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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에 이르는 믿음 (막 10:4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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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각자 저마다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 람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믿고,어떤 이는 자기의 젊음과 건강을 믿 고,혹은 명예를,권력을,인적인 관계 등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믿을 만한 것이 못되는 것을 믿었다가 나중에 후회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못믿을 것 을 믿는 일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문제는 무엇을 믿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예 수님을 믿는다 할 때에 그 믿음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늘 우리가 믿고 있 는 바를 이 시간 한 번 점검해 보았으면 합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신앙을 정의하기를 "신앙이란, 구체적인 생활 속 에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이다"라고 했습니다. 기도하는 시간이나, 예배하 는 시간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현실적인 가정 생활, 사회 생활 등 복잡한 현 실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하나님과 나와의 바른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라 표 현했습니다.

그는 다시 이것을 상징적으로 비사(비사)를 써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의 그릇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그릇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릇이란 우선 비어 있어야지 가득 채워있는 그릇은 쓸모가 없습니다. 다시 무엇을 담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릇 구실을 못하는 것입니다. 또한 깨끗하 고 빈 그릇이어야 합니다.독약이 묻었든지 오물이 묻었어도 다시 무엇을 담 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깨끗하게 씻겨져야하는 마음이 믿음입니다.

또한 큰 그릇이어야 합니다.너무 작은 종지잔은 좀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큰 그릇, 큰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스로보니게 여인에게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칭찬하셨습니다.크다는 말은 헬라 원문으로 '메가스피 스치스'라고 합니다.메가스는 아주 크다는 뜻으로 적어도 메가톤급의 큰 그 릇이 필요합니다.그릇이 커야만 큰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큰 그 릇, 위대한 그릇이 필요합니다.

만약에 마틴 루터가 오늘 이 세대에 살아있다면 믿음을 무엇에 비유했을 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제 생각에는 '믿음이란 수신기 채널이다'라고 말했 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테레비젼,라디오 등은 송신기가 아니 고 수신기입니다.받아들이는 기계이며 여기에는 채널이 있습니다. 이 우주 에는 여러 가지 전파가 오고가고 있지만 수신기가 없으면 아무 것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가끔 차를 운전하다가 피곤하면 라디오를 켜는데 종종 FM방송에서 좋은 음악이 흘러 나오는 것을 듣곤 합니다. 그러면 왜 진작 라디오를 듣지 않았을까 하고 아쉬워 합니다. 아무리 좋은 음악이 흘러 나오고 있어도 내 수신기의 스위치가 꺼져 있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수신기가 있고 또 제 구 실을 해야만 좋은 음악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물론 채널도 맞아야지 이것 이 빗나가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수신기 채널 이것이 바로 신앙이라 고 비유해 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솔로몬 왕이 21살에 약관의 왕이 되었습니다.그러고 보 니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일은 중첩되고 답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밤새워 기도를 드렸습니다.그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 게 구하라. 내가 너에게 무엇을 줄까" 솔로몬은 준비된 대답을 했습니 다. "주여, 내게 지혜로운 마음을 주옵소서." 이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오래 살게 해달라고 장수를 구할 수도 있고, 부귀를 구할 수도 있고, 원수의 성(성)을 구할 수도 있고, 안정 을 구할 수도 있고, 이렇게 구할 것이 많은데, 왜 하필이면 지혜를 구하느 냐"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은지라."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꼭 알맞는 기도,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은혜를 주시고자 하는데 채널이 맞지 않고 그릇 이 틀렸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시겠습니까 이것은 마치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와 같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키우면서 돈을 줄 때가 제일 기쁩니다.자녀가 돈을 달라고 할 때 선뜻 내어주면 가장 좋습니다. 그러나 없어서 못 주고 주어서는 안되겠기에 안주는 것입니다.

좋은 일에 바로 쓰기만 하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생각할 때 못받는 우리도 답답합니다마는 못주는 하나님은 더 괴 로우실 것입니다.주어서 안되겠기에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신앙 이란 수신기의 채널로서 꼭 맞아야 합니다.주시고자 하는 분과 받고자 하는 자의 사이에 마음이 맞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바디매오라고 하는 눈먼 소경이 예수님 앞에 나아와 자기의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말로만 고백한 것이 아니고 그의 행동 자체가 하나 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이 때에 주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는 말은 얼마나 좋은 얘기입니까 아주 꼭 맞았다 는 것입니다. 소경 바디매오의 훌륭한 믿음은 예수님께 인정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병 고치실 때 가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네 믿음 대로 되 리라,네 소원 대로 되리라." 어느 순간, 어느 믿음 즉 어떤 채널에 도달했 을 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내용입니다.

믿음, 바른 믿음, 바른 관계 이것이 우리가 찾아야 할 채널이라고 생각합 니다.

오늘 이 시간 본문에 나타난 소경 바디매오의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를 함 께 생각해 보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소경 바디매오의 믿음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 믿음입니다.

 47절에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를 질렀다"고 했는데 이것이 믿 음입니다.이 사람은 기회를 잘 포착한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자세히 보면 46절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라고 했습니다.여리고 성을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라 성 밖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나가시는데 그가 길가에 앉아 있다 가 소란한 소리 중에 예수님이 나가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때에 소리를 질렀는데 이 기회야말로 일생에 단 한 번 있는 귀한 기회였습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기회를 놓칠 때가 많으며 뒤로 미루기도 합니다.오늘 기도할 것을 내일로 미루고, 오늘 해야 할 선한 일을 다음 번에 하자고 미루다가 기회를 놓치고 있습니다.기회를 놓치는 것은 대단히 불행한 일입니다.

 두 번째로, 소경 바디매오의 믿음은 최선을 다하는 믿음입니다.

 바디매오는 가능한 것을 총동원했습니다. 소경으로 보지는 못했으나 들을 수는 있었습니다. 이것을 최대한으로 활용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없는 것만 생각하여 불평하는 일이 많습니다.특히 불평이 많고 원 망이 많은 젊은이들에게 저는 간단히 이렇게 말합니다.

"자네들이 내 나이 되어보면 알게 될거야."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사실 젊었다는 것 하나만 가지고도 최고로 행복한 것입니다. 나이가 들고 보면 돈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안됩니다.젊었다는 것 하나가 얼마나 큰 밑 천인데 무엇을 불평하겠습니까 굶고, 먹고, 출세 따위가 아무 것도 아닙니 다.젊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크게 행복한 것인데 과연 이것을 깨닫고 살아 가고 있습니까 그래서 불행이 있는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장님이므로 돈도 없고, 지식도 없고, 명예도 없고, 친구도 없 고, 가정도 없습니다.이렇게 다 없으나 귀가 있고,입이 있었습니다.들을 수 도 있고, 말할 수 있는 이 두 가지를 가지고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입니다.

못 가진 것 원망하지 않고,이미 가진 것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 가지고 하 나님 앞에 나오는 신앙을 가진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시시하다고 하지 않고 할 수 없 는 일은 못해서 못합니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은 받아 들이고 기다립니다. 주님의 뜻을 기 다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을 극대화해서 최선을 다해 후회 함이 없이 해 나갑니다.

굉장한 일을 하겠다고 떠 벌일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 가지고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이 소경 바디매오의 믿음이었습니다.

 세 번째로, 소경 바디매오의 믿음은 난관을 극복하는 믿음입니다.

 그가 주님 앞에 나아오는 데는 방해가 많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많은 군 중들이 꾸짖었습니다.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은, 군중들은 예수님이 눈먼 소경을 고쳤고, 문둥병도 깨끗이 낫게 하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그 장님 거지 한 사람이 주님께 간청할 때 왜 좀 도와주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인간애가 전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군중들은 메시야요,그리스도요,유대의 왕이 되실 분이 행차하시는데 거지가 왜 이렇게 시끄럽게 하느냐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군중과 제자들로부터 방해받은 소경 바디매오는 자기 스스로 실망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그리스도가 행차하시는데 나 같은 것이 방해를 해서 되겠 느냐고 자포자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모든 것을 아랑곳하 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말리면 말릴수록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고했습니다.이상하게도 사 람에게는 하지 말라고 말리면 더 하고 싶은 생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소경 바디매오는 잠잠하라고 꾸중했을 때 더 큰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역설적이고,역동적인 믿음이었습니다.

조그마한 핍박이 있다고 넘어지고 낙심하는 믿음은 안됩니다.핍박이 있을 수록 더 크게 소리지르고 열심히 나갈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네 번째로, 소경 바디매오의 믿음은 적극적인 결단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 바디매오가 그렇게 열심히 부르짖는 장면을 다 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를부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주께서 너를 부르신다는 한 마디에 그는 겉옷을 버려두고 뛰어나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장님이 뛴다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주께서 부르신다는 한 마 디에 겉옷을 팽개치고 뛰어 나갔다는 것입니다.이 겉옷은 소경 바디매오에 게 있어서는 하나밖에 없는 밑천이었습니다. 이 밑천을 내버렸다는 것은 다 시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다시 거지 누더기의 생활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내팽개치고 장님이 예수님의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그 대로 달음질쳤던 것입니다. 얼마나 훌륭한 믿음입니까 눈뜬 사람들 가운데 교회에 나갈까 말까 하며 우물쭈물 하다가 지각을 하 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이 소경 거지 바디매오처럼 좀 확끈하게 나갈 수 없겠습니까 좀더 적극적으로 겉옷을 벗어 던지고 예수님의 음성이 들리 는 곳으로 뛰어갈 수 없겠습니까 새 것을 바라면서 옛 옷을 입고 있고, 옛 날 생활 양식을 버리지 못하고, 옛날 습관 그대로 있고,옛 신분 그대로 가 지고 신앙생활하겠다고 하니 무엇이 되겠습니까 옛 생활을 깨끗이 청산하 고 주저없이 달려가는 모습이 아쉽습니다. 만일에 눈을뜨지 못하면 어떡하 나 하는 생각을 그는 하지 않았습니다.믿음에는 만약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에 찾아가셨을 때 많은 무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사로야 나오너라"하고 소 리쳤습니다. 만약에 나사로가 안나오면 어떡합니까 우리는 언제든지 믿을 때 만약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좀 빠져나갈 뒷문을 생각하고 믿는 겁니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많은 무리 가운데서 뒷 일을 생각지 않으시 고 소리지르셨습니다.

오늘 이 소경 바디매오도 겉옷을 던질 때는 뒤에 일을 생각지 않았습니 다.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인지 모릅니다.

 다섯 번째로, 소경 바디매오의 믿음은 새 삶의 확신이 있는 믿음입니다.

 이제 에수님께서 그를 불러 그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해 주 기를 원하느냐" "네, 보기를 원하나이다." 이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이 사람은 평생 얻어 먹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돈 한푼 주세요"라는 말에 익숙해졌고 그것이 습관이 되었고 이 말이 체 질화된 사람입니다."돈 한푼 주세요, 적선하세요." 이 한마디로 언어생활이 끝난 사람입니다. 이것 밖에는 배운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 늘 일생 처음 주님 앞에서 다른 말을 하게 됩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여러분, 이 대답이 중요한 것입니다.우리가 이 세상에서 돈, 돈 하다가 교회까지 와서도 돈입니까 "복 주세요"하는 것이 결국 돈 달라는 것이 아 니겠습니까 세상에서는 돈, 돈 하다가도 여기 나와서는 한 번쯤,"하나님! 돈보다는 좀 진실하게 살게 해 주세요." 이래야 되지 않겠습니까 세상에서는 명예, 허영 다 찾다가도 여기와서는 한 번 깨끗하게 살기를 원할 수 없겠습니까 세상에서는 오래 살기 위해서 별 일을 다했더라도 여 기 와서는 "하나님, 며칠을 살아도 부끄럽지 않게 살기를 원합니다"라고 할 수 없습니까 무엇인가 좀 달라져야 한다는 말입니다.예수님에게 구하는 청 구서는 마땅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소원이 문제이고 여기에 중요한 신앙고백이 있게 됩니다.

"다윗의 자손이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비상한 믿음을 가진 자의 고백 입니다. 예수님만은 나를 보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이 그에게 있었습니다.다 른 사람에게 이런 소원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눈을 감았기에 얻어 먹으 면서 살 수 있었고 평생 타성화된 생활이었는데 이제 이 타성에서 벗어나서 전혀 새로운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차원의 소원을 말하고 있습니 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이제 그는 눈을 뜨게 됩니다.

여러분,우리의 믿음을 한 번 살펴 보십시다. 무엇을 믿으며, 어떻게 믿었 습니까 이대로 괜찮겠습니까 좀더 진실한 믿음,좀더 적극적인 믿음,좀더 결단이 있는 믿음, 그리고 행동적인 믿음, 거룩한 믿음을 가져야 되겠습니 다.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는 자들에게 대하여 평가하는 보고서가 나온 것이 있습니다. 좋은 면으로 볼 때는 인정이 많다, 착하다, 진실하다 한다고 합 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첫째가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다, 잘난척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소경 바디매오의 신앙을 다시 생각 해 보십시다. 그의 신앙고백은 단순한 말에 있지 아니합니다.

여러분! 오늘도 우리가 들어야 할 음성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 라"고 하신 주님의 음성입니다. 오늘 이 음성을 모두 듣게 되시기를 주님 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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