 앞으로도 온 세계 사람들에게 그렇게 불려 질 것이다.

 그 이름은 누구인가

본디오 빌라도 !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결재하여 주었던 로마 사람, 서기 30년대의 유대 총독이었다. 그는 십자가 처형을 허락하여 주면서 "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무죄하다. " 면서 준비 된 세수대야에 손까지 씻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 책임은 한번의 손 씻음으로 사해 질 것이 아니었다.

 빌라도의 불행은 어디에 있었던가 예수께서는 빌라도가 묻는 질문 " 네가 왕이냐 " 하고 묻는 질문에 "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사람은 내 소리를 듣느니라. " 하고 대답하셨다. 이때에 빌라도는 " 진리가 무엇이냐 " 하고 묻더니 대답도 듣지 아니하고는 그만 밖으로 나가 버리고 말았다.

진리를 깨달으려 하지 않고 제 길로 가버린 그의 행동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형에 넘겨 주는 결과를 가져 오고 말았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2)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진리란 무엇인가

오늘 우리들의 시대에 젊은이나 나이 많은 사람이나 혹은 단순한 사람이나 복잡한 사람이나, 실제적인 사람이나 과학적인 사람이나 간에 진리에 관한 문제를 아무런 주저 없이 받아 들이고 사는 경우가 많다. 이 사람들에게 유일한 진리란 다름 아닌 < 학문적인 진리 > 이다. 학문이라는 것은 우리들에게 삶의 양식과 인간 역사의 구조와 인간의 마음에 갖추어져 있는 것들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부여하여 준다.

어두움과 애매모호한 것으로부터 지식의 밝은 빛으로 들어서는 이러한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은 항상 학문적인 진리를 찬양하고, 중세의 위대한 신학자들처럼 "우리가 우리의 세계를 알게 되는 통로인 모든 위대한 원칙들은 바로 우리의 영혼 안에 내재하여 있는 신적인 영원한 빛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대학을 마친 사람에게 물어보라.

당신은 대학에서 당신의 삶에 관한 진리를 발견하였읍니까 하고 .... 그들은 대답하기를 주저할 것이다. 어떤 젊은 이는 그러한 진리가 없어도 그날 그날 잘 지내고 있어서 그렇게 필요한 것인지 관심도 없다고 말할 것이다. 학문이라는 것이 그들의 삶에 있어서 진리를 제시하여 줄 수 없다고 하는 것에 여러분 모두가 동의 할 줄 안다.

 그렇다면 그러한 진리를 어디에서 얻을 것인가 빌라도는 예수와의 대화 가운데 " 진리가 무엇이냐 " 라고 물었는데 이 질문을 통하여 우리가 아는대로는 진리에 대한 그 자신과 그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좌절하고 있다는 것과 오늘 우리들의 직장과 학원과 여러가지 연구소와 어떠한 종류의 만남에서든지 진리에 대하여 모두들 좌절하고 있다는 것을 현실은 나타내 보여 주고 있다.

 마틴 루터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1510 년에 어거스틴 수도단의 주요한 사명을 가지고 로마로 간 마틴 루터 그는 이 거룩한 도성에서 자기의 괴로운 영혼에 평안을 가져다 줄 진리를 갈구하고 있었다.

고행을 통하여 속죄를 얻으려고 유명한 스칼라 산타 (Scala Santa)의 28 계단을 열심으로 올라 가고 있었다. 한 계단 한 계단을 열심히 올라 갈 때에 그의 귀에 쟁쟁하게 울리는 말씀이 있었다. 그것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는 하박국 선지자의 말씀 / 바울 선생의 인용문이 그의 마음 속에 강하게 움직였다.

 루터는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근원이며 표준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이라고 + 믿었다.

 루터는 여기에서 자신의 심령 문제를 해결함으로서 부패하여 가는 로마 교회를 새롭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스칼라 산타의 28 계단을 무릎으로 오르는 고행이 없어도, 무슨 적선을 하지 않아도, 무슨 공로가 없어도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과 참 삶을 얻는 길은 < 믿음 > 에 있다는 고귀한 교훈을 얻게 된 것이다.

 개혁자의 마음을 강하게 움직인 것은 무엇인가

흘러 가는 물이 썩을 수는 없다. 그러나 고여 있는 물은 균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오래 묵은 역사 속에는 티끌과 때가 묻어나서 바른 길에서 벗어나는 일이 많다. 469 년을 지낸 오늘 우리 개신교에게 새로운 프로테스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어떤 사람은 개신교가 구교보다 더 타락하고 침체되어 그릇된 길을 가고 있다고까지 극단적으로 말하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진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고 본다.

 I. 진리의 주인을 알아야 한다.

.+

우리가 믿는 바 진리의 주인은 누구인가 로마 교회는 그 주인을 사람으로 생각 하였다. 베드로의 뒤를 이어 로마 교회는 하나님의 모든 권리를 교회가 대행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것으로 대단한 세도를 부렸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람의 뜻이 하나님의 뜻 처럼 나타나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여기에서 나타난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공공연히 돈을 받고 죄를 속하여 주는 면죄부를 팔기 시작한 것이다.

이 < 사진 > 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 팔렸던 면죄부다.

 이 면죄부 판매에 가장 앞섰던 사람이 테젤 (Tezel) 이다. 어느 날 이 테젤이 한 신사에게 앞으로 범하게 될 죄를 위하여 미리 용서 받을 수 있는 면죄부를 사라고 하여 그에게 한장을 팔았다. 그 날 저녁에 이 신사가 숲 속에서 매복하여 있다가 테젤이 지나갈 때 그를 막대기로 공격한 다음에 돈 통을 빼앗아 가지고 달아났다.

 테젤이 법에다 이 사실을 호소하였는데...... 얼마 후에 이 범인이 사로잡혔다.

그러나 이 사건의 재판 과정에서 재판장은 이 범인이 가지고 있었던 면죄부를 보고 이 사건을 기각 시켰다고 한다.

 인간의 어떠한 행동과 의사가 신앙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인간의 의지 보다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데서 신앙의 혁신은 일어 난다. 결코 인간이 주인이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신 할 수가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피조물이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과 대등한 지위를 차지하려고 한 일이 있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이 그렇고........

노아의 홍수 후에 인간이 쌓은 바벨탑이 그러한 것이었다.

어느 정도 탑이 올라 가자 그들은 이제 하나님과 싸워서 이긴 것처럼 의기 양양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바벨/ 곧 그들의 지혜를 무너지게 하였다.

인간의 의사, 인간의 의견, 인간의 어떠한 생각으로 교회가 좌지 우지하는 것은 아니다.

2 천년 동안의 교회 역사를 보면 알지않는가 사람들은 교회를 없이 하려고 하였으나 하나님은 교회를 존속하셨다. 교회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시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이다. 진리의 기둥이요 터다. 여기에 하나님을 제외하고 인위적으로 교권적으로 교파적으로 세력을 심고 혹은 다른 세력을 불러 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 교회가 하나되어야 한다면서 하나되지 못하는 것은 주인이신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은 진리일 수가 없다. 사람의 마음과 그 생활 속에 평안이 없다고 하는 것은 그 속에 이 진리가 없기 문이다. 하나님 제일 주의가 아니라 사람의 어떤 행실이나 공로를 가지고 좌우하려 하니 문제가 된다. 돈이나 학식이나 명예가 앞서면 안된다.

그것들 보다 믿음이 앞서고 모든 주권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설 때에 그 효력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II. 진리는 무엇인가 .+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요 17:17 ) 그것은 삶의 표준이다. 루터와 개혁자들은 신구약 66 권에 담겨진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았다. 사람들의 얼굴이 다른 것 만큼이나 서로 다른 주장을 가지고 있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참 자유를 줄 수 있는 도구는 무엇인가 공산당 선언문인가 막스레닌 사상인가 아니면 그러한 사상을 가지고 그것을 운위하는 사람들을 몇명인가 잡아 들였다고 자유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혼란을 막기 위하여 법을 제정하고 정신질환자 보호법을 제정하거나 학원 안정법 정도로 자유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부정적인 방법 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 신앙과 생활 속에 반드시 필요한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임을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마틴 루터가 주장한 오직 성경만 하는 주장은 성경에서만 얻을 수 있는 자유를 깨달은 데서 나온 말이다.

 III. 제단 앞에서 얻는 자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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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의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그 헌법에 국민이 누릴 자유를 명시하였다.

궁핍으로 부터의 자유 / 공포로부터의 자유 / 언론의 자유 / 종교의 자유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것 위에 우리 그리스도인이 누려야 할 꼭 있어야 할 자유가 있다. 그것은 제단에서의 자유이다.

 야곱은 형 에서에게 도망하여 지내는 동안 그 마음에 평안이 없었다. 20 년 세월을 지내는 동안 까물어칠 일들을 수 없이 많이 당하였다. 마침내 그가 형의 얼굴을 대하게 될 때에 그는 자기의 소유 중에서 좋은 것으로 내 놓아 형의 마음을 풀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인생들이 조상의 앞에 제단을 마련하고 재배하는 것은 모두가 자기 평안하고 잘 되게 해 달라고 하는 뜻에서이다. 죽은 조상이 잘 계시도록 드리는 제사가 아니다. 제발 저승에서라도 진노하지 마시고 우리들이 원 하는대로 잘 되게 해 주십시요 하는 것이다.

 옛 사람들은 양이나 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제단에 그 피를 쏟아 부음으로 하나님의 진로를 면하려 하였다. 또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이렇게 피로서 희생의 제사를 드리었던 백성들이 다시는 이러한 희생이 없이도 하나님 앞에 나아 갈 수 있는 길을 메시야가 열어 놓으신 것에 대하여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제에게 가서 고해를 하였다. 요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헌금으로 희생의 제물을 대신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거룩한 옷을 입고 몸을 좌우로 흔들면서 또다시 율법에 매인 생활을 은근히 강조하면서 살고자 하는 부류도 생겼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

더우기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얻게 된 자유는 누구에게 빼앗길 수 없는 진리이다. 이 진리는 영생에까지 약속된 것이다. 이 세상이 주는 자유도 고귀하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우리에게 죄의 용서나 영생의 기쁨을 주지는 못한다.

또한 모든 세상에서의 유혹을 이기게도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에게 한 영원한 자유를 주셨다.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자유하는 것은 그 분 안에 진리가 있고 길이 있고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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