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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문안과 문밖 (마 2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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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돌아오는 패잔병이 있다.돌아와 보니 집은 전쟁중에 없어졌 다. 가족도 사라졌다. 몸엔 부상으로 인해 병이 들어 있다. 피곤하다.

춥다. 따뜻한 불빛이 비쳐나오는 창 앞에서 서성거린다. 절망적인 소 외감이 감싼다. 볼프강 보허트의 문 안과 문 밖이란 희곡의 한 장면이 다. 문 밖에 서 있는 이의 슬픔을 그린 것이다.

 어린 시절 벌설 때를 기억해 보자. 방안은 따듯하다. 그러나 들어갈 수 없다. 문안과 밖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이 무서운 겨험은 우리 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이 세상에 문 안과 밖이 분명히 있다면 세상 이 끝나고 하나님 앞에 설 때도 마찬가지이다.변하는 현재는 가능성이 나 있지 불변하는 그때는 영원히 문밖에 서 있을 것이다.

 솔로몬이 지은 화려한 성전이 있었다.백향목으로 지어서 은은한 향 기가 감돌고 있었다. 최상의 대리석과 순금을 펴서 벽을 만들었다. 이 아름다운 성전에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이스라엘의 남자만이 들어갔다. 거기에는 여인들과 이방인의 뜰이 있었다. 이들은 성전에 가서도 뜰만 밟고 오는 이들이나 절대로 안은 모른다.

 오늘날도 성전에 열심히 간다고 해도 늘 밖에 있을 뿐이다.안에서 진 행되는 일은 알 수 없다. 교회에는 안과 밖이 없다. 그러나 실제적으 로 어떤 사람은 안에 앉아 있어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하나님의 놀라운 일, 예수의 신비나 은혜는 맛도 볼 수 있다. 교회에는 이방인 들이 많다. 몸은 신자이나 마음은 언제나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소외가은 사람들의 마음을 병들게 한다.이것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 이다. 하나님과 소외되었으니 당연한 것이다. 사라들은 이것을 해결하 려고 친구들을 만든다.지역,학교,친척,직업, 사업,돈, 운동, 계등 여 러 모임을 통해 소외감을 없애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참된 소속 감의 그림자로서 소외감을 어느 정도 해결해 줄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과 확실한 관계가 되기까지 그래서 하늘 백성이 되기가 지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이 무서운 느낌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 만약 하나님과의 관계만 분명하고 교회의 소속감만 분명하 다면 여러 가지 다른 모임에서부터 자신을 가질 것이고 또 그런 모임 에 소속이 안되었더라도 아무런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여기 본문에는 하늘 임금의 혼인잔체를 보여준다.이것이 예수 그리스 도의 천국잔치를 비유하는 것이다. 먼저 초청받은 사람들은 모두다 거 절하였다.그러자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아무나 다 오라고 부른다. 이 스라엘 사람들은 먼저 초대를 받았지만 예수를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들이 초청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초청받아 왔다. 그러나 잔치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한 가지 할 일이 있었다. 예복을 입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 여 모두다 예복을 얻어 입는다. 잔치장은 화려한 예복입은 사람들로 채워졌다. 남녀노소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다 아름다운 사람들로 변해졌다. 드디어 영원한 천국의 잔치가 벌어지는 참이었다.

 그때 그 자리에 들어가 있는 줄 알았던 한 사람이 있었다.그는 분명 히 잔치장 안에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임금은 그에게 물었 다."당신은 왜 예복을 입지 않았는가"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예복을 보니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자기 옷이 더나아 보였기에 그냥 밀고 들어왔었다. 그 옷이면 훌륭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임금 앞에서 보니 자기 옷은 너무나 초라했다. 밝은 곳에 나 오니 초라한 정도가 아니라 너무 더럽고 모양도 형편 없었던 것이다.

그는 정말로 할 말이 없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그는 자신이 있었으나 그리고 분명히 문 안에 있다고 믿었으나 문밖의 사람이었다. 곧 그것이 증명되었으니 밖으로 던져진 것이다.

 자 이제 밖에 있는 자들을 분류해 보자. 누가 밖에 있는 사람인가첫 째, 신앙에 대해 별로 심각한 느낌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초청에 응 하지 않았다. 예배보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다. 가능하면 안 참석하려 한다. 심지어는 교회당에서 예배를 보면서도 전혀 하나님의 말씀에는 흥미가 없다. 왜 그러고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나 구원에 관해 확신이 없다.자신이 늘 하나 님 앞에서 살고 있으며 하나님이 자신의 매 순간을 보고 있음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사실을 무시한 다. 분명히 임금님은 노했다. 자신의 초청을 우습게 보는 인간들을 어 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의 초청을 거부한 이는 어찌될 것인가

두번째, 구원을 받으러 교회오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능력을 받고 은혜를 받으려고 한다. 이 말대로 하면 아직 도움을 받지 도 능력을 받지도 못한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백년동안 노력을 하여 도 여전히 받으려고 노력하고 있을뿐이다. 아직 받지도 경험하지도 못 하고 언제인가 받겠지하고 문 밖에 서 있는 사람이다.

 기도를 열심히 해도 여전히 확신이 없다. 그에게 물어보라. 하나님이 당신의 기도를 응답했는가 아니 그러면 왜 안하셨는가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당신은 부족하다. 기도도 믿음도 정성도 모두 부 족한 것뿐이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보라 부족이 메꾸어 지겠는가 영원히 부족한 느낌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셋째로 두번째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로서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뜻 을 성취하여 복을 받으려는 사람이다. 율법적인 신앙이라고도 한다.

누구보다도 열심을 낸다.그래서 예배도 열심,봉사도 열심, 헌금도 열 심, 금식도 하고 철야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해도 마음 속에 확신은 주워지지 않는다. 여전히 부족한 느낌을 벗어날 수 없다.

 자신의 공로 위에다 신앙을 세우려는 이들은 절대로 확신을 얻을 수 없다. 잠시 얻는다 해도 곧 흔들려 버리고 만다. 부족한 존재이기에 하나님 앞에 나온 것이다. 그 부족한 존재가 아무리 쌓아 올린다고 해 도 본래 토대가 틀렸는데 무엇이 만들어지겠는가. 갈등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삶 전체, 가정도, 사업도, 대인간계도 마찬가지이다.

 잔치하는 집 안에 들어 설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문 밖에 밀려나 있는 것 같은 느낌에서 완전하게 벗어날 수 잇을 것인가 침체된 느낌이나 한계에 빠진 느낌을 극복할 수 있고 또 실제적으로 그렇게 될 것인가 언제나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고 언제나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계속적으로 하나님에게까지 성장할 것인가.

 그 확신은 오로지 그리스도에게서 나온다. 그를 예복으로 삼아야 한 다. 그의 모습은 별로 화려하지 않게 보인다. 그를 입은 사람들도 그 렇게 보인다. 교회도 교인들도 하나도 자랑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목 사나 전도사나 집사나 다 보통 사람이고 실수도 많고 부족한 것만 보 인다.그래서 방법대로 그냥 살면서 몸부림을 친다.

 그러나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란 옷 밖에 없 다. 그것을 입은 사람들만이 새로운 세계에 들어갔다. 밖에서 보는 이 들에게 유치하고 어리석어 보이더라도 그 길 외에는 절대로 없다. 임 금님이 예복을 요구하듯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요구한다. 이 옷을 입고 그 가치를 아는 사람은 생명을 얻고 온 세상을 다 얻은 사람이다.

 옷을 만드는 사람들이 명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디자이너의 가장 훌륭한 작품이 무엇인가 사람의 모습이야 어찌되든 작품성만 나타나 면 되는가 기발나기만 하면 되는가아니다 우선 사람이 아름다워져야 훌륭한 작품이다. 부끄러운 부분, 약한 부분을 가려주고 오히려 멋지 고 영광스럽게 한다. 이것이 훌륭한 옷이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옷이다. 자신은 희생되면서 우리의 부끄러움과 약 함을 가려준다. 우리의 모든 악과 저주를 짊어지고 우리에게는 아름다 움과 긍지와 영광을 안겨준다. 그를 옷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기에 성 경은 계속적으로 그리스도로 옷입으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 의 부끄러움이 영광으로 바뀌어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입는 것이 무엇인가어떻게 하는 것이 그렇게 하는 것인 가 그리스도를 자기 속에 영접하고 그의 힘이 주어졌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려주고 오히려 영광스럽게 만들어 주었따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모든 공로가 그리고 능력이 옷처럼 내 것이 되어 나를 덮어준다. 그리고 이 사실을 믿는다.

 이삭의 아들 에서와 야곱은 형제였다. 형은 잘 나고 힘도 세고 남자 다워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다.그러나 동생은 못나고 약하고 간교하였 다. 눈이 어두운 아버지가 죽기 전 하나님으로부터 전수된 계약의 축 복을 할 때 야곱은 형의 옷을 입고 형대신 들어간다. 아버지는 형의 옷의 향취를 맡고 동생을 형대신 축복한다. 이것이 예표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입은 예수를 보고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그 예복 안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신다

이 우리의 부끄러우을 가린다. 그 예복이 우리를 문안에 있게 한다.

그 예복이 우리가 대접받게 한다. 언제나 그 옷을 입고 있어야 한다.

그 옷을 입고 있는 동안 우리는 그리스도와 꼭같이 취급받는다.

 그 옷을 입은 이들은 궁전에 받아들여진다. 마찬가지로 그 옷을 입은 이들은 성전 가장 은밀한 곳에 받아들여진다. 절대로 성전 뜰에서 있 다가 뜰만 밟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가장 좋은 곳에 받아들여졌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 우리도 함께 있다. 하나님의 비밀이 우리 앞에 펼 쳐졌다. 법궤가 우리 앞에 있어 모든 하늘의 보화가 쏟아진다.

 야곱이 형의 옷을 입고 메소포타미아 광야로 달려나가듯이 우리는 그 리스도를 옷입고 세상으로 달려간다. 아무 것도 무섭지 않다. 이 옷이 전신 갑주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시때때로 확인하라. 내 가 이 옷을 입고 있는가참으로 그 능력과 효력을 믿고 있는가 그래 서 내가 확실하게 하나님의 성전 문안에 받아들여져 있는가

사람들은 말한다. "어떤 때는 문 안에 있는 것 같고 어떤 때는 문밖 에 있는것 같아요. 일이 잘되고 마음이 평안하면 믿음이 있는 것 같아 요. 그러나 모든 것이 잘 안풀리고 괴로우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 는 것 같아요." 이것이 가장 잘못된 경우이다. 느낌이나 상황이 어떠 하든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내가 옷입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 그 렇게 성경에 쓰여있다. 그러므로 나는 상황이나 일이 돌아가는 것을 보기 전에 먼저 그렇게 믿고 달려 가겠다. 야곱이 광야의 찬 바람과 짐승을 보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은 것처럼 나도 세상을 두려워하지 자 않는다. 나는 그리스도로 옷입고 갑주를 삼는다." 이렇게 말하라.

 예복을 입은 것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언제나 성전 안에 있다. 우리 삶의 기초가 여기서 나온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졌다. 예 수의 의와 능력으로 옷입었다. 예수와 한 형제가 되었다. 우리는 자랑 스런 하나님의 가족이다. 하나님의 모든 것이 예복 안에 들어있다. 그 것을 누리라.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평안히 일어나라.<끝>

그 예복은 모든 것을 막을 수 있는 방패요 모든 것을 열게하는 패스 가 되다. 너무도 확실한 증명서다. 이 옷을 벗고 자기 옷을 입는 이는 넘어질 것이다. 절대로 벗지마라. 이 옷을 열어라. 비켜서라." 이 예 복을 입고 있다고 믿는 동안 나는 확실하게 받아들여진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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