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예화 행복이 가득한 방

첨부 1


아파트 출입구 앞에 서서 보니 정면으로 보이는 은행나무에 마지막 이파리가 매달려 있다.지난여름 그 무성했던 잎들은 다 떠나고 앙상한 가지만 쓸쓸하게 남아 있다.계절 탓일까.찬거리를 사야겠다는 생각으로 밖에 나왔지만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나는 아파트 등나무 밑에 우두커니 앉아 그 곳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하루를 열심히 보내고 아늑한 가정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오늘따라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스산한 바람에 실려온 낙엽들이 발 밑에서 맴돌자 나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 새 별이 돋고 있었다.

평소 잘 다니던 식육점을 지나 마음 내킬 때만 가던 가게로 들어섰다.그러고 보니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뀔 동안 나는 이 집을 찾아오지 않았던 것 같다.그런데도 지난봄에 보았던 새댁은 며칠 전에 왔던 손님을 대하듯 밝은 얼굴로 주문을 받았다.

새댁의 서투른 칼 솜씨를 지켜보다가 문득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안방이 절반쯤 들여다보였다.처음 본 방안도 아니련만 이상하게도 내 시선을 끌어들이는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서너 평 남짓한 방 안에는 TV, 그리고 감 꺾꽂이, 보일락말락한 벽 구석으로 키 작은 남자의 주름 잡힌 바지 하나가 걸려 있고 그 위로 빳빳하게 다림질이 잘 된 흰 와이셔츠가 걸려 있었다.그것뿐인데도 왠지 방 안에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밝은 빛이 감도는 것 같았다.

그 사이 새댁은 고기를 다 썰었는지 비닐봉지를 챙겼다.새댁으로부터 봉지를 건네 받을 때였다.나는 아주 작은 소리를 듣고, 실례라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고개를 길게 빼서 방 안을 들여다보고 말았다.놀랍게도 그 곳엔 달덩이 같은 아기가 누워 있는 게 아닌가.

이불을 덮어 얼굴만 보이는 아기는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듯 작은 몸을 뒤채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이 작은 방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건 바로 이 아기의 환한 웃음이었던가 보다.양팔을 벌리면 손끝이 맞닿을 것 같은 벽, 세상은 넓고도 넓은데 부잣집 뒤주만한 이 작은 방 안에서 아기는 쌔근쌔근 잠들었다 깨어나며 그 작은 몸으로 이 보금자리를 빛내고 있었다.

거스름돈을 꺼내려 돌아서는 새댁을 보니 이내 머지않아 산달임을 짐작케 했던 지난봄이 생각났다.그 사이 새댁네는 가족이 늘었고 그 작고 아늑한 방 안엔 사랑이 가지마다 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고기를 건네 받고 그 집을 나오며 나는 정말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들을 잊고 살아왔다는 생각에 당혹스러웠다.

작고 부족했던 시절에 느낄 수 있던 감사와 겸허감이 헛껍질만 남기고 내게서 빠져나가 버린 지가 언제였던가.소꿉놀이하듯 작은 것들도 소중하게 이루어내려 애쓰며 살던 시절이 차라리 행복이었던가.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