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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물질보다 귀한 것 (마 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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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30년 동안 사생활을 마치시고, 3년 동안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러한 대속의 사업을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음식을 잡수시지 아니하고 기도하신 후에,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그 단계에 악마가 예수님에게 나타나서 "네가 40일 동안 밥을 먹지 않았으니 대단히 배가 고플터인데 이 돌들을 밥이 되게 해서 허기진 배를 채우라"고 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밥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하는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악마의 요구를 거절하시는 그런 장면입니다.

어제, 몸이 불편해서 집에 누워 있는데 아이들이 켜 놓은 라디오를 듣다 보니 국민학생들에게 용돈을 주는 문제를 가지고 얘기를 나누는 프로그램 이었습니다. 국민학교 아이들에게 돈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사회자가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대답하는데 "돈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필요한 물건을 살수 있는 아주 편리한, 우리 생활에 꼭 필요한 존재다. 물질이다." 아주 그런 어른스러운 대답을 하는데, 한 학생이 대답하기를 "돈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이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대답해요.

돈이라고 하는 것이 확실히 편리하고, 그리고 유용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돈 없는 사람이 많은 돈을 가지게 됐을 때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돈을 통해서, 얼마나 편리한 생활을 할 수 있는가를 다시 얘기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특별히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이 돈의 위력과 경제의 위력 앞에 우리가 모두 이구동성으로 그의 중요함과 가치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국가도, 민족도, 모두가 다 경제 제일주의로 나가고 있습니다.

제가 우리 대학교를 마치고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 군에 가서 군목으로 임관을 하여 강원도 어는 육군 병원에서 근무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육군 병원이 산 마루턱에 있었는데, 오토바이를 타고 산을 내려 오면 시골 국민학교가 하나 있었어요. 그런데 시골 국민학교 지붕 위에 뭐라고 써 있느냐면 `80년대에는 백억불 수출, 1,000불 소득' 그러한 표어를 지붕에다가 크게 페인트로 써 붙여 놓고 국민학생들로 하여금 밤낮으로 학교를 오고 가면서 보도록 한 것을 보고 제가 한심스럽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가 70년대 초니까 7, 8년 후면 80년대가 되는데 그때에 우리가 100억불을 수출하고 1,000불 소득이라는 국가의 이념을, 대한민국 국민학교 교육의 이념으로 가르치고 있다고 하는 사실에 이 민족의 앞날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서글픈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오늘날 국민학교 아이들이 돈이면 이 세상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서슴지 않고 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현대의 젊은이들이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좋은 대학을 들어가 좋은 학과를 나오고, 우수한 성적으로 좋은 직장에 들어가 많은 돈을 벌어서 남부럽지 않게, 편하게 한 세상 잘 살면 그만이라고 하는 이러한 생각, 황금만능주의와 현실주의 그리고 경제 제일주의를 부르짖고 있는 것이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돈만 많이 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을 많은 사람이 갖게 되는 것입니다.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라는 책을 쓴 칼알 힐티(Carl Hilty)라고 하는 사람이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많은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느 직장이든 나에게 돈을 많이 주는 직장이라고 하면 무슨 일을 시키든지 간에 내가 열심히 하겠다고 하고 자질구레한 일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돈 많은 사장님을 알게 되었고, 사장님과 대화를 하는 중에 자기의 포부를 이야기하니까 사장님이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당신이 원하는 만큼 돈을 줄 테니까 우리 회사에 와서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돈을 많이 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다음날 사장에게로 갔습니다. 사장이 이 젊은이를 조그마한 사무실로 안내를 했는데 아무 것도 없는 방에 테이블과 의자가 하나 놓여 있을 뿐입니다. 이 사장이 젊은이에게 하는 이야기가 "당신이 오늘부터 우리 회사를 위해 하는 일은 아주 쉽고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면서 종이 한 장을 책상 위에 놓고 "당신이 하는 일은 이 종이 한 장을 책상 위에 올렸다가, 땅에 떨어뜨렸다가, 그 다음에 다시 주어서 올려 놓았다가. 다시 떨어뜨리고, 다시 주어 놓고, 다시 떨어뜨리고 하는 일입니다. 허리가 아프면 쉬어도 좋고, 점심 시간이면 점심을 먹고, 당신을 감독하는 사람도 없고, 그 일을 우리 회사를 위해서 한다면 당신이 청구하는 대로 월급을 준다."고 했습니다. 이 청년이 생각해 보니 그렇게 쉬운 일이 어디 있어요. 도로 공사판에 가서 힘든 일을 해도 돈을 조금밖에 받지 못하는데 책상 위에 종이 한 장을 올렸다가 내려 놨다 하는 이 쉬운 일, 세상에 이렇게 돈벌기가 쉬운가.

그는 그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불과 2시간이 되기 전에 회의를 갖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젊은 나이에, 이 세상에 태어나서 종이 한 장을 책상 위에 올려 놨다 내려 놨다, 올려 놨다 내려 놨다 하는 이 일을 위해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단 말인가! 내 이 젊음을 이 무가치한 일에, 아무 쓸모없는 일에 나를 위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는 이 일을 내가 어떻게 한단 말인가!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 해도 나는 이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사장에게 가서 나는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해도 이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하고 그 회사를 나와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닥치는 일은 무엇이든지 열심히 했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잘못된 착각 속에서 살아 가고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면, 돈을 많이 준다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고 착각을 하지마는, 인간은 한 번 주어진 그 생애 속에서 돈 때문에 자기의 그 귀중한 생을 낭비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이 엄연한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많은 돈을 줄 테니 어떤 사람을 죽이라고 청부 살인을 시킨다면 여러분은 그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까 우리는 결코 그러한 일을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느 날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에게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성경에 있는 모든 계명을 잘 지켜라." 이 청년은 대답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믿는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모든 계명을 잘 지켰습니다. 그런데 내가 더 해야 될 일이 무엇입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한 가지 더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네 모든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리고 빈 몸으로, 가난한 마음으로 나를 따르라."는 그러한 말씀을 했습니다. 그럴 때에 이 청년은 자기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씀을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가 근심하는 얼굴로 예수님을 떠나 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생을 얻는다고 하는 것,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자기 마음 속에 자기가 의지하고, 믿고, 기대고 있는 그것을 팔아서 처분하는 그러한 일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더 자기가 믿고 의지하는, 이 청년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물질이었는데 그리스도보다도 더 소중하다고 여기는 그 물질을 팔아서 처분하기 전에는 그에게 영생이 있을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40일 동안 굶은 예수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밥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밥이 필요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악마는 예수님에게 결정적으로 필요한 그 밥을, 돌로 밥이 되게 해서 먹으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입니다. 악마는 우리가 가장 필요한 어떤 것이 있을 때 그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접근해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양심도, 우리의 인격도, 우리의 존재도, 그 필요한 것 때문에 버려 버리도록 하는 것이 바로 악마의 장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록 40일 동안 굶주려서 배가 고팠지마는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정상적인 방법으로 밥을 사다 먹은 것이 아니고, 밥을 얻어다 먹은 것이 아니고, 그 돌덩이가 밥이 되게 해 가지고 먹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비합리적인 방법으로, 비이성적인, 그러한 방법으로 자기의 욕구를 충족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신문의 사회면에서 얼마나 많은 지성인들이 불법적인 방법으로 돈을 쟁취하며, 뇌물을 받고, 국가의 공금을 탈취하며, 횡령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들이 교육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인격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악마의 유혹, 불법적인 방법으로,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비과학적인 방법으로,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물질을 모으라고 하는 이 악마의 유혹의 손길을 떨쳐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러한 결과를 가져 오고 말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야 된다고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씀이 곧 그리스도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빚은 어두움 가운데 비추어지는 것이고, 그 어두움을 깨뜨리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자에게 넘어지지 아니하고 앞으로 갈 수 있도록 빛을 비추어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빛을 곧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는 해방자인 것입니다.

인간이 모든 물질의 세계에 구속을 받고 있는 상태에서, 해방을 주는 존재가 곧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신약성서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보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오늘 현대인들에게 가장 얽매이기 쉬운 물질로부터 인간들은 해방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농부가 농사를 잘 지어서 소출을 많이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생각하기를 "내가 이 조그마한 창고를 헐고 큰 창고를 지어서 금년에 이렇게 많은 수확을 거두어 들였는데 이것을 창고에 가득 쌓아두자. 그리고 몇 년 동안 입고 먹고 쓸 물건이 창고에 가득하니, 이제는 놀고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하는 이야기를 자기의 영혼을 향해서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커다란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의 욕구를 물질 가지고 충족시켜 줄 수 있듯이 영혼의 갈급함도 물질로 충족시킬 수 있다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물질은 육체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마는 영혼의 욕구는 충족시켜 줄 수 없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나를 얽매이고 있는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을 받아야 됩니다. 그리스도는 얽매인 모든 사람들에게 참 해방을 주고 있습니다.

이번 여름 방학 때 학생들을 데리고 동남아시아를 여행하는데 인도에 가서 보니까 소를 신성한 동물로 여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소를 <Holy Mother-거룩한 어머니>라고 여기는데, 인간이 소에게서부터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소를 신성시하고 일도 시키지 않고 잡아서 먹지도 않고 그래서 인도에 있는 소야말로 자유민주주의를 구가하는 소입니다. 뉴델리아는 소떼들이, 서울로 말할 것 같으면 세종로나 종로 등에 마음대로 걸어가기도 하고 길거리에 누워 있기도 해요. 소가 어슬렁 어슬렁 걸어 가면 자동차들이 그 소가 다 지나 갈 때까지 그냥 서 있습니다. 아무데나 똥, 오줌 싸고 마음대로 살아 가는 그야말로 소의 천국입니다.

1974년에 제가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있을 때인데, 인도에서 온 청년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모세라고 하는 청년인데 그 청년과 같이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하루 저녁은 기숙사에서 저녁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큼지막한 스테이크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같이 스테이크를 잘라 먹으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모세, 이게 쇠고기인데 너희 나라에서는 거룩한 어머니라고 하는 데 어떻게 이걸 먹을 수 있느냐" 제가 그렇게 질문했더니 모세가 하는 말이 "인도 소는 우리 어머니이지만 미국 소는 우리 어머니가 아니니 먹어도 된다."고 그러더군요. 그래서 같이 웃었습니다만 모세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소가 인간의 어머니일 수 없다고 하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인도의 7억에 가까운 인구들이 소가 자기 어머니인 줄 알고 소를 신성시하고 소가 지나 가면 자동차들이 길을 비켜 서고 그 소가 위대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잘못된 전통과 종교의 교리 속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해방받았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도 사람이 한 번도 맛볼 수 없는 스테이크를 먹을 수 있는 자유가 그에게 보장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진정한 해방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알면서도 물질로부터 해방되지 못하고 잘못된 인습과, 잘못된 전통과, 잘못된 생각으로 오염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제가 시카코에서 여러 해를 살았는데 한국 교민들이 7만명 가까이 살았습니다. 한국 교회가 100개 이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 구성을 보면 참 재미가 있어요. 물론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순복음교회 각 교파별로 교회가 있지만 그 많은 교파들 가운데서도 우리 장로교가 특히 많은데 장로교 같은 교파임에도 불구하고 모인 성분으로 보면, 경상도 사람으로만 모이는 경상도 교회가 있습니다. 또 전라도 사람들로만 모이는 전라도 교회가 있어요. 이북 사람들만 모이는 이북 사람들의 교회가 있어요. 의사들만 모이는 의사들 교회가 있는가 하면 국제 결혼한 부인들만 모이는 교회가 따로 있어요. 그래서 대화가 달라요. 경상도 사람들은 경상도 사투리 일색으로 경상도의 관계되는 소재가 그들의 대화의 중심이 됩니다. 국제 결혼한 여자들의 교회에 가면 "언니, 동두천에 있을 때 있지..." 이런 식으로 자기들 끼리의 대화의 통로가 그렇게 되어 있어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적어도 지방색이라고 하는 전라도와 경상도가 하나가 되어서 한 교회에 교제를 이룰 수 있는 해방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 사람들이 가지 아니하는 사마리아 지방에 여행하게 되었고, 그리고 남자와 여자들이 얘기할 수 없는 사회 속에서 그 더러운 여자와 대화를 나누고 그를 구원시키며 그 동네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이 학교를 통해서 여러분이 원하시든 원하시지 않던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을 만나게 되었고, 그를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들에게 진정한 인간의 가치와 인격의 가치를 우리들에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는 진정으로 잘못된 전통과 인습 속에서 해방될 수 있는 그러한 자유를 우리에게 주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안 사람은,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의 아집과 편견과 지역의 잘못된 그러한 것을 벗어나야 된다는 것을 우리는 곧 기억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이 되는 것은 동물과 달리 본능적인 삶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동물은 동물들이기 때문에 배가 고프면 아무거나 마구 잡아 먹어 버리고, 마구 뜯어 먹어 버립니다. 그들에게는 결혼 신고 같은 것이 없습니다. 아무렇게나 본능적으로 생활하고 생식을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자가 양을 잡아 먹는 데는 인격도 없고, 윤리도 없고, 도덕도 없는 것입니다. 배가 고프기 때문에 잡아 먹는 그러한 관계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icke)라고 하는 분은 독일 함부르크 대학의 총장을 지내셨고 오늘 살아 있는 윤리학의 최고의 거성입니다. 그가 시골에서 태어나서 함부르크에 올라와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함부르크에 올라 왔을 때에는 세계 1차대전이 막 끝이 났을 때였기 때문에, 독일이 어려웠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것은 고사하고 호구지책도 면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직장을 찾아 나섰지만 그렇게 쉽게 찾아 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느날 아침에 조간신문에 보니까 함부르크 동물원에서 사람을 찾는 구인광고가 났어요. 다른 사람들이 갈세라 동물원 문도 열기 전에 원장님이 출근하기를 기다렸다가 "사람을 구한다고해서 이렇게 왔습니다. 저를 써주세요." 이렇게 부탁을 했더니 원장이 틸리케를 썩 보더니 "당신,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겠느냐" 고.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시켜만 주십시오." 원장이 하는 말이 "당신도 알다시피 전쟁을 하는 동안에 독일 국민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동물원에 있는 동물들을 다 잡아 먹어 버리고 이제 가죽밖에 남지 않았는데 전쟁이 끝나서 이제 다시 동물원을 시작해야 할텐데, 한꺼번에 그 많은 동물을 구할 수도 없고, 예산도 없어서 한 가지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실업자들이 많으니까 실업자들이 고용해 가지고 그 동물 가죽을 사람이 뒤집어 쓰고 우리 안에 들어 가서 동물 노릇을 하는 것으로 이렇게 결정했다고, 그래서 당신은 곰처럼 생겼으니까 곰노릇을 하라."고 그렇게 얘기했어요. 틸리케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굶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곰가죽을 뒤집어 쓰고 곰우리에 가서 곰노릇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아침에 원장님이 부르시더니 "오늘은 함부르크에 있는 국민학교 아이들이 동물원을 관람 오는데 당신이 사람이라는 것이 발각되지 않도록 잘 좀 해 달라."고, 그래서 "알겠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하고 가서 기다렸더니 조금 있으니까 어린 아이들이 우루루 몰려 왔습니다. 선생님이 "이 놈은 곰이라는 놈으로 머리가 둔하여 돌대가리 같은 녀석인데 고집이 세지만 그래도 춤은 잘 춘다."고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틸리케가 춤을 잘 춘다는 이야기를 듣고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박수를 치고 재미가 나서 깔깔깔 웃고 아주 신이 났어요. 그쯤 해두고 끝났으며 괜찮았을텐데 신이 난 틸리케는 나무가 한 그루 옆에 있었는데 나무 위에 올라 가서 춤을 추다가 그만 헛발을 디뎌 아래도 뚝 떨어졌습니다. 떨어졌는데 자기 우리로 떨어졌으면 괜찮았을텐데 그 옆에 있는 호랑이 우리로 뚝 떨어졌어요. 틸리케가 떨어져서 가만히 호랑이 눈치를 보니까 호랑이가 저쪽에 누워 있는데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해서 배가 푹 꺼진 굶주린 호랑이가 자기를 노려보고 있는 거예요. 아이쿠 이제는 죽은 모양이구나. 이제 벌벌 떨고 눈치를 보고 있는데 이 호랑이가 어슬렁 어슬렁 그에게 가까이 다가 오더니 뒷발로 자기를 한번 툭 건드렸습니다. 그래서 아이쿠 이제는 죽었는가 보다 벌벌 떨고 있는데 가까이 와서 귀에 대고 하는 말이 "야! 임마, 걱정하지마. 나도 사람이야."

우리는 이 틸리케의 이야기 가운데서 중요한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동물은 배고플 때 다른 동물을 잔인하게 잡아 먹을 수 있지만 인간은 인간이게 때문에 다른 인간을 잡아 먹을 수 없다는 그런 윤리인 것입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경제 체제 속에서 얼마나 많은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먹어버리고, 중소기업은 소기업을 먹어 버리고, 소기업은 구멍가게나 포장마차를 못 살게 만들어 버리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잘못된 자본주의는 이 사회에서 빨리 없어져 버려야 됩니다. 대기업은 중소기업이 잘 자랄 수 있도록 기술을 가르쳐 주고 일감을 주고 자본을 대주고, 중소기업은 소기업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서로 도와 주고 협력하고 협동하는 그것이 인간의 삶이 아니겠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땅 위에 사는 동안에 무엇을 목적하고 살 수 있을 것인가 사랑하는 젊은 대학생 여러분! 여러분들은 이제 두 가지 길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을 계획하는데 있어서 여러분들과 여러분들의 가족을 위해서 많은 돈을 벌어 가지고 평안하게 남부럽지 않게 살아 갈 수 있는 길이 여러분들에게 있을 것이고, 아니면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버려서 이웃을 향해서 여러분들을 희생하며 살아 가는 두 가지 길이 여러분들 앞에 놓여 있습니다.

일본 아사이나와 교회에 나가노라는 교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철도 운수 사무소에 서무 주임으로 일하고 있었고 자기가 나가고 있는 교회의 주일학교 교장으로 봉사했습니다. 그는 정월이 되면 유언장을 써 가지고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고 합니다. 유언장의 내용이 여러 가지 있었습니다만 그 가운데 몇 가지를 소개하면 "나는 감사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 나의 큰 죄는 예수로 말미암아 속죄되었다. 형제 자매여! 나의 죄가 크든 작든 모든 것을 용서하라. 나는 여러분이 나의 죽음에 의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감사할 참뜻을 맛보기를 기도한다. 생사고락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러한 유언장을 늘 써 가지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나가노가 기차로 출장을 가게 됐는데 기차가 언덕을 오르는 도중 그만 객차를 연결하는 연결쇠가 풀어져서 나가노가 타고 있던 객차가 언덕 아래로 미끄러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대로 놔두었다가는 마지막에 가서는 객차가 뒤집어지든지 언덕 아래로 곤두박질하든 해서 수많은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위급한 순간이었습니다. 나가노 교인은 재빨리 핸드 브레이크를 잡고 기차가 서행하는 동안에 자기 몸을 그 기차 비퀴안에 집어 넣었습니다. 그러자 그 몸이 짤라 지면서 기차는 정지하게 되었고, 그 언덕에 수 많은 여객들이 살아 남을 수가 있었습니다. 주머니 속을 뒤져 보았더니 방금 읽은 그런 내용의 유언장이 나왔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30세 였으며 아직도 독신 청년이었습니다.

오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한 목숨 살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의 뒤안길에서 자기의 삶을 희생하며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인류를 위해서 살아 가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 때문에 그래도 빚을 잃지 않고 살아 가는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가 경영하고 있는 그 집을 찾아 가게 되었습니다. 택시를 타고 마더 테레사가 경영하고 있는 그 집을 찾아 갔지만 우리는 쉽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찾아 보아도 간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헤메이다가 그 분이 경영하는 어린이 집을 찾게 되었는데 큰 창고와 같은 곳에 양철문이 두개 있었을 뿐 아무런 간판도 없었습니다. 그 안에 들어 가니 거기에는 길거리에 버려진 아이들, 뇌성마비 환자들, 병에 걸려 죽에 가는 수백 명의 어린 아이들이 거기에 수용되어 있었는데 영국과 세계에서 온 수많은 수녀들과 그리고 신부가 될 젊은이들이 와서 그 어린 아이들을 껴안고 젖을 먹이고, 그들을 목욕시키고, 그들을 위해서 수고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곳은 너무 더워서 살 수 없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에어컨 시설도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비지땀을 흘려 가면서 서양의 젊은이들이 인도의 버려진 어린 아이들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조그마한 간판 하나 붙여 놓지 않고 이름 없이 이 세계의 뒤안길에서 고생하며 수고하는 모습을 보고 저는 감격을 했습니다. 우리는 조그마한 일을 해도 얼마나 떠벌립니까 프랑 카드를 써 붙이고 대문짝 만한 간판을 써 붙이고 요란하게 떠들지만 그 안에 들어가면 아무 것도 볼 만한 것이 없는 이러한 모습들을 우리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생애를 통해서 이렇게 이름 없이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빵만으로 인간이 사는 것이 아니고 빵보다도 더 높은 차원의 삶을 사는 것이 참된 삶이 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물질의 장벽을 넘어서 인류가 동경하는 영원한 삶을 위해서 우리는 꾸준히 노력해야 될 것입니다. 물질 주의가 만연한 이 시대 속에서 우리는 물질의 장벽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 주신 그 삶의 희생에 빵의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 인류에게 비추어 주신 그 서광을 우리 마음속에 받으면서 오늘 한국의 젊은 대학생들이 이 국가와 이 민족을 위해, 세계를 위해 살아 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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