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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화의 존재 (요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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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대화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대화를 해야만 생존할 수가 있습니다. 대화가 끊어진 인간관계는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마치 체내에 혈액순환이 잘 되면 생명이 유지되지만 혈액순환이 중단되면 죽음을 가져오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대화를 통해서 죽었던 생명이 다시 회복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라우엘 하우라는 목회자는 ‘대화의 기적’이라고 말했습니다. 한 마디 말이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대화는 단순한 언어의 나열이 아니라 그 속에 깊은 사상과 생명과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대화는 평화와 조화를 이루지만 좋지 못한 대화는 파괴와 의심을 낳습니다. 좋은 대화는 치유가 되지만 좋지 못한 대화는 아픔과 상처를 낳습니다. 좋은 대화는 사랑을 낳고 잘못된 대화는 미움과 증오심을 낳게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두 명의 유명한 연설가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독일의 히틀러입니다. 그는 게르만 민족에게 적개심과 분노를 일으키게 하여 수많은 젊은이들을 전쟁터에서 죽게 했습니다. 게르만 민족은 결국 2차대전에서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훌륭한 연설가이긴 했지만 증오심을 일으킨 사람이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영국의 윈스턴 처칠경입니다. 그는 BBC 방송을 통한 연설에서 영국 국민들에게 소망과 용기를 심어주었습니다. 우리가 바칠 것은 오직 땀과 눈물과 피밖에 없다는 처칠경의 연설을 들은 영국 국민들은 소망과 용기를 가지고 다시 일어나서 드디어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윈스턴처칠의 연설은 영국 승리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대화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더불어 대화하기를 원하십니다.
최초의 동족상잔의 죽음을 낳게 했던 가인에게 “가인아,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실 때에 가인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하고 반항하며 거짓대답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실존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땅에 오셔서 우리와 더불어 대화하시고 기쁜 소식을 주시기 원하셨고, 나중에는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죽음으로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쁜 소식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중에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셔서 새로운 생명을 얻게 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고 우리의 생명을 거듭나게 하시는 것, 이것이 말씀의 종교요, 대화의 종교입니다. 여기에 대화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대화의 기적에 대하여 몇 가지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1. 첫 4분의 대화의 중요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대화할 때에도 먼저 하나님 앞에 영광과 찬송과 존귀와 감사를 드린 후 간구의 기도, 중보의 기도, 참회의 기도가 있어야만 하나님과 바른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첫 4분 동안의 대화가 매우 중요합니다. 처음에 어떤 대화를 하느냐에 따라서 그 대화가 열매를 맺든지 실패하든지 합니다. 연설을 할 때에도 첫 4분 동안의 서론이 매우 중요합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만난 사람은 불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관계성의 형성에 있어서 주저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사랑과 회의, 받아들임과 거절 사이에 있을 때에 사랑의 요구, 인정의 요구, 환영받고자 하는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대화가 시작되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를 인정하고 그에게 사랑을 베풀고 다정한 말로 환영하고 감사한 말로 시작할 때에 나중 대화는 좋은 결실을 맺게 되어 있습니다.
아침에 뿔뿔이 흩어져 나갔던 가족들이 저녁에 피곤한 몸으로 돌아왔을 때에 가족들의 대화가 아름다와야 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은총 가운데 하루를 지냈으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식탁에 둘러앉아 다정한 말을 주고 받을 때에 스트레스가 해소됩니다. 마음의 상처가 치유를 받게 됩니다.
만일 직장에서 돌아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면 서로 눈치를 보게 되고 불안해질 것입니다. 대화가 중단되면 불안한 공기가 그 가정을 지배하게 됩니다. 서로를 용납하는 말, 사랑하는 말, 친절한 말, 격려와 위로의 말을 할 때에 기적이 일어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지만 실상 현장에서 죄를 지은 사람을 정죄하거나 심판하지 않았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히 여인이 돌에 맞아죽게 되었을때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이 여인을 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너를 정죄하는 자가 없느냐. 나도 저를 정죄하지 않겠다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말아라”하시고는 그에게 소망과 용기를 주고 위로해서 돌려보내셨습니다.
죄 있는 자들을 죄인이라 책망하지 아니하고 사랑으로 싸매어주시고 위로해주시고 소망과 용기를 주어 돌려 보내시는 예수님.
첫 4분 동안의 대화가 매우 중요합니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모든 대화에서 희망을 주는 말, 창조적인 말, 감싸주고 인정하고 용기를 주는 말로 첫마디를 시작할 때에 그 대화는 열매를 맺게 된다는 교훈입니다.

2. 긍정적인 언어의 대화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는데 이 말씀이 모든 만물을 창조했다고 했습니다. 빛도 창조했습니다. 창조의 능력이 말씀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받은 우리들의 대화 속에서도 창조적인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용서와 구원과 생명의 능력의 역사가 우리의 대화중에 일어나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언어가 아니라 믿음을 주고 용서와 소망과 사랑을 주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용어를 써야 합니다.
좋은 나무에서 좋은 과실을 맺는 것처럼, 선한 사람에게서 선한 열매가 맺습니다. 사랑을 가진 사람은 소망과 위로의 말,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4장 29절에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남의 약점을 드러내고 악한 말을 해서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남을 격려하고 용기를 주는 긍정적인 말을 할때에 기적이 일어나고 치유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처음에 유학갔을 때 영어가 모자라서 좀처로 강의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래 가지고 내가 과연 졸업을 할 수 있을까 몹시 불안했습니다. 밤늦도록 열심히 공부를 하면서도 자꾸 두려운 마음만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헝가리에서 오신 치키스라는 목회 심리학 교수를 찾아가 상담을 했습니다.
“교수님, 제가 지금 언어 때문에 몹시 초초하고 두려운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고 말하자 그 분은 “염려하지 마시오. 당신의 영어는 내가 처음 이 땅에 왔을 때 했던 영어보다 훨씬 잘 하오. 다 해낼 수 있고. 그러니 낙심하지 말고 용기를 가지세요.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이 나에게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그 방에서 나올 때는 불안했던 마음이 다 가시고 용기를 얻고 돌아왔습니다. 그 말대로 다 되었습니다. 저는 해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에게, 친구에게, 가족에서 좋은 말로 격려합시다.
천재가 따로 없습니다. 자녀들에게 용기와 소망을 주고 치료하는 말을 하게 될 때에 그 자녀들은 훌륭한 일을 해낼 수가 있습니다.
대화 중에 어떤 용어를 쓰느냐에 따라서 그가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크리스챤이라고 하면서도 기독교와 동떨어진 말을 자주 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서 말씀 가운데 있는 긍정적인 용어로 저들의 상처를 싸매어주고 용기를 주어 기적을 일으키는 긍정적인 대화를 하시기 바랍니다.

3. 성실한 대화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우리 가운데 계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진리와 은혜가 충만하다고 했습니다.
부부간의 대화도 진실에 기반을 두어야 합니다. 무언가를 시험해보기 위해서 말을 한번 던져보는 것은 잘못된 대화입니다. 진실하고 솔직해야 됩니다. 내외간이나, 친구간이나 진실에 기초를 둔 대화가 있어야만 거기에 열매가 있고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남북대화를 살펴봅시다. 그동안 남북대화가 수없이 많이 열렸지만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지난번에도 당장 뭔가가 될 것 같았지만 우리는 또 속았습니다. 왜냐하면 진실성이 없는 저들의 대화를 우리가 그대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런 방법으로 백성들도 우롱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양심과 도덕의 표준이 없어지고 거짓말을 해도 거짓말인 줄 모릅니다. 결국 경제도 낙후되어 어찌 할 수 없이 되고 말았습니다. 진실성에 기초를 둔 대화가 이루어질 때에 자녀들에게도, 부부간에도, 친구간에도 창조적인 기적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몹시 안타까운 것은 가족들이 식탁에 함께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침에 제각기 먹고 학교로, 직장으로 흩어져갑니다. 자녁에도 같이 모일 시간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매우 심각한 위기 상황입니다. 함께 모여 하루의 생활을 서로 얘기하고 서로를 위로하며 사랑스러운 말로 대화할 때에 그 식탁이 은혜스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녀들과 모여 식사하는 시간에 감정의 쓰레기들을 식탁에 쏟아 부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대화가 매끄럽지 못하고 큰 소리가 나고 아이들이 수저를 내던지고 뛰쳐나갑니다.
진실을 심으면 진실의 열매를 거두고 거짓을 심으면 거짓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상대방에게 진실과 사랑과 긍휼과 자비를 심어 놓으면 어느땐가는 그 진실과 사랑을 되받을 수가 있지만 남에게 거짓을 심어 놓으면 결국 훗날에 내가 그 댓가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진실한 대화, 사랑의 대화, 창조적인 대화가 이루어질 때에 치유와 용서와 신뢰가 있는 대화 속의 기적이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4. 생명 있는 대화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크리스챤의 대화 속에는 예수님의 진리가 숨어있고 생명수가 흘러넘칩니다. 죽었던 생명이 다시 새생명을 얻게 됩니다.
지난 주간에 미국과 에스토니아에서 오신 분들이 우리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광림교회의 좋은 점을 배우기 위해 진지하게 대화했습니다.
미국의 United Theological Seminary에서 박사학위를 밟고 있는 15명의 학생들이 우리 교회에 와서 새벽기도, 수요예배, 트리니터 성서연구 등에 참석하고, 사랑의 집과 수도원에도 가보고, 심방도 해 보면서 구석구석 살펴보았습니다. 제가 마지막 강의를 할 때 무엇을 얻었느냐고 물었더니 어떤 학생은 이번 한 주일 동안에 광림교회에서 배운 것은 1년 동안이라도 미국 신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습니다.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와서 직접 보니까 정말 광림교회는 진실하고 생명이 넘치는 대화 속에서 창조적인 역사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배우기 위해 열심을 내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에스토니아에서 오신 형제들은 발틱 3국과 러시아 사람들을 위해 미션센타를 세우려고 하는데 광림교회의 신앙을 세우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복음적이고 생동 있는 신앙을 가지고 신학생을 키우려고 하는데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마케도니아 사람이 손을 벌리고 도와달라고 한 것처럼, 그들은 미국을 향해서가 아니라 바로 한국의 광림교회를 향해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왔지만 이제는 남을 도울 수 있는 축복받은 교회, 생명을 나누어주는 교회, 새로운 관계성을 형성하는 교회가 된 것입니다.
저는 2년 전에 소련에 가서 고르바쵸프 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그에게 신앙적인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이 어렸을 때 세례를 받았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그렇다면 그 세례가 당신에게 은혜가 됩니까
“저는 어렸을 때 할아버지 할머니를 따라서 예배당에 열심히 나갔습니다. 그때 저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제 원이름은 빅토르 고르바쵸프인데 세계를 받고 미하일 고르바쵸프로 바궜습니다. 미하일이란 말은 ‘마가’란 뜻입니다.”
저는 또 한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이 페레스트로이카를 하는 동안 어머니가 뒤에서 기도했다는데 당신은 기도의 힘을 믿습니까
“예, 우리 어머니뿐 아니라 어버지도 날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기의 종교관을 얘기했는데 인간은 창조주의 초고의 피조물이므로 우리는 선과 도덕을 행해야 하고 정의와 평화를 이룩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제마음 속에 고르바쵸프와 더불어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과거 40여 년 동안 무신론자들의 우두머리요, 공산주의의 거목이었던 그에게 지금까지 러시아 정교회의 사제들조차도 기도하자는 얘기를 못했었는데 만약 기도하자고 했다가 거절당하면 어쩌나 두려운 마음도 있었습니다. 저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스터 고르바쵸프, 당신이야말로 지금 기도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소외감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고독할 것입니다.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당황했습니다. 그는 40여 년 동안 한번도 머리를 숙여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감동하니까 그의 얼굴이 붉그레해지더니 제 손을 꽉 잡았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숙였습니다. 기도가 다 끝난 후 그는 저에게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얼굴빛이 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과의 대화, 생명 있는 대화입니다. 거기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 크리스챤에게는 생명이 흘러넘치는 대화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새로운 창조와 기적을 일으키는 기도가 있고 대화가 있어야 될 것입니다.
첫 4분간의 대화의 중요성을 깨닫고 적극적인 언어, 진실한 언어, 사랑의 언어를 통해서 우리의 대화 속에서 기적을 일으키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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