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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의 역사적 의미 (막 1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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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젊음이들을 가리켜서 고민하는 세대, 고뇌에 사로 잡힌 세대, 또는 갈등의 회오리 속에 방황하는 세대, 불확실성의 세대, 심지어 비틀거리는 세대 등 여러 가지 별명을 붙이고 있습니다. 그만큼 20대 젊은이들은 여러 가지 고뇌와 고민을 안고 몸부림치고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최근 발표되어진 한 통계에 의하면 우리 나라 사람 중 1년에 자살하는 수가 한 만여명 된다고 합니다. 그들 중에 45%가 20대 젊은이들이라고 합니다. 어느 사회, 어느 나라보다도 20대의 고민이 가장 많은 나라다 하는 것을 자살자 통계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20대 젊었을 때 인생의 3대 과제가 있습니다. 해결해야 할 중대한 기로에 서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고민과 더불어 씨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인생의 3대 과제란 첫째는,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이고 두번째는, 누구와 함께 살아야 하느냐 라는 문제입니다. 세번째는,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위해 죽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이 세가지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공부를 하고, 기술을 익히고, 직장을 구하고, 사업을 합니다.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누구와 함께 사느냐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친구를 사귀고, 동료를 만들고, 그리고 배우자를 선택해야 합니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생의 의미와 목적과 가치관을 정립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중대한 인생의 과제를 20대 젊었을 때 해결해야 하거나 아니면 이러한 벅찬 문제를 20대 젊었을 때 결단을 한다는 것이 너무나 어렵고 힘들고 벅차기 때문에, 혼자서 고뇌도 하고, 몸부림도 치고, 가슴도 치면서 방황하게 됩니다. 그래서 혼자 씨름하다가 해결하지 못하면 결국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지난 주일은 부활주일이었습니다. 전세계 교회가 죽음과 마귀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면서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만약 예수의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성립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 부활의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기독교는 존재하고 지난 2,000년 동안 선교의 사역을 감당하여 왔습니다. 그만큼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핵심적인 교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만약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된 것이고, 만약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믿음도 다 헛된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기독교 신앙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그 핵심이라는 사실을 밝혀 줍니다.

예수의 부활을 논하기 전에 꼭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부활의 영광은 고난의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고난의 자리에서 부활의 영광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 지도층들은 예수를 위해하고 에수를 죽이기 위해서 빌라도 법정에 엄청난 죄목을 붙여서 고발하였습니다. 예수에게 붙여진 죄목이 이와 같습니다. "백성을 선동하고 황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을 금하고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나이다." 이 말 한마디로 국가에 반역한다는 일종의 반역죄입니다. 국가 전복죄입니다. 이런 엄청난 죄목을 붙여서 유대인 지도층 소위 서기관, 바리새인, 제사장들이 빌라도의 법정에 고발하였습니다. 고발한 사람들을 가만히 살펴 보세요. 그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은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은 지위가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유대 사회에서 최고로 배운 지성인입니다. 지성인들이 돈과 권력의 맛을 알게 되었을 때 권위주의에 사로 잡힙니다. 권위주의에 사로 잡히게 되면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진리이신 예수를 고발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과거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오히려 배우지 못한 사람보다도 배운 사람이 지식을 이용하여 세속적인 욕심이 앞장 설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때의 역사는 고통이 뒤따랐습니다. 나치를 일으켜 2차 대전을 발발케 한 독일의 히틀러 그 주변에는 어느 정권보다도 많은 지성인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지성인이 돈과 권력으로 세속화되어지면, 권위주의에 사로 잡히면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를 고발하게 됩니다. 결국 반진리, 진리에 역행한다는 사실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빌라도 법정에 고발되어진 예수는 심문을 받습니다. 빌라도가 여러 차례 심문을 했지만 예수에게서 아무런 죄를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도는 예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고 말았습니다. 여기 빌라도 총독의 문제점이 있습니다. 두 가지 큰 문제점이 있는데, 하나가 빌라도는 외부로부터 들려 오는 큰 소리는 귀를 기울이면서 자기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는 양심의 소리는 외면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이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이나 장로들이 외치는 권위의 소리에는 귀를 기울였습니다. 돈에 매수된 군중들의 함성에는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심문한 결과 예수에게는 아무런 혐의가 없다는 것을 자기 자신은 알았습니다. 자신의 양심 속에 "예수는 죄가 없는데, 예수는 죄가 없는데..."라고 독백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습니다. 권위에 소리에는 귀를 기울이면서 자신의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는 세미한 양심의 소리를 외면할 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도 그렇습니다. 힘의 모습을 갖춘 권위의 소리에는 귀를 기울이고 자기 자신의 속에서 울려 퍼지는 양심의 소리는 외면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 그 사람에게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죽어 갑니다.

뿐만 아니라 빌리도는 예수를 심문하면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물었습니다. "그렇다. 나는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러 왔노라." 그렇게 말을 하니까 빌라도가 "진리가 뭐냐" 물었습니다. 예수가 대답합니다. "진리편에 선 사람은 내 말을 듣느니라." 이렇게 말을 하니까 빌라도가 자존심이 상했는지 "나는 너를 살려 줄 권세도 있고, 죽일 권세도 있어." 하면서 채찍을 들고 예수를 내려 칩니다.

로마에 가면 과거 천년의 로마 시대를 볼 수 있는 박물관들이 여럿 있습니다. 로마 시대에 사용했던 죄수를 다루던 채찍을 보면 약 1m 20cm의 큰 가죽띠에다가 가운데 10cm 간격으로 날카로운 쇠붙이가 붙어 있습니다. 그런 가죽 채찍을 가지고 예수의 등을 내리 쳤을 것입니다.
여기 빌라도의 문제가 잇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진리편에 세우지를 못합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진리를 찾고 있습니다. 진리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삶을 진리편에 세우질 못합니다. 결국 그런 사람이 채찍을 들고 진리를 내려 칩니다. 역사가 증명합니다. 진리가 채찍을 당한 것이 어찌 2,000년 후대를 살아 가는 오늘 우리의 시대에 있어서도 진리와 양심의 소리가 얼마나 많이 채찍질 당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진리를 찾기 위해서 이 자리에 왔습니다. 빌라도처럼 진리가 무엇이냐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왔습니다. 그러나 진리가 무엇이냐 질문을 던지는 것은 물론 자기 자신의 진리편에 서기를 바랍니다. 말로만의 진리가 아니라, 삶이 진리편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 예수는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빌라도는 예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고 십자가 처형을 명령하였습니다. 예수는 운명하고 말았습니다. 그날 저녁 부자 아리마데 요셉의 무덤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예수님이 묻힌 돌무덤은 3중으로 막혀 있습니다. 첫째는 무덤 입구에 커다란 바위 덩어리를 굴려다가 막아 버렸습니다. 두번째는 누구도 황제의 명령 없이는 그 돌문을 열 수 없도록 황제의 이름이 박힌 봉인을 붙여 놨습니다. 세번째는 완전 무장한 로마의 군인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은 장사지낸 지 사흘이 되는 아침에, 예수는 돌문을 무너뜨리고 부활하고 말았습니다. 부활의 생명은 육중한 돌문을 무너뜨리고 황제의 봉인을 사정없이 찢어 버리고 군인들의 창과 칼을 무기력화 만들어 버렸습니다. 여기서 예수 부활의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또한 깊은 상징적 의미를 찾게 하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부활의 아침 육중한 돌문이 굴러 떨어졌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죽게 되면 신분에 따라서 무덤을 만듭니다. 서민들이 죽게 되면 땅을 파고 매장을 하게 되지만 종이나 노예 병든 사람이 죽게 되면 골짜기에 갖다 버리기도 하고 동굴에 갖다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돈이 많은 사람은 암벽에다 굴을 파고 무덤을 만듭니다. 암벽이 없는 이집트의 사막 가운데서는 피라미드를 만들어서 임금의 무덤을 삼았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돈 많은 사람이고 사회적 신분도 상당히 높은 분입니다. 겉으로 표시를 안 했지만 속으로는 예수를 존경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예수님의 시체를 자기 무덤으로 만들어 놓았던 그 돌무덤 안에 갖다 모셨습니다.

돌문에는 자신의 부를 상징할 수 있는 몇 가지 조각과 화려한 장식품을 붙여 놓는 것이 대개 유대인들의 관습입니다. 어떻게 보면 돌문은 인간의 물질 세계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생명은 돌문에 갇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부활의 아침, 예수의 생명은 그 육중한 돌문은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예수의 생명을 가두어 놓았던 하나의 물질은 무너뜨리고 말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물질 세계라도 예수의 생명을 가두어 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는 황금만능의 시대에 살아갑니다. 돈이면 다 통합니다. 물질 만능입니다. 어떻게 보면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양심을 가졌다는 사람들도 물질 세계의 속에서 자기의 양심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살아 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황금만능의 위력에 굴복하고 맙니다.

3월 29일은 구한말, 그리고 왜정시대 민족 수난시대 지도자 중 한 분이었던 이상재 선생의 62주기를 맞이 하게 됩니다. 이상재 선생이 살아갈 그 당시에 사회적 지도적 역할을 하게 된 사람이 두 분 있습니다. 하나는 이완용이고 또 한 분은 이상재입니다. 한 분은 매국자이고 또 한 분은 애국자입니다. 이완용과 이상재를 비교해 보면 대조적인 생을 보게 됩니다.
이완용은 25살에 과거에 급제하였습니다. 퍽 앨리트 중에 앨리트인 것 같습니다. 그는 젊어서 주미대사관 대리공사를 역임했습니다. 돌아와서 일약 학부대신 오늘날 말로 교육부 장관입니다. 그는 외무장관을 역임했습니다. 독립협회 초대 회장이 되는 등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서 자타가 공인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완용에 비해서 이상재는 과거시험에 실패했습니다만 박정영과 인연으로 인해서 관계에 들어 갔습니다. 벼슬을 했지만 항상 이완용 밑에서 맴돌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다음 상황을 보면은 두드러진 차이가 있습니다. 이완용은 학부대신 때 국가 공금 약 3천불을 유용했습니다. 외무대신 때는 경인 철도 부설권을 넘겨 주고 15,000불을 뇌물로 받았습니다. 5년 이후에는 나라까지 팔아 먹고 말았습니다.

그런 반면 이상재 선생은 언행에 일치된 삶을 살았고, 청빈한 삶은 살았습니다. 그가 서울 YMCA 총무로 있을 때 민족 지도적 역할이 식민지 통치자들과 역적들에게 눈에 가시처럼 보였습니다. 총독부 한 관리가 이상재 선생을 불러다가 이렇게 회유를 했습니다. "연세도 많으신데 그 Y운동을 왜 하십니까 요즘 생활도 어려우시지요. 제가 돈 5만원을 드릴테니까(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2천만원쯤 됩니다.) 고향에 가셔서 좀 편히 사시죠." 이렇게 제안을 했습니다. 이상재 선생은 "편안하게 살라고요. 차라리 죽으라고 하시죠." 하고 총독부 문을 박차고 뛰어 나왔습니다. 한 사람은 돈에 자신의 인격과 생명을 팔아 넘겼습니다. 그러나 이상재 선생의 정신은 어떤 물질의 굴레가 찾아 와도 이것을 깨뜨릴 줄 알았습니다. 여기에 부활의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무덤을 깨뜨렸다는 사실은, 예수의 정신이 물질 정신을 깨뜨렸다는 사실입니다. 부활의 정신을 지니고 산다는 것은 황금만능, 물질 세계를 깨뜨릴 수 있다는 고귀한 정신을 지니고 산다는 것입니다. 이 정신이 우리 젊었을 때의 정신입니다.

두번째 보세요. 무덤에 생긴 일 중의 하나는 황제의 봉인이 찢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다음 사흘만에 부활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니까 예수를 죽인 빌라도나 그리고 고발한 지도자나 지도층들은 겁이 났나봅니다. 그래서 황제 이름으로 된 봉인을 무덤 입구에서 붙여 놨습니다. 누구든지 못 떼도록 했습니다. 누구든지 임의로 떼면은 황제의 명을 어긴 죄로 죽음을 당해야 합니다. 그 봉인은 로마의 권력을 상징합니다.

예수 부활의 생명이 황제 봉인을 찢었다는 것은 예수 부활의 생명이 로마 권력에 대해 도전했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권력에 의해서 형성되어지는 속박을 벗어 났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권력의 인봉이 예수님의 생명을 덮고 있지만은 그러나 부활의 아침은 그것마저 찢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세상의 어떤 권위도 그리스도의 생명을 속박시킬 수 없었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에 사로 잡힌 사람은 어떤 불의의 속박이 와도 자기를 꿋꿋하게 세울 힘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4장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뒤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복음을 전파하는 베드로와 요한을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또 체포해 가지고 심문을 합니다. 심문을 하는데 매를 때려 가면서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다음 성경 말씀 가운데 보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하는 말이 나옵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 뭐가 있길래 그렇게 권세 있는 제사장이 벌벌 떨고 있습니까. 성경에 보면 "참말을 했다. 진리를 지니고 있다." 라고 나옵니다.

힘은 무력에 있지 않습니다. 힘은 주먹에 있지 않습니다. 힘은 어떤 권력에 있지 않습니다. 힘은 그 자신 속에 얼마나 큰 진리를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진리를 알지나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이 여기에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보면 진리를 깨뜨리는 제 요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칼이 그를 능가할 때 진리에 멍이 듭니다. 도덕성이 결여된 힘이 사용되어 질 때 그 힘은 진리를 위축시키고 있습니다. 어떠한 명목에서든지 폭력을 합리화시킬 때 진리는 깨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소를 생각해 보면서 젊은 지성인이라 하면 진리를 가지고 끝까지 몸부림치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 가운데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이 약동합니다.

세번째로 부활의 아침, 완전 무장한 군인들이 무기를 가졌습니다. 돌무덤을 지키고 있던 군인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시자 그토록 대단하던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합니다. 힘에 장악되어 지는 평화가 오래 가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역사가들은 예수님께서 활동하던 시대를 보면서 주전 27년부터 주후 280년까지 약 200년 기간을 가리켜서 팍스 로마나(Parx Romana) 즉, 로마의 평화 시대라고 말합니다. 이때는 로마의 구조가 비교적 안정되어 있고, 대외적으로 큰 전쟁이 없었고, 해상에는 해적들이 거의 소탕되었고, 그리고 치안 질서가 확립되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이때가 팍스 로마나, 로마의 평화 시대가 이루어 졌던 시대다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의 평화를 가만히 살펴 보면, 지배자의 평화이지 모든 민족의 평화는 아니였습니다. 무력, 어떤 힘에 의해서 장악되고 지배되어 지는 평화이지 진정으로 정의로운 환경에서 오는 평화는 아니었습니다. 권력 구조가 안정이 되고, 전쟁이 없고, 치안 질서가 확립되었다고 해서 그 사회가 평화로운 것은 아닙니다. 로마 제국은 점령하고 착취하고 장악하는 정권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자유민이 있는 반면에 식민지 사람이 있고, 그리고 귀족이 있는 반면에 노예들이 있고, 사회적 제도들의 모순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평화는 특권층을 위한 평화이지, 전국민의 평화가 되지는 못하였습니다.

골고다 언덕을 여러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힐때는 많은 사람들의 울음소리, 고함소리, 망치소리, 그리고 창, 칼이 부딪히는 시끄런 많은 소리가 있었습니다만 예수님께서 운명하신 뒤, 무덤에 장사지낸 뒤에는 골고다 언덕이 조용해졌습니다. 더군다나 무장한 군인들이 골고다 언덕을 지키고 있었으니까 누구 하나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평온한 상태입니다. 잘 지배되고, 잘 장악되고, 잘 지켜지고, 잘 유지되어 집니다. 골고다의 평온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사흘 되는 날 쯤에 예수님은 골고다의 평온을 깨뜨리고 부활하고 말았습니다. 로마의 시각에서 볼 때, 유대 지도자들의 시각에서 볼 때, 예수의 부활은 반평화적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그토록 평온하던 골고다의 평온이 예수님이 부활함으로 인해서 소란해졌습니다. 지배하고 장악되어진 법 질서가 깨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베드로가 로마의 군인 고넬료에게 예수를 소개할 때 `평화의 복음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는 `평화의 복음이다.' 여러분 상반되지 않겠어요 잘 지켜지고, 잘 장악되어지고, 잘 유지되어진 골고다 언덕이 로마의 평화인데 이걸 깨뜨리고 예수가 나왔으니 반평화적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것이 평화라는 것입니다. 여기 시각의 차이가 있습니다. 로마적인 평화는 힘에 의해서 장악되어 지고 지배되어 지는 것이 평화라고 여겨지지만은 예수의 평화는 하나님 대 인간, 인간과 인간 간의 정의로운 반주를 통해서 평화가 이루어 진다는 것입니다. 그 바탕에는 사랑이 깔려 있습니다. 이천년의 기독교 역사를 두고 로마의 평화를 추구하는 세력과 정의로운 평화를 추구하는 예수 세력과의 싸움이 진행되어 왔습니다. 얼마만큼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에서 올바른 관계가 형성되는 거냐, 정의로운 관계가 형성되고 있느냐, 그 바탕에 사랑이 깔려 있느냐 하는 것에 따라서 예수의 평화가 결정되어 집니다.

부활의 생명, 우리에게 예수의 생명을 줍니다. 예수의 평화를 줍니다. 부활의 생명은 물질만능의 사고 방식을 깨뜨리게 합니다. 부활의 생명은 어떠한 불의한 힘의 구조도 깨뜨리게 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생명은 지배와 장악에서 오는 평화가 아니라 정의로운 관계에서 오는 평화를 추구하는 생명입니다. 이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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