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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긍정적인 말 (마 13:4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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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식으로 말하지 마시오. 목숨이 붙어 있습니다.
그 아이는 잠자고 있는 것입니다.”

긍정적으로 말을 풀어간다는 것이 여간 어렵지가 않아서 때로는 아무생각 없이 적당히 어떠한 일을 처리하고픈 생각이 밀려옵니다. 더군다나 여기 저기에서 “아무런 희망의 싹이 보이지 않는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을 때 “가능하다”,“할 수 있다”고 선뜻 말할 용기가 잘 생겨나지 않습니다. 물론 막연한 신념 만으로 만용을 부리는 말은 애초 소용없는 것이지만, 우리가 옳은 것에 대한 확신을 펼치는 용기는 언제나 가치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긍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두려워 해서는 않됩니다.
예수는 모든 사람이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일 때, 어김없이 “그렇다”“할수 있다”는 쪽이었습니다. 실로 예수의 언어는 긍정의 언어 였습니다.
어느날 저녁 베드로는 배를 뭍에 대었습니다. 베드로는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는 “오늘 밤에는 고기가 없다. 재수가 없다”고 말했지만, 어부도 아닌 사람, 목수의 아들, 고기를 모르는 사람이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고기가 많이 있으니 그물을 던지라”는 말씀. 터무니도 없고 어리석게도 말입니다. 그러나 그물을 던지고 들어올렸을 때 물고기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일행이 군중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면서 말입니다. 날은 저물어 가는데..“먹을 것이 없습니다”. 제자의 말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먹을 것이 없다구요 아니,있습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물었습니다.“누구 먹을 것 좀 가진것 있나요” 작은 소년이 그의 품속에서 자신의 것을 내어줍니다. “네, 여기 조금있습니다.” 빵 몇조각,물고기 두토막. “자 보십시요,제말대로 먹을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분은그 빵을 떼어 주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나누어 먹고도 남았습니다.
야이로라는 사람이 그분께 와서 이렇게 말한적이 있습니다. “제 딸년이 죽었습니다. 아이의 목슴이 영영이 끊어져 버렸습니다. 헛되이 끝나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말씀 하셨습니다. “그런식으로 말하지 마시오. 목숨이 붙어 있습니다. 그 아이는 잠자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애통해하는 군중들 앞에서 그말을 증명하셨습니다. 잠시후 야이로의 딸 아이는 우유잔을 들고 식탁에 않아 있었으나까요.
예수님은 “네”와 “아멘” 자체 이십니다. 그분은 “녜”라고 “아멘”이라고 말하는 분이십니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것도 없다. 생명이 없다. 마실 것이 없다.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자라지 않는다.희망이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있습니다. 생명이 있습니다. 음식과 마실 것이 있습니다. 보입니다. 들립니다. 자라나고 있습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그분은 이 모든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설명하기 위하여 몸소 온갖 이야기를 말씀하셨습니다. 밭에 감추어진 진주에 관하여, 씨앗 속에 숨어있는 생명에 관하여, 작은 씨앗이 어떻게 거다란 나무로 자라는지에 대하여, 통으로 덮어 놓은 등불에 관하여 이야기 하셨습니다. 누가 진주가 들어 있다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잡초만 무성한 몸쓸 땅, 황페한 땅”이라고 말하던 땅이 었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진주가 묻혀있다는 것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예수는 황페한 땅에서 진주를 바라보십니다. 그것이 진주가 아니어도 가난한 농부의 땀이어도 좋습니다. 거친 땅에서 “농부의 땀”은 곧 진주니까요.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토록 작은 알갱이가 커다란 나무가 되어 새들이 깃들정도가 되리란 것을 말입니다. 사실 크고 작다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데도, 작은것, 볼품없는 것에 대하여 눈길을 두지 않습니다. 많고 큰것에 길들여진 눈을 가진 까닭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눈길을 두지 않던 사이에 얼마나 커다란 나무가 되었는지를 말입니다. 그 나무는 아람들이가 되고 푸른 숲이되고 생명이 될것인데 사람은 눈이 멀어 그것을 바라보질 못합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스스로 자포자기하여 두려움과 겁에 질려 안절부절 못하며 속수무책으로 다락방에 숨어있었습니다. “끝장이다. 그렇게 끝나버리다니.” 그러나 그것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스스로를 열어 놓았을 때 해방하게하는 성령이 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갑자기 무언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자신감이 생기면서 “아니오”가 아니라 “네”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상상도 못했던 가능성이,참 알갱이가, 참 생명이, 살아있는 호흡이 자신들 알페 놓여 있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끝장난 마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이 막을 내렸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그 끝장난 마당 한 복판에 “네”라는 긍정의 말을 던졌습니다. 그 끝이 바로 시작의 지점이란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거침없이 시작하는 용기를 곱추 세워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비로소 제자들은 해방하게하는 일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빵을 나누며, 참된 해방을 기리면서, 그리고 살맛나는 세상을 기도하면서, 희망하면서 세상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들의 삶 속에 “네”가 살아났습니다.
우리에게도 여전히 “네”라는 말은 쉽지 않습니다. 포기하기가 더 쉽고, “에이-끝장이야, 틀렸어”라는 말이 더 쉽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는 우리에게 “가능하다. 할수 있다”라는 말을 다시 가르쳐 주십니다. 띠엄 띠엄이라도 우리는 그말을 배워야 합니다. 회색주의가 되어버리기 쉬운 오늘의 세태 속에서 “그래도 우리는 네, 가능합니다”라고 말해야 하는 이유를 새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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