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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오신 메시야 예수 (마 11:2-11)

첨부 1


1. 본문비평적 고찰

후대 일부 사본에서는 다음과 같은 약간의 변동과 삽입이 발견된다.

2절:"그리스도"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의"
"그의 제자들을" 대신에 "그의 두 제자들을"
3절:"당신이 오실 그 분입니까" 대신에 "당신이 일하실 그 분입니까"

그 밖에도 사소한 차이가 확인되지만 이러한 삽입, 변동, 차이는 대체로 후대의 것으로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2. 본문의 문맥과 구성

본문은 예수의 제자파송설교(10:5-42)와 회개하지 않는 갈릴리 도시들에 대한 책망과 심판예고본문 사이에 등장한다. 본문의 동기는 옥에 갇힌 세례자 요한이 옥중에서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냄으로 발생한다. 본문은 두 단락으로 이루어졌다.

본문의 구성:11:2-11 예수와 세례자 요한
11:2-6 세례자 요한의 질문과 예수의 답
11:7-11 세례자 요한에 대한 예수의 평가

세례자 요한에 대한 예수의 평가는 15절까지 이어진다. 16-19절에서는 당시 세대에 대한 예수의 평가가 이어지고 20-24절에서는 예수의 많은 이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는 갈릴리 여러 고을에 대한 예수의 심판 말씀이 등장한다.

3. 본문의 자료와 편집

본문은 A.D.50년대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예수어록(Q) 자료로서 마태와 누가복음에만 등장한다. 오늘날 온건한 성서 신학자들은 이 본문이 역사적 예수의 입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예수 말씀(예수 로기온)임을 강조한다 (W.G.큄멜, P.슈툴마허).

누가복음의 평행본문(7:18-30)은 마태의 본문보다 더 상세하다. 마태 본문과 누가 본문의 차이점은 대개 다음과 같다.1) 마태에서는 요한이 옥에 있는 것으로 언급되나 누가에서는 옥의 언급이 없다.
2)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찾아왔을 때 예수님은 마침 질병과 고통과 악귀 들린 자들을 많이 고치고 계셨다(눅7:21). 마태는 여기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
3) 누가의 본문은 모든 백성과 제자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으나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세례를 받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음을 언급하고 있다(눅29-30). 그러나 마태는 역시 여기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

이 공관복음 대조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마태와 누가의 본문이 상호 보완 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태는 요한의 위치를 정확히 언급해 주고 있고 누가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찾아 왔을 때의 예수의 상황을 밝혀 주고 있다.

Ⅱ. 상황

1. 예수의 상황

오늘의 본문 말씀이 선포되었을 때의 예수의 상황은 전형적인 메시야적 상황이다. 예수는 병든 자, 가난한 자들에 둘러 쌓여서 그들의 질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며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하신다. 이 고유한 역사적 예수의 상황(Ipsissima situs)은 가난한 자, 병든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긍휼과 만나는 상황이지만 당시 종교적 지배 계층이었던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에게는 하나님이 세우신 예수라는 걸림돌(Skandalon)에 넘어지는 상황이다. 이 예수 고유의 메시야적 상황은 예수의 메시야적 자의식(Selbst bewu tsein)과 메시야적 파송의식(Sendungsbewu tsein)을 전제로 하고 있다. 요한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통해서 예수는 스스로를 구약에서 약속된 하나님의 종말론적 메시야로 선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활동을 종말론적 구원 약속의 성취로 이해하고 있다. 예수는 이때에 이사야서의 다음의 본문들을 의식하고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날에 귀머거리가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서 소경이 볼 것이며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빈핍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인하여 즐거워하리니"(사29:18-19)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사35:5-6)
오늘의 본문 속의 예수의 상황은 메시야의 이 땅의 가난한 자, 지극히 작은 자들과의 만남의 상황이요 이 만남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된 공의와 사랑이 구현되는 예수 고유의 메시야적 상황이다.

2. 세례자 요한의 상황

세례자 요한은 당시 유대 군중들로부터 선지자로 추앙 받던 인물이었지만 헤롯 왕에 의해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영향력은 아직도 대단하여 그의 제자들이 계속 활동하고 있고 그 제자들을 통하여 옥 중에서 나사렛 예수에 대한 소문들을 듣고 있는 상황이다. 세례자 요한이 그의 제자들로부터 예수의 답변을 전해 듣고 예수의 메시야되심을 확신하고 믿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에게 직접 세례를 준 인물이고 예수에 의해서 긍정적으로 평가받은 소수의 인물중 한 사람이다. 그는 예수의 메시야되심에 대한 예감과 기대 그리고 의혹을 동시에 소유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옥중에서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예수의 메시야 되심을 확인하려 한 사실로 보아 그는 한 편으로는 예수께서 메시야일 수도 있다는 느낌을 가졌었다고 볼 수도 있겠고 다른 한 편으로는 그가 아직 예수의 메시야되심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이것은 그가 예고한 '오실 이'(마3:11-12)와 예수의 공생에 활동의 차이점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세례자 요한은 메시야의 출현이 하나님의 권능의 계시와 진노의 심판의 집행 형태로 나타날 것을 기대했으나 예수의 출현과 공생에 활동은 가난한 자, 소외된 자, 병자, 세리, 죄인들에에 구원과 해방과 치유와 복음을 전파하고 구현하는 형태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세례자 요한의 상황은 약속과 성취가 교차되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분기점으로서의 상황이다. 요한은 기대된 약속과 실현된 성취 사이의 변증법적이고 역설적인 긴장관계 속에서 메시야 예수를 향해서 조심스럽게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3. 초대교회의 상황

마태와 누가의 교회 상황은 이미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유대 독립전쟁이 실패로 돌아간 A.D.75-80년 대의 상황이다. 마태와 누가는 오늘의 본문을 팔레스틴계 기독교 공동체에서 형성되었을 것으로 짐작된 예수어록(Q)에서 물려 받았다. 이 예수의 말씀이 선포된 본문의 최초의 '삶의 자리'(Sitz in Leben)와 초대교회 속에서의 '삶의 자리' 사이에는 상당한 변화와 차이가 발생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A.D. 75-80년대 상황은 유대 사회에 바리새인 그룹이 종교적 지배계층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때이고 이로 인해서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에 긴장과 갈등이 고조되었던 시기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오늘의 본문에 크고 작은 영향을 주고 있는데 특히 11장 6절(눅7:23)에서와 눅7:29-30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Ⅲ. 해석

< 2절 >

세례자 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지만 밖에서 일어 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정확한 정보를 듣고 있다.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의 제자들과 상호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예수의 제자들 중에는 전에 요한의 제자들이었던 사람도 있었기 때문이다(요1:37-40)

< 3절 >

세례자 요한의 질문은 예수의 정체성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예수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 예고한 그 종말론적인 메시야인가 하는 것이다.

< 4절 >

예수는 여기에 대해서 직접적인 말로 답하지 않고 자신의 구체적인 메시야적 활동을 통하여 간접적인 답을 제시하고 있다. 예수의 삶 자체가 들을 귀가 있고 볼 눈이 있는 자에게는 말 보다도 더 분명한 예수의 자기 정체 계시이기 때문이다.

< 5절 >

여기에서 등장하는 맹인, 앉은뱅이, 나병환자, 농아자, 가난한 자 들은 한결같이 당시 사회에서 죄인 취급을 받았던 소외 계층의 사람들이다. 그러나 구약 이사야서에서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이 그가 파송하신 의의 메시야를 통하여 바로 이러한 소외계층의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실현될 것을 예고하고 있다(사27:18-19;35:5-6;61:1-2).

< 6절 >

여기에서 `걸려 넘어지다'(`스칸달리쬡'의 과거 수동태형, 명사는 `스칸달론'으로 걸려 넘어지게 하거나 붙잡히게 하는 나무나 돌 같은 행정물체를 의미함)의 의미는 예수를 잘못 평가하고 판단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영적인 실족과 넘어짐을 의미한다.

<7-8절>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의 답을 어떤 의미로 이해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나름대로 답을 얻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의 스승에게로 돌아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후 예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 대한 말씀을 시작하신다. 광야,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등의 용어에서 우리는 예수의 시적(詩的) 언어를 발견하게 된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왕궁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들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 9절 >

예수는 한편으로는 세례자 요한을 메시야 시대를 예고하고 준비하는 약속의 시대 마지막 선지자로 이해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약속의 시대에 족하면서도 성취의 시대 속으로 들어와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선지자 보다도 더 큰 자이기도 하다.

<10-11절>

세례자 요한은 종말론적 구원자로 오신 메시야 예수를 보았고 나아가서 그에게 세례를 베푼 인물이기 때문에 예수 이전 여자로 부터 태어난 모든 자 중에 가장 큰 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아직 약속의 시대에 속한 인물이요 저물어 가는 달과 같은 인물이기 때문에 솟아 오르는 태양과 함께 시작되는 메시야의 새 날에는 속하지 못한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새 날에 속한 지극히 작은자 하나가 약속의 시대 최대 인물인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Ⅳ. 메시지

예수 시대에나 오늘 날에나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의 메시야되심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예수 시대에는 그들이 바로 정치,종교의 지배계층 사람들이었고 또 예수를 향해 마음을 닫아버린 사람들 이었다. 오늘날은 복음을 듣고도 예수와 교회를 향해서 등을 돌려 버린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 두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의 메시야 되심에 반신반의 하는 사람들이다. 예수시대에 세례자 요한과 그의 제자들이 그러했고, 오늘날은 예수와 교회를 향한 관심은 있으나 실제로 세례 받고 신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러하다. 세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고백하고 따르는 무리들이다. 예수 시대에는 예수의 제자들이 그러했고 오늘날은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따르는 성도들이 그러하다. 이 세번째 부류 사람들의 예수관과 그들의 예수를 향한 신앙고백은 다양하다. 베드로와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를 메시야로 고백하고 따르면서도 다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주관적인 메시야 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오늘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도 각자가 예수를 주관적으로 이해하고 예수의 공생애 목적을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한다. 메시야 예수는 어떤 분이신가 오늘의 본문은 그 분이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하시는 이 땅의 작은 자들의 메시야이심을 밝혀주고 있다. 예수의 공생애는 바로 이러한 `암 하 아레스', 즉 '땅의 백성들'속에서이루어졌다. 예수는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들이 사는 화려한 왕궁에서 활동하지도 않으셨고 광야로 나가 빈 들에서 외치지도 않으셨다. 메시야요 인자로 오신 예수는 이땅의 지극히 작은 자들,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가장 필요로 한 사람들 속에서 역사하신 것이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말하라" 이 예수께서 오늘날은 성령을 통하여 이 땅의 작은 자들 속에서 역사하신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이들, 스스로 일어나 걷지 못하는 이들, 불치의 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 가난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탄식하는 사람들, 약 이천년 전 예수의 주변에 몰려와 있던 이 땅의 작은 자들은 오늘날도 그리스도의 사랑의 손길을 기다리며 춥고 그늘진 곳에서 기다리고 서 있다.

예수는 누구신가

그 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언제나 한결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이 땅의 작은 자들의 구주요 메시야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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