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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의 말씀 (마 0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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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때마다 듣게 되는 안데르센 동화 성냥팔이 소녀 이야기는 추운 크리스마스 이브날 어느 가난한 소녀가 성냥팔러 나갔다가 부자집 창문 밑에서 얼어 죽었다고 하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이 소녀가 동사하게 된 원인을 분석하라.

기상학자가 말하기를 겨울이니까 죽었지 여름이면 죽지 않았을것이다. 그것은 정답이다. 지리학자가 말하기를 한국이니까 죽었지 하와이 같은 따뜻한 나라면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도 또한 정답이다. 교육학자가 말하기를 아니야 부모가 나빴어. 아무리 가난하기로서니 그 추운날 밤 어린 것을 장사 내보내다니 부모의 탓이야. 부모가 죽인거야. 그것도 정답입니다. 경제학자가 말합니다. 경제 제도가 아이를 죽인거야. 빈익빈 부익부 그 못난 경제 제도가 살인한 것이야. 그것 또한 정답입니다.

사회에서 일어난 한 사건을 놓고 처해 있는 입장에 따라서, 자기가 알고 있는 전공 분야에 따라서 답은 각각 다를 수가 있습니다. 지성인이란 무엇이냐 그것은 내가 해석하고 있는 답과는 다른 해답이 있을 수 있다고 하는 얼터너티브(alternative) 를 인정하는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나는 목사로서 또 하나의 정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등산가서 밤에 조난당하여 내려 오지 못하고 산 속에서 밤을 지새워야 할 때, 아니면 가장 추운 겨울 밤 집에 들어 가지 못하고 밤을 지새워야 될 때 잠들면 죽어 버리는 것입니다. 잠들지 말아야 합니다. 어린 것이 추우니까 팔려고 가지고 나온 성냥으로 불을 켜서 손에 대니 손이 따뜻해집니다. 잠이 소르르 왔습니다. 꼬박꼬박 잠들고 있을 때에 어른이 지나가면서 집에 들어 가서 자거라. 그말 한 마디 해 주었더라면 그 아이는 죽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집에서 아이를 키워보면 어떤 아이는 울지 않고 잘 자랍니다. 그러나 어떤 아이는 성악가가 되려는지 자주 우는 아이가 있습니다. 울면 엄마가 "뚝! 그쳐!"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나 너무 자주 우니까 엄마가 못들은 척하고 부엌에서 설거지만 하고 있습니다. 아이는 울음을 그쳐야 하겠는데 "뚝!" 소리가 나와야 그치지. 그래서 울고 싶지 않은 울음을 계속해서 울고 있다가 견디다 못한 엄마에게 가서 치마를 붙들고 물어봅니다.
"엄마, 오늘은 왜 그쳐 소리 안 하지 뚝 소리 안 하지"
어른이 뭔가 오래도록 생각해 봤더니 어른은 별게 아니라 아이같은 것이 어른이더군요. 우리 주변에 보면 어른들 가운데서도 "그만 우시오. 인생이란 다 그런 건데 뭐, 참노라면 햇빛 나는 날 있지요. 나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오." 이렇게 위로의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 주기를 기다리면서 아직도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어른들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여러분! 대전에 탄금대나 낙화암에 가 보셨나요 밑에는 시퍼런 물이 흐르고 위에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서 있어 보기만 해도 아찔하지요. 그렇게 경치 좋은 곳이 미국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경치를 보기 위하여 그곳에 오기도 하지만, 더러는 그곳에서 자살하기 위해 투신하는 장소로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골치를 앓던 경찰이 연구 끝에, 거기 입구에다 팻말을 써 붙이기도 했습니다. "Think about it again!-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오!" 그 팻말을 써 붙이고 부터는 신기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거기까지 오기에는 몇날 몇일 밤을 자지 않고 결심하고, 결단하고, 또 생각해서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간단한 말 한마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오." 그 팻말을 써 붙이고 부터는 신기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거기까지 오기에는 몇날 몇일 밤을 자지 않고 결심하고, 결단하고, 또 생각해서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간단한 말 한 마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오."를 읽고 돌아서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경찰에서는 좋다고 박수를 치고 있을 때에, 하루는 이와 같은 일이 생겼습니다. 너무 심각해서 발 밑만 보고 오느라고 그 팻말을 보지 못하고 절벽 난간에 섰습니다. 뛰어 내리려 하니 시퍼런 물에 겁이 와락 났습니다. "야, 죽는 데도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구나, 죽을 용기 있으면 그 용기 가지고 다시 한번 살아보자."하고 돌아서 나오다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오.' 팻말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뛰어 내려 죽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말 한마디가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말 한마디로 천냥 빚 갚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대단히 약화된 말입니다. 말로써 빚을 갚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는 그러한 큰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의사가 환자에게 잘못 말해서 진단을 거꾸로 내리면 살 사람이 죽기도 하는 것입니다.
말이 힘을 가지지 못하면 하늘에 날아 가 버린 파랑새 마냥 흔적도 남기지 못하는 것이 말인가 하면, 말이 힘을 가지기 시작하면 칼보다도 더 무섭고 바위도 쪼갤 수 있는 그런 무서운 힘을 가진 것이 말의 위력입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4장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양쪽에 날이 선 검보다도 더 무서워서, 더 힘이 있어서 사람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고 하는 그런 표현이 있습니다.

여러분! 커다란 말씀이 내 가슴에 담겨 오고, 내 앞으로 육박해 와서 나에게 골수를 찌르는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는지요 그러기에 고려 시대 서희는 무기를 가지지 않고도 10만 대군을 말로써 물리칠 수가 있었습니다. 조금 전에 목사님이 읽어 주신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말이 얼마나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고 하니 이 천지 만물도 말씀의 힘으로 창조되었고, 창조된 것 그 어느 하나도 말씀을 통하지 않고 창조된 것이 없다고 하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 말씀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희랍어 원문의 단어는 로고스(logos) 라고 하는 단어인데, 그것이 학문의 꼬리에 붙여 있는 <-logos>라고 하는 말이 된 것입니다. 로고스라고 하는 희랍어 단어는 우리 말로 도(道), 이치(理致), 이성(理性), 말씀, 진리(眞理), 원리(原理)이니 하는 말로 번역할 수 있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즉, 창조하고 하는 행위, 행동이 시작하기 전, 그 바탕에 로고스-진리, 원리, 원칙, 도, 질서가 존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원리나, 도나, 진리인 말씀이 없이 창조되는 것은 없습니다. 무턱대고 행동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고 로고스가 없는 행동은 단순한 액티비즘(activism), 액션이즘 (actionism) 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고스 없는 파토스, 로고스 없는 액토스는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로고스가 없기 때문에 그것은 때때로 파괴 행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많이 달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목숨 주고 건강 주는 그날까지 열심히 달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달린다고 하는 행동 이전에, 그 근저에, 왜 달리느냐, 어디로 가느냐 하는 로고스, 진리, 말씀, 도를 먼저 가진 후에 달려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로고스를 힘껏 먹고 가지는 시기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 일평생 동안 많은 것을 잡고, 큰 것을 잡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잡는다고 하는 행동이 있기 이전에, 그 밑바탕에 왜 잡느냐, 잡아서 무엇 하느냐 하는 도, 진리, 원칙을 우리가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힘껏 달린 후에, 인생의 말년에 가서 마이너스 방향의 달림이었다고 하는 것을 알고 후회할 때가 있을 것이고, 힘껏 잡고서도 썩을 것, 없어질 것, 임시적인 것을 잡았구나 하는 후회가 올런지도 모릅니다.

예수님도 인류 구원이라고 하는 공생애에 들어가기 전에, 큰 사업을 행동화하기 이전에 진리를 잡기 위하여 먼저 광야에 가서 40일 동안 금식하면서 생각하고 기도하는 기간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아까 목사님이 읽어 주신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이 금식 기도하고 배가 많이 고플 때에 사탄이 나타나서 유혹했습니다. "예수야 너 배 고프지 그러니까 저기 돌을 가지고 떡을 해 먹어라." 그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말씀은 대단히 유명한 말씀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다."

그 말씀은 대단히 유명한 말입니다만 옛날 내가 목사가 된 후에도 이 말씀을 신용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어려운 시절, 배고픈 시절에 자랐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쳇! 배 고파보지 않았으니까 떡보다 말이 먼저라지. 배 고파 보아라. 말씀보다 떡이 먼저지." 늘 그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그것은 대단히 맑스주의적인 사고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50대 중반이 넘어서서, 초로의 인생에 접어 들면서, 이제 와서 겨우 "아! 우리 주님 어떻게 그런 진리의 말씀을 하셨을까" 이가 시리도록, 뼈가 저리도록 그 말씀에 감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아모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 약식이 없어서 기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서 기근이다." 참으로 배 고파 할 일, 참으로 목 말라 할 일은 우리 실존적인 존재가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 우리 가슴에 파동칠 그 생명의 말씀을 먼저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남의 여러분! 한남을 졸업하기 전에 먼저 일평생 마음에 기억하고 삶의 좌우명으로 삼을 진리의 말씀 꼭 몇마디는 기억하고 나가시기 바랍니다.

아까 목사님께서 저를 1961년부터 연세대학교에 나가서 가르쳤다고 그런 소개를 하셨습니다만 아무래도 경험이 그쪽 대학의 이야기밖에는 없군요. 그때는 여러분들 중에 태어나지 않은 분들 많이 있을 겁니다. 얼마나 내가 젊었겠습니까 그러니까 학생과 교수의 연령 차이가 적으니까 형님처럼 많은 학생들이 저와 친하게 지냈고, 인생 상담과 많이 했습니다. 그때는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척이나 불안정하던 시대였습니다. "아! 나는 가족도 다 잃었습니다 도무지 살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하고 죽고 싶은데 어쩌면 좋겠느냐고 의논하러 온 학생이 있었습니다. 내가 젊은 날 정열에 넘치는 때인지라 학생과 밤을 새워 이야기하고, 같이 얼싸 안고 운 적도 있고, 어떤 날에는 밤 동안에 자살을 결행하지 않았는가 걱정이 돼서-당시는 가난해서 전화도 없는 때였으니까-그 집까지 우정 가서 문안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나이가 늙어서, 정열이 다 없어져서 자살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온다고 해도 눈하나 꿈쩍하지 않고 "그래, 그럼 나가서 얼른 뒈져." 하는 소리를 합니다.
그런데 내가 나이 들어서 정열이 없어진 까닭도 있지마는 오랜동안 두고 경험해 보니까 깨달은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살기 싫네, 죽고 싶네 의논해 온 학생치고 죽는 꼴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자살자살자살...> 자꾸 외치면 <살자살자살자...>가 되는구나.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버스탈 때 그전에는 동전을 주었는데 요즈음은 토큰을 사용하지요. 토큰이 생긴 것이 몇 해 전입니까 토큰이 생겼을 때 이야기입니다. 대학생 가운데 얼마나 가난한 학생이 있었는고 하니, 너무너무 가난해서 토큰 살 돈이 없어서 저 먼 자취하는 집에서 버스 타지 못하고 걸어 오늘 학생이 있었습니다. 이 학생은 점심 시간이 되면 슬며시 친구들로부터 떨어져 나갑니다. 친구들은 식당에서 점심을 사 먹지만 자기는 사 먹을 돈이 없기 때문에 굶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녁 때가 되면 다시 걸어 자취하는 집으로 가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만일 젊은이가 인생이 떡으로 사는 것이라고 한다면, 물질로 사는 것이라고 한다면, 돈으로 사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런 학생은 이미 죽어 이 당에 존재하지 말았어야 하지마는 그러나 그 학생은 삶에 의미를 두고 더 공부하려고, 더 성공하려고 눈에서는 빛이 번쩍번쩍 나는 것을 내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 부도산으로 돈을 많이 벌던 시절에 몇 해 전에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국민학교 학생 시절이었을 겁니다. 그때 부동산으로 돈을 무척 많이 번 집의 아들이 있었는데 내게 상담하러 왔습니다. 도무지 살 맛이 나지 않고 죽고 싶다는 것입니다. 생활 환경을 물어 보니까 그 집에는 땅도 많이 있고, 비싼 아파트가 여러 채 있고, 자가용도 여러 대 있고, 심지어 어머니도 여러 명 있고, 모든 것이 흔하고 흔했습니다. 그러한 모든 것이 풍족한데 딱 한 가지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학생! 바이블이라고 하는 책을 읽어 본 적이 있는가" "없는데요." "기독교가 아니어도 좋으니 어떤 종교의 신앙을 가져 본 적이 있는가" "아니요." 모든 것이 풍성하고, 자기는 셋째 엄마의 아들이고 모든 것이 버글버글 한데 딱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그 학생의 젊음을 막 불태울 수 있는 동력을 주는 살아 있는 말씀, 가슴에 불타 오르는 말씀, 그 삶을 좌우해 갈 수 있는, 에너지를 주는 살아 있는 말씀이 그 가슴에 없다고 하는 것을 내가 발견했습니다.

클리브란드(Cleveland. S. G) 소년은 깡패였습니다. 깡패들과 함께 술집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교회 앞을 지나 가게 됐는데 교회는 불이 켜져 있고 그 안에서는 찬송가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아마도 부흥회 기간이었던 모양입니다. 교회 건물을 턱 쳐다 보니까 건물 벽에 프랭카드가 붙어 있는데 거기에 바로 로마서 6장 23절의 말씀이 씌여져 있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런데 그 말씀 전부 말고 윗 부분 '죄의 값은 죽음이다.' 하는 말씀이 그날따라 자기 가슴에 뭉클하게 다가왔습니다. "야, 나 오늘 저기 좀 들어가 볼래." "야, 이놈아! 술먹으러 가다가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내일부터 너랑 술먹으러 다닐테니까 오늘만 놔줘." 그들의 헤어짐은 영원한 헤어짐이었습니다. 소년이 거기 들어가 보니까 강사가 하는 말씀이 모두 자기를 향해서 하는 말씀처럼 막 가슴에 다가 오고, 해일처럼 밀려 오고 육박해 오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의 삶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40년이 지나서 클리브란드 깡패는 미국의 22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미국 역사에서 알다시피 그는 또 미국의 24대 대통령도 하였습니다. 그가 미국 권력의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을 때에 비서를 시켜서 40년 전에 헤어진 친구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시간이 거려서 알아본 결과 40년 전에 헤어진 그 친구는 법학을 전공하여 변호사가 되었는데 나쁜 일에 가담하여 사기를 쳐서 지금 감옥에 있다고 하는 그런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인생의 갈림길에는 짧지만 생명의 말씀 로마서 6장 23절이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 기독교가 온 것은 100년이 좀 넘었습니다. 지금부터 90년전쯤 이야기입니다. 함경도 골짜기에 한 가난한 전도인이 왔습니다. 함경도 골짜기에는 김생원이라고 한학을 많이한 한 유생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전도하는 사람을 매서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책을 팔러 다닌다고 매선인이라고 했습니다. 한 가난한 매서인에게 이 마음씨 착한 유생은 문간방에서 자고 먹을 수 있도록 침식을 제공했습니다. 그 이튿날 매서인은 떠나면서 "김생원님 제가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만 가진 것도 없고 갚을 것이 없으니까 제가 팔려고 가지고 다니는 이 책 한 권을 드리고 가겠습니다. "아이 그기 무시기 책이오 야소교 책 아이오" 옛날에는 예수교를 한자어로 야소교라고 하였습니다. "예 맞습니다만..." "아이 필요없다니까." 하고 소리를 지르니까 그만 무안해서 던져 놓고 도망갔습니다. 볼 리가 없지요. 광에다가 쳐 넣었습니다. 쥐가 오줌을 싸고 먼지가 수북히 앉았겠지요. 세월이 흘러도 그 책을 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의 아들 재준이라고 하는 소년이 신학문을 공부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는데, 신학문은 시키지 않고 맨날 서당 공부만 시키니까 참다참다 못해서 그만 가출을 했습니다. 어머니에게 살짝 귀띔을 하고 서울에 가서 신학문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신학문을 공부하면서 세계의 베스트 셀러 리스트를 보니 항상 1위에 바이블이라고 하는 책이 있었습니다. 이 책이 어떻게 돼 먹은 책인가 우리 집에 한 권이 있는데 방학 동안에 집에 내려 가서 그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재준 목사님께서 어떤 자세로 그 책을 읽었다는 표현은 글에 없지만 내가 짐작하건대 처음에는 방바닥에 배를 쭉 깔고 엎드려서 이 책을 어떻게 된 책인가 하는 호기심에서 읽었겠지요. 그러다가 어느 대목에 와서 너무 큰 말씀, 너무 감격스러운 말씀에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무릎을 꿇고 읽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대목에 와서는 너무너무 좋은 말씀에 앉아서도 읽지 못하고 일어서서 춤을 추면서 읽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지 그 책에 빠졌습니다. 그 책을 서울로 가지고 와서 열심히 읽고 책을 믿는다고 하는 교회에 가서 신자가 되었습니다. 신자가 되니까 바로 아버지에게 전도할 마음이 생겼습니다.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아버님 전상서. 비록 야소교는 아버님이 생각하듯이 그렇게 사교가 아니오라 서양 문명을 일으켰으며, 많은 사람에게 새 생명을 주고 어쩌고 저쩌고...." 많은 유식한 말을 썼을 것입니다. 답장이 왔습니다. 답장을 보니까 첫 마디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야, 이놈아! 우리집 망했구나! 네 놈이 환장을 해도 단단히 환장을 했구나." 이 말씀으로 시작해서 편지 끝까지 진노와 분개로 가득찬 꾸중의 편지였습니다. 이 분에 넘치는 편지를 김재준 소년은 안고서 "우리 아버지가 나보고 환장했다고 하는 욕보다 더 큰 욕을 해도 싸다. 내가 이 책을 발견하기 전에는 매일 그렇게 짜증스럽고 원망에 가득차서 살았는데 이 책을 발견하고 이렇게 기쁨에 차서 생활하니 내가 환장한 것보다 더 하지." 그러면서 김재준 목사는 "책에다 이 찬송을 들을 때마다 우리 집에 와서 성경 한 권을 놓고 간 그 사람을 생각하게 된다고 그렇게 기록했습니다. 그 찬송은 무엇입니까 <씨를 뿌릴 때 나지 않을까 심히 염려하여 곡할 지라도 나중 예수께서 칭찬하실 때에 기쁨으로 단을 거둘지어다.> 이 찬송을 들을 때마다 지금은 그 이름도 기억할 수 없고 그의 생존도 알 수 없지만 나 어릴 때 함경도 골짜기까지 와서 성경 한 권 놓고 간 그 사람을 생각하게 된다."

신하사는 고아원에서 자랐기 때문에 부모의 얼굴도 이름도 몰랐습니다. 고아도 어른이 되면 군대가기 전에 술파는 여성과 사귀어서 딸을 하나 낳습니다. 군에 입대하여 아내에게 편지해도 답장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이 여인 고아 출신과 사귀어 봐야 앞길이 깜깜하다고 생각했는지 아이를 놓고 도망갔습니다. 우리처럼 부모의 사랑을 넉넉히 받고 살았다면 용서도 가능하련만 고아원에서 너무 각박하게 자라서 너무 엄격하게 자라서, 용서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휴가 나가면 어디 보자. 저 죽이고 나 죽자."
기다리던 휴가날이 왔습니다 총을 가지고 나가 갈겨 댈려고 하니까 총이 너무 커서 감추기가 어려웠습니다. 주머니 속에 들어 가는 무기가 있어서 하나를 훔쳐 가지고 나왔습니다. "제까짓 게 어디가. 술팔던 게 술 집에 있겠지." 안동 시내의 술집을 다 돌아다녔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옛날 이야기니까 옛날에는 통행금지가 있었습니다. 싸이렌이 뚜--하고 울렸습니다. 밤 10시가 되었는데 부대로 돌아 가자니 막차는 끊어져서 없지. 여관집에 가자니 여관집이 없지. 여자는 찾지 못했지. 갈데는 없지. 오라는 데는 없지. 화는 났지. 술을 취했지. 밤은 되었지.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냥 안동 시내를 화가 나서 돌아 다니면서 누구든지 수 틀리면 죽는다 그렇게 부을 품고 있는데 마침 안동 시내 극장에서 마지막 프로가 끝나서 사람들이 뭉게 뭉게 쏟아져 나옵니다. 모두다 행복하게 보입니다. 야인의 팔장을 끼고 너무나 행복하게 웃으면서 나오는 것입니다. "불공평한 이 세상! 나는 이렇게 불행한데 너네놈들은 행복하냐" 그래서 안전핀을 뽑아서 던졌습니다. 던지면 너 죽고 나 죽는 것 아니잖아요. 너 죽고 나는 안 죽지. 한꺼번에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죽지 않아도 창자가 나오고 다리가 날아 가고 하는 큰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당장 잡혀서 군재에 회부되서 사형이 선고됐습니다. 이제 사형 지행일을 기다리면서 영창 중에 제일 나쁜 사형수의 영창을 살고 있었습니다. 군목이 이 사람 영혼을 구원해 볼 양으로 성경책도 넣어 주고 종교 서적도 넣어 주었지만 성경책에 손 한 번 대지 않았습니다. "신하사!" 불러도 돌아 보지 않고 벽만 바라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날짜가 흘러서 내일 모레면 사형 집행해야 하는 날이 닥쳤는데 그날도 목사님이 정성어린 목소리로 "신하사! 신형씨! "하고 불렀습니다. 그랬더니 지금까지 대꾸하지 않고 벽만보고 있던 신하사는 홱 돌아서서 목사를 노려보고 있습니다. "목사님!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기집애 사랑도, 부모의 사랑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목사님 내게 사랑을 베풀려고 하지 마십시오. 죽는 날 보십시오. 내가 용기있게 꿋꿋하게 죽을 테니까. 목사님 지금 하려고 하는 말씀, 듣지 않아도 알고 있습니다. 예수의 이야기하려고 하지요 예, 내가 고아원 시절에 예수 이야기 많이 듣고 알고 있으니까 필요 없습니다. 가시오." "옳습니다. 당신은 불행하게 자라서 아무의 사랑도 받아 보지 못했습니다. 나라도 당신을 한번 힘껏 사랑해 보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신의 마음이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지금도 당신을 사랑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숨을 헐떡이면서 목사님을 노려보더니 뛰어 옵니다. 목사님 멱살을 잡는 것이 아니라 목사님 팔에 매달려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보통 울음이 아니었습니다. 사나이의 울음이었습니다. 가슴을 뜯으면서 머리를 벽에 박으면서 울고 울고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울고 운 다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 들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 들이니까 바로 삶의 변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나쁜 일은 수없이 해 봤지만 좋은 일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습니다. 내가 죽으면서 좋은 일 한번 해 보고 싶습니다. 어디서 말을 들으니까 남은 위하여 신장이나 눈알과 같은 기관을 기증할 수 있다는 데 알아 봐 주십시오." 너무나 감격한 목사님, 헐레벌떡 뛰어가서 군의관에게 물어 봤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옛날인지라 신장이식을 해서 성공한 경우가 몇 건 있는데, 신장이식을 하려면 받을 사람과 줄 사람이 거부 반응이 일어나는지 일어나지 않는지 조직을 떼어 내 외국에 가서 검사를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자면 한달이 넘게 걸린다는 겁니다. 이 사람은 내일 모레 죽어야 하니까 신장이식은 어렵고 사병 사운데 실명한 사람이 있어서 눈을 기증하기로 했습니다.

죽는 날 아침 목욕하고 세례받고 의무실에 가서 눈알 뽑는 수술을 했습니다. 눈에서 피가 흐르니까 붕대를 감아 줬겠죠. 앞을 볼 수 없으니까 목사님 손을 잡고 사형장으로 들어갔습니다. 목사님이 손을 놓으시니 그 곳이 집행장, "목사님 부탁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그동안 육식이 눈은 밝았지마는 영혼의 눈이 어두워서 이렇게 몹쓸 일만 하다 갑니다만 내 눈을 기증받는 그 분에게 반드시 부탁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분은 영의 눈까지 밝아서 내가 누리지 못하고 가는 영광된 삶을 누리고 오라고요." 그 하나 마디를 남기고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그 옆에 있었으면 지금도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 소리 못했을까요. 나라도 했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 간단한 말 한 마디가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영혼 하나를 구원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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