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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태초에 (요 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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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맨 처음에 우리가 시작한 시간을 알고 있다. 내가 부모로 부 터 낳은 때를 나의 시작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모 르는 또 다른 시작이 있다.

나의 부모가 태어난 것은 나는 모른다. 분명히 부모의 시작도 있었겠 지만 아들은 그것은 모르고 자기의 시작만 알고 있을 뿐이다. 우리 가 세상에 나오기 전에도 , 내가 나라고 하기전에도 분명히 시작은 있었지만 우리가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밭에 씨를 뿌리면 싹이난다. 그리고 그 싹이 잎이 되고 잎 은 가지가 된다. 그리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다. 그러면 그 열매 속에는 다시 씨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씨는 다시 땅에 뿌려지고 또 싹이 나게 된다. 이것을 보면 우리가 알 수 없는 ' 시작 '이 있다 는 것을 알 수 있다.

씨가 시작인지 가지가 시작인지 열매가 시작인지 모르는 시작이 있 다는 말이다. 분명히 우리가 아는 것은 씨를 심으니까 싹이 나더라는 것이지만 그 씨는 열매에서 왔다. 그렇다면 열매는 그 나무의 시작인 가. 아니다. 열매는 꽃으로 부터 온 것이다. 그러면 꽃이 시작인가.

그것은 가지로 부터이다. 그 가지는 씨에서 출발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시간적으로 정할 수 없는' 시작'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아는 '시작'이 있지만 우리가 모르는 '시작'이 또 있다. 요 한은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 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씀에서 태 초는 바로 우리가 모르는 태초이다. 어디라고 정할 수 없는 태초인 것이다.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열매라고 할 수도 없고 씨 라고 할 수도 없고 꽃이라고 할 수도 없는 , 그래서 영원전부터 있는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시작'이 있다.

하나님은 언제부터 계시는걸까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시작'안에 계신 것이 아니고 우리가 알고 있 지 못하는 '시작'안에 계시기 때문에 영원한 '시작'안에 계시다고 말 할 수 있다. 우리는 거기에서 나왔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 의 '시작'뿐이다.

어떤 사람이든지 '시작'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끝'도 있다. 출생이 있기 때문에 죽을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출생과 죽음이 우연한 것이라면 이 사건은 단순히 일회적인 사건이 되지만 사실을 알고 나면 나의 출생과 죽음이라는 사건은 더 큰 '시 작'과 '끝'안에서의 '시작'과 '끝'인 것을 알게 된다. 다시말하면 우 리의 출생과 죽음은 영원한 시간안에서 한 경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안에서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인 우리가 한정지을 수 없고 우리가 하나님안에서 한정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열이라면 나는 하나이다. 하나님안에는 많은 내가 들어 있지만 내 속 에는 하나님이 다 들어 올 수 없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에서 " 태초 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는 말씀을 했을 때의 의미는 우 리가 부모님에게로 부터 태어날 때와 같은 의미이고 요한복음에서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 는 말씀은 우리의 '시작'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시작하기 전의 '시작'을 말하고 있다.

창세기 1:3에 "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 라는 말씀에서 빛이 있는 것이 시작이 아니고 빛이 있으라고 하신 말씀이 먼저 있었 다. 우리가 아는 것은 빛이 있는 것 부터 알고 있기 때문에 빛이 있 는 것부터 시작이라고 하겠지만 하나님안에서는 빛이 있는 것 보다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신 그 말씀이 먼저인 것이다.

그러면 빛이 있으라는 말씀이 시작인가 그렇지 않고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첫 부분 인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 이다.

마가복음은 한 사람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는데서 부터 시작해서 부활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앉은 데까지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 님이 어떻게 이 세상에 왔느냐는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고 사람이 어 떻게 해서 하나님에게 가게 되느냐는 문제를 다룬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한 사람이 자라서 예수 라는 사람까지 오는 것을 보게 된다. 나무로 말하면 아브라함은 떡잎 이라면 예수는 열매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예수는 하나이다. 아브라함은 시간적으로는 예수보다 먼저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왜 예수는 ' 아브람함이 있기 전에 내가 먼저 있었 느니라 ' 라고 말하고 있는가 아브라함이 싹이면 예수는 씨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오는 입장으로 보면 ' 내가 아브라함이 있기 전 에 있었느니라 ' 라고 말하게 되고 사람이 하나님에게 가는 입장으로 보면 아브라함이 먼저 있고 예수가 나중에 있다고 말하게 된다. 여기 에서 우리는 열매가 먼저인가 씨가 먼저인가를 생각하게 되는데 이것 은 어떤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입장이 없이 어떤 것 이 먼저라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이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알아듣지 못 하는 말을 하게 된 이유이다.

" 내가 아브라함 보다 먼저 있었느니라. 아브라함이 나의 때 볼 것 을 즐거워 하였느니라. " 라고 말하는 세계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가 부활안에 살게 된 사실도 같은 원리로 말할 수 있다. 역사적 으로는 우리가 육신으로 태어나서 예수를 알았고 예수의 부활에 이르 렀다고 말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을 다른 시각으로 보면 부활이 우리 안에 와서 인격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이 두 가지 길을 다 말하고 있다.

어떤 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이 점점 땅으로 내려 와서 육신이 된 것을 말하고 또 다른 복음서에서는 사람이 점점 하나님에게 이끌려서 하나 님의 보좌 우편에 오르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한 사실을 두 입 장에서 보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한국을 극동지방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미국은 서 쪽이 된다. 그러나 미국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미국을 동쪽이라고 하 고 한국을 서쪽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구의 입장에서 생각하느 냐에 따라 해석은 반대가 될 수 있다.

성경에서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이 바로 이런 경우의 좋은 예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복이 되는 것은 이 두 경우가 다르게 보이는 것이 아니고 하나로 보인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할렐 루야!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 이것은 우리가 ' 말씀 '으로 지어진 것 을 말한다. 태초 , 말씀 , 나 의 순서대로 존재하게 되었다. 내가 있 기 전에 하나님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이 있기 전에 그 말씀하시는 이가 있었다. 우리는 우리자신이 '시작'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 자신이 있기 전에 이미 '시작'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시작이 아닌 것처럼 끝도 우리가 될 수 없다.

사람의 생각으로 자기가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끝나는 것을 두려워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시작도 나로 말미암지 않았기 때문에 끝도 나로 말미암지 않는다. 내가 끝난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나를 있으라고 하신 이는 영원 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보통 사람들은 하나님은 병을 고쳐 주시는 분이야, 하나님은 홍해 를 가를 수 있는 분이야 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믿 는 믿음은 갓바위의 돌부처가 영험이 있다고 믿는 것과 다를 바가 없 다.

우리가 믿는 것은 내가 있기 전에 있는 분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고 나는 그로 말미암아 있게 된것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끝 나더라도 그 분은 끝나지 않는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아브라함을 부르신이가 있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세상을 떠났지만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는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이삭의 하나님이 되었고 또 이삭이 끝이 났지만 다시 야 곱의 하나님으로 사시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 아브라 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라 하신 것을 읽어 보 지 못하였느냐 ' 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배역은 늘 바뀌지 만 연출가는 항상 한 사람이다.

예수는 하나님안에 있었다. 그래서 예수는 죽었지만 하나님은 살아 계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기 때문에 나는 죽 어도 그리스도는 영원하시다.

컵이 큰 물통속에 들어 있을 때 물이 컵안에 있다고 할 수도 있고 컵 이 물 속에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컵이 어떻게 되든지 물통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의미와 같은 것이다.

분명히 나는 그리스도안에 있고 그리스도는 내 안에 있다. 그리고 그 리스도가 내 안에 있는 것보다 내가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이 더 넓고 크다는 것을 알게 된다. 컵안에 물이 담겨있는 것보다 물통안에 있는 컵은 항상 물이 넘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우리 는 항상 넘치게 된다. 넘어져도 그리스도이고 서있어도 그리스도이 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이러한 세계로 이끌고자 하신다.

사람은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 라는 말씀의 ' 태초 ' 안에서 창조되었다. 말씀안에서 창조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 다. 우리가 스스로 있게 되었다면 자존심은 안 상하겠지만 이것은 물 통밖에 있는 컵과 같은 신세인 것이다. 한번 엎어지면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신세가 되기 때문에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영원히 살려 고 노력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물 한 컵의 능력이 얼마나 가겠 는가 우리가 큰 물통이신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은 얼마나 목마름 이 없는 세계로 인도된 것인가 우리가 모르는 태초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이것은 우리가 한 개의 물컵이 아니고 물통안의 컵인 것을 말하 고 있다. 우리는 그의 세계안에 있다. 이것을 바울은 ' 그리스 도 안 '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표현은 대단히 놀라운 것이 다. 이것을 이해하는 데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역사안에서 베드로도 부활하지 않았고 요한도 부활하지 않았 다. 예수외에는 역사적으로 부활한 사람이 없다. 그런데 이들은 지금 부활하신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신기한 일이 다. 역사적으로 부활하려면 지금도 할 수 없는데 그들은 그리스 도 안에서 부활을 살고 있었다. 살아 있을 때부터 그들은 부활 을 살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안에 살고 있었 다. 그들은 자기들의 운명이 큰 물통안의 컵이라는 사실을 알았 기 때문에 예수가 자기들의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되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인것을 아는 것은 얼마나 축복된 일인지 모른다. 그리스도라는 큰 물통속에 내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얼마나 큰 복인가 내가 무엇이 되어서가 아니고 내가 그 안에 있다는 것이 중요 하다. 천당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사람은 이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물통은 모르고 물 컵만 생각하기 때문에 컵안의 물이 얼마나 오래 갈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물통 안의 컵이라고 안 사람은 물이 없어질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자기는 항상 물통과 함께 다닐 운명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물 통이 천국에 가면 나도 천국에 가고 물통이 지옥에 가면 나도 지옥에 가게 된다. 우리는 통을 좋아하는 것이지 통이 어디로 가느냐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통보다 어디 로 가느냐에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다. 예수님이 천당에 보 내주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지 만일 그가 지옥으로 간다고 하 면 아무도 따라가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의 능력을 보고 그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였었다. 지금의 누구 보다도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친히 보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저주를 받게 되자 모두 도망치고 말았다. 그의 능력은 좋 지만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은 싫다는 것이다. 물통을 좋아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통이 좋으면 그 물통이 어디로 가든지 상관하지 않는다. 이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에녹은 300 년간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 가시더라고 기 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동행하던 자를 데리고 가시고 영원히 동 행하시기를 원하신다. 사람은 아무리 오래 살아도 결국은 죽는 다. 그런데 에녹만은 끝까지 하나님과 동행하였더라고 기록되여 있다.

사람들은 함께 사는 축복을 모르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천당 에 갈까하는 생각만 한다. 예수의 힘을 입어 천당에 갈 수 없을 까 또는 하나님의 도움을 입어서 천당에 갈 수 없을까 라 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는 곳이 십자가이면 어떻하겠는가 예수님처럼 하나님이 십자가에 죽게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이 오라는 곳은 다 좋은 곳일 것이라고 생 각하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 있지만 예수님이 가신 곳은 십자가 였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돌아 갔던 것이다.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나사로는 그와 함께 사는 것이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 에 예수와 영원히 살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 그가 우리의 몸이 되어 서 함께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과 하나되어 함 께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이다. 이것이 인생의 가장 큰 복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섞어져서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상태가 행복이 고 영생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물리적인 결합을 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화 학적인 결합을 요구하신다. 이것은 하나님과 내가 섞여서 전혀 다른 인격이 되어 세상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하나님을 떠나서 천당도 갈 수 없고 지옥도 갈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이 다. 오직 하나님과 같이 있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 되게 된다.

물질 세계에서도 두 물질이 화학적 결합을 하면 전혀 다른 제 3 의 물질이 발생되듯이 하나님의 창조안에서도 흙에 생기를 불어 넣었더니 산혼이 나오게 되었다. 물속에서 산소 분자와 수소 분 자를 찾을 수 없듯이 우리는 산혼안에서 흙도 찾을 수 없고 생 기도 찾을 수 없다. 그냥 하나의 인격만 나타날 뿐이다. 이 인 격이 모여 사는 곳이 천국이고 하나님 나라이다. 우리가 생각하 는 천당도 이렇게 아름답지 않을 것이다.

내가 있기 전에 ' 태초'가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얼마나 넓 게 하는지 모른다. 그리고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는 사실은 우리 를 너무나 복되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려고 많은 노력을 한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 해도 알 수 없는 것이 이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으로 비춰주지 않으면 우리는 도저히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존재이다.

내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빛이 비추 지 않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세계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없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모든 것의 해결이다. 물통속에 들어 있는 컵처럼 완전하다. 그렇지 않고 내가 주체가 되어 알아가는 길은 야곱의 우물처럼 늘 새로 파야 한다. 이것은 시간이 지나 면 없어지는 원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피곤하지만 그리스도안 에서의 생활은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는 생활이 된다.

이것이 나를 지으신 분, 즉 나보다 먼저 계신 분안의 생활이다.

나보다 크신 분이 있다는 것이 우리의 복이다. 그리고 그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어린 아이들은 부모가 있기 때문에 안심을 하고 놀 수 있다. 그런데 간혹 부모와 관계가 좋지 않은 아이들 은 자기보다 큰 자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에 불안해 하고 혼 란에 빠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부모가 자기 보다 크다는 것을 아는 아이들은 자기의 소유를 안심하고 부모에게 맡기게 되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부모에게 맡기는 것을 불안해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불안한 이유이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다고 생각하면 뛸 필요도 없고 달릴 필요 도 없다. 뛰어도 주님안이고 달려도 주님안이기 때문이다. 우리 는 아무곳도 갈 데가 없다. " 오늘 밤 네 영혼을 찾으리니 네 예비한 것이 뉘것이 되겠느냐 " 라는 말씀속에서 우리는 나보 다 더 큰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창고를 지어서 내 곡식을 더 많이 저장하여 더욱 오래 살리라 하지만 이런 내 생각과 다르게 내 영혼을 다시 찾을 수 있는 분이 계시다는 사 실을 알게 된다.이것을 알고나면 나의 생각과 계획이 얼마나 사 소하고 헛된 것인가를 알게 된다. 그러나 이것을 모를 때는 날 아가는 것과 걸어가는 것의 차이가 엄청나게 크다고 생각된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불행이다. 걷는 사람과 뛰는 사람과 나는 사람이 다르게 보이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보다 크신이 안에서 우리들은 하나이다. 걷는 것과 나는 것이 하나로 보인다는 말이다. 영원한 분안에서 우리는 한 경점이기 때문에 우리가 계획한 것이 새로운 것이 없는 것이다.

물통안에 있는 컵이 자기가 놀라운 계획을 세웠다고 해서 물 통밖으로 나올 수 있을까 또 나온다고 해서 그의 삶이 더 풍 성해질 수 있을까 물통안에는 큰컵 작은 컵 툭배기 항아리 등 여러가지가 한데 어 울어져 있다. 그 속에서 서로 잘났다고 아웅 다웅 한다면 물통 이 생각할 때 얼마나 우습겠는가 성경에도 하나님께서 인생이 하는 것을 보고 웃으셨다고 기록된 데가 있는데 이 말은 인생을 허탈하게 하는 말이다. 어른들이 어린아이들 노는 것을 보면 웃음이 나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자기들은 엄마 아빠 하면서 실감나게 하지만 우리들이 보기에는 웃음이 나오게 된다.

이와같이 우리가 세상 사람들이 사는 것을 보면 우습다는 것이 다. 부활안에서 보면 그들이 생각하는 것이 너무나 사소하고 유 치하게 보인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붙잡고 뺏기면 큰일날 줄 로 알고 있다. 어린아이가 과자 하나를 뺏기면 큰일날 줄 알고 웅켜쥐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어른이 보면 너무나 답답한 일이지만 어린아이의 생각으로는 그것이 자기의 모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놓으면 어머니는 더욱 맛 있는 과자를 주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활안으로 인도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나보다 먼저 있는 태초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한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세계를 열어 주는 것인지 모른다.

우리는 나의 생각의 세계가 얼마나 좁고 한정적인가를 아는 것 이 필요하다. 나보다 더 크신 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아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다. 우리는 이 큰 축복의 부름 안에 있다.

성찬식을 해야한다, 안해도 된다 라는 문제로 싸으는 사람도 있 고 세례를 받느냐, 침례를 받느냐는 문제로 갈라지는 사람도 있 다. 천당이 없으면 자기는 예수를 안 믿겠다는 사람도 있다. 이 런 문제로 왈가왈부하는 것을 보는 하나님은 얼마나 웃음이 나 오겠는가 이것들은 다 사람의 좁은 생각이고 모든 것은 다 하 나님의 소관일 뿐이다. " 하나님! 천당은 꼭 있어야 합니다. " 라고 할 수도 없고 지옥은 없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것 이다. 사람의 생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주님 안에 있는 것만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천당가는 것도 소용없 고 지옥에 가는 것도 소용없다. 예수와 함께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세상이 끝나도 소용없고 환난이 끝나도 소용없고 휴거를 한다고 해도 소용없다. 구름을 타고 앉아서 무엇을 한다 는 말인가. 우리는 주님과 결합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

이 좋은 것을 천국이라고 하기도 하고 휴거라고 하기도 하고 말 세라고 하기도 하고 새 예루살렘이라고 하기도 한다.

우리는 더 큰 세계를 볼 필요가 있다. 시집가는 것도 아니고 장가가는 것도 아닌 세계를 보아야 한다. 나보다 더 크신 이 안 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손오공은 여의봉을 가지고 온갖 재주를 부리며 천지를 뒤흔들면 서 돌아 다녔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가 돌아다닌곳은 부처님 의 손바닥이더라는 것이다. 우리 형제들도 손오공만큼은 깨달아 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들은 부처님보다 더 큰 하나님안에 있 음을 알아야 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 는 말씀은 나와 상관없이 내가 있기 전에 나보다 크신 이가 있었음을 말한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기초이다. 이 기초위에 우리의 신앙이 세워져야 한다. 우리가 이 말씀, 저 말씀 , 혹은 이 경험 ,저 경험 하는 것은 이 기초 를 튼튼히 하기 위함이다. 나보다 크신 분이 있다는 것을 알아 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아무리 달려도 지구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처럼 나 보 다 크신 이 안에서 우리는 지극히 안정될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세계를 거부한다. 자기로 시작하고 싶은 생 각때문이다. 그러나 자기로 시작하는 인생이 얼마나 피곤하고 옹색한가 를 아는 사람이 있는가 불안과 염려가 끈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매달리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 네가 내 안에 있지 않느냐 ' 라고 대답할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부활안으로 , 태초안으로 들어오기를 원하고 있다. 내 생각보다 더 큰 생각안 으로 들어 오기를 원하고 있다.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 이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마음이 넓어진다. 내가 있기전에 나를 있게한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이전 에 그 말씀을 하신 분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너무나 평안케 하는 말씀이다. 이 분안에서 우리는 오늘이나 내일이나 혹은 이 곳이나 저곳이나 장사하리라 하는 말씀을 이루게 된다. 하나님 을 만난 사람만 이렇게 살 수 있지 자기 혼자 사는 사람은 이 말을 할 수 없다. 자기 생각외에는 틀리다고 생각한다. 그는 '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돼 ' 라고 생각하자 마자 지옥에 떨어지 고 만다.

우리에게 어떤 것도 꼭 그래야 하는 것은 없다 성경속에 있는 것까지도 꼭 그래야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을 쓴 사람도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이 도시 에서나 저 도시에서나 장사하리라 하는 사람이 쓴 것이라는 말 이다.

성경을 꼭 지켜야 한다는 사람들 때문에 이상한 일들이 많이 발 생한다. 올겐을 쳐야 한다는 사람과 안 쳐야 된다는 사람이 나 오고 수건을 써야 한다는 사람과 쓰지 않아야 된다는 사람이 나 오게 되었다. 유치하지만 꼭 해야 된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된 다.

우리는 '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하는 세계로 나오지 않으면 성경이라도 우리를 속박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 다. 성경은 하나님안에 있는 사람이 쓴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자유가 되는 책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 에게는 속박이 된다.

'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데 '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이 사 람은 자기에게 안식이 오기전에 안식일만 지키려고 하는 꼴이 다. 이것은 마치 해방을 받지 못한 사람이 해방기념일을 지키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또 어떤 사람은 ' 침례를 받아야지 ' 하는 사람도 있다. 자기 안에 죽음이 없는 사람이 침례를 받으 면 무었하겠는가 이것은 죽지 않은 사람을 장례지내는 것과 같 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안에서는 이렇게 하기도 하고 저렇게 하기도 할 수 있다.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 이 말씀이 우리를 있게 하셨다.

이 말씀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무거운 짐을 내려 놓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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