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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 주님의 변화 (단 07:13-14 계 01:4-8 요 18:3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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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주제:열왕기 하 2:1-12
우리의 본문은 예언자의 계승 이야기로 엘리야로부터 엘리사에게로 능력이 전이되는 것을 확인해 주고 있다. 그것은 엘리사와그의 일편단심의 이야기와 같이 엘리야와 그의 신비한 떠남에 대한 바로 그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배경은 엘리야의 마지막 여행으로, 그 여행은 죽음으로가 아닌 승천의 여행이었다(1절. 눅 9:51 참조). 그의 제자 엘리사와 동반하면서 엘리야는 길갈에서 벧엘로, 그리고 거기에서여리고로, 그리고 요단으로 여행한다. 길을 따라가면서 세 번이나 엘리야는 그의 동반자로 하여금 그를 혼자 있게끔 해 달라고요구한다(2,4,6절). 그러나, 매번 엘리사는 엄숙하게 그의 주인을 떠날 수 없다고 맹세한다(2,4,6절). 벧엘과 여리고에서 예언자 무리가 엘리사에게 여행의 목적과 목표를 기억나게 한다(3,5절). 가능한한 그들의 충고의 암시는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르는것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엘리야의 승천은 하나의 신비이고, 아무에게도 증거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예언자들에게 조용히 남아 있을 것을 요구하며, 그리고 엘리야와함께 그의 여행을 계속한다. 그들이 요단에 도착했을 때에, 엘리야는 물을 갈라지게 하는 모세의 기적을 재생한다(8절. 출14:16, 21-22 참조). 그리고, 거기에서 둘은 마른 땅을 걸어 강을 건너간다. 이 묘기는 멀리서 다섯 사람의 예언자에 의해 확인되었다(7절). 요단 강의 다른 편에서 엘리야는 마침내 그의 꾸준한 동반자가 요구하는 것을 허락하고, 엘리사는 엘리야의 능력의"갑절의 몫"(double share)을 요구한다(9절). 이 요구는 장자에대한 법적 근거에 의한 것이며(신 21:17), 그리고 그것은 엘리야의 수제자가 되고자 하는 엘리사의 결단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응답으로 엘리야는 신적 의지에 대한 그의 제자의 욕망의 만족을남겨 준다:엘리사는 엘리야의 신비한 승천의 광경이 가치있게보여진 것이다(10절). 즉시로 엘리사는 불회오리 바람 속에서 승리에 찬 승천을 하는 그의 선생을 증거한다(11절). 살아 승천한자의 목격자로서 엘리사는 마침내 엘리야의 겉 옷을 입을 수 있는 자격을 갖는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영광을 확실히 목격하는 보상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는 끝까지 그의 선생의 길을 여행했기 때문이다. 그여행은 그를 엘리야의 후계자로 준비시키는 데 기여했다. 요단동편 광야에서 엘리야의 신비한 산체로 승천한 것은 유대인과 기독교 전통에 꼭같이 그의 재림의 개념을 불러일으켰다. 묵시주의영향 아래서 엘리야는 종말론적 선구자의 역할을 부여받았다(말4:5 참조). 공관서 전승은 그를 승천 장면의 장소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이는 세례 요한과 동일시 하고 있다.

제 2주제:고린도 후서 3:12-4:2
우리의 본문은 바울의 적대자들에 대한 방향으로서 출애굽기34:2-35절에 대한 미드라쉬(Midrash)이다. 고린도 후서에 있어서반대적인 신학의 특성에 대한 최근의 조사는(S.슐츠, D.죠지) 우리가 지금까지 가능한 것보다는 더욱 정확히 바울의 논점을 따르도록 해 준다. 출애굽기 34:29-35에 대한 그들의 이해에 따르면,

모세는 그의 얼굴에 면사포를 썼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 광경이 보여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세의 얼굴 표면이 빛났다."왜냐하면, 그는 시내 산의 신비 속에 직접적인 통찰을 얻었다.
그 전도자들은 그들 자신을 단지 영을 소유한 자로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모세처럼 그들이 그들의 몸과 마음이 하나님의 현존을 반영하도록 시내 산의 영광을 인정한 것이다.
이전 전도자들에 반하여, 바울은 이스라엘인들이 그의 얼굴 위에 반사되고 있는 그 영광이 사라지는 것을 실감하는 것을 막으려고 면사포를 사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모세의 면사포는 영광의 불충분한 성질을 설명해 주고 있다. 그것은 보호적인 장치가아니고 옛 계약의 불완전성을 감싸 주는 데 사용되는 속임 수단이다(12-13절). 이 논쟁과 함께 바울은 계시에 관한 그의 적대자들의 기본 자료, 즉 모세와 그의 시내 전승을 거부한다. 모세의얼굴을 숨겼던 면사포는 아직도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덮여 있다(14-15절). "마음"에 대한 준거는(15절:수건이 그들의 정신이 아닌 마음을 덮었다.) 능력의 외적 증거에 대한 적대자들의 주장에대해 논쟁화하고 있다. 비록 그들이 밖으로 영광스럽게 해도, 안으로는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해방되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5:12 참조).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불완전한 면사포는 벗겨지고성서 속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16절). 17절의 어려움은 하나님의영처럼 홀로 그들의 영에 관한 전도자들의 정의에 대한 논쟁이다. 바울은 주님, 즉 예수와 함께 그것을 동일시하므로서 성령에대한 그들의 독선적인 주장을 깨어 버린다.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의 결과로 모든 사람이(18절:그리고 우리들 모두가) 소수가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거울 속에서 비취는 것이다. 그러므로,아무도 존재론적 본체로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소유하지 못하며,차라리 누구나 변화 과정에서 그 안에서 자라 갈 뿐이다(18절).
바울은 그의 적대자들의 모세와 옛 계약에 대한 관여를 끊어 버린다. 왜냐하면, 이런 위치는 그리스도에 관한 피상적이고 독선적인 이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복음서 주제:마가복음 9:2-9
변형 장면은 산상에서 있었고, 복음서에서는 산들의(3:13,6:46,13:3), 그것은 단지 "높은산"(high mountain)이다(2절). 계시의다른 정상 위에 우뚝 솟아서, 예수와 세 제자에 의해 올라갈 그"높은 산"은 모든 현현들의 현현으로서 변형을 가르키고 있다.
예수의 변화된 모습은 그의 옷의 증거에 의해 기술된다(3절). 종말의 색인 흰색(계 6:2,7:9,14:14 참조)은 현현된 예수에 대한종말론적 특질을 알리고 있다. 구름은 하나님의 현존의 전통적인명시이며(출 24:16 참조), 구름으로부터 나온 소리는 다름아닌하나님의 목소리였다(7절). 이 하늘의 목소리는 예수님의 사역에있어서_세례로부터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표시하고 있다. 예수의 초기에 하나님은 유사한 방법으로 그리고 거의 동일한 말씀으로 주도권을 취하셨다. 세례 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종말론적 왕의 직무에 않히셨다. 그러나, 취임식은 은밀히 집행되었다.
아무도 심지어 세례자 자신까지도 영의 종말론적 돌입을 증거하지 못했다. 변형으로 제자들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의 미래적취임식을 알게 된 것이다. 그 변형은 세례를 뒤따라 가깝게 되어진 것으로 예수가 묵시적 충만성, 즉 그의 재림(Parousia)을 기대하는 것이다.

복음서에서 다른 모든 현현들과는 다르게 그 변형은 그의 최종적 드러냄의 날을 제공하고 있다(9절). 그것은 사람의 아들의 부활 때까지는 덮여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는 변형된 예수와는 동일하지 않다. 차라리 부활은 예수의 변형의 영광

의 실현과 관련된 종말 이후(terminus post quem)를 표시하고 있다. 변형은 예수의 부활 이후_그의 영광 속의 재림 속으로 그 자체를 가리키고 있다.
마가복음서 전체를 통하여 제자들은 예수를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 변형은 예외가 없었다. 두려움과 혼돈 속에서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지을 것을 제안한다(5-6절). 그의 생각은 미래의 예상을의미하는 것만을 붙잡아 두려는 충동에 의해서 비롯한 것이다.
베드로는 현재에 대한 미래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설교를 위한 해석

변형은 설교자에게 집중할 수 있는 여러가지 주제를 제공한다.
현재를 보는 것은 확실히 종말적인 것이며, 그것은 현재에다가그것의 변형된 희망을 준다(고후 12:2 "그 때는 우리가 그런 희망을 갖게 된 것을 보리라." 참조). 마가의 설명에서 제자들은고통과 부활 이후까지 이 사건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부활절 이쪽의 우리들을 위하여 변형은 그 미래와 목표의 빛 아래서 우리의현재 상황을 바라보며, 그리고 그에 의해 그것을 해방하는 갱신의 기회인 것이다. 듀보스(W.P.DuBose)는 그의 저서 [신약의 구속론](Steriology of the Testament)에서 그것의 목적(또는 글최종적 원인)을 포함하지 아니하고는 정의가 완전할 수 없다고주장했다. 사실이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누구나 무엇을 위해 있고, 그것이 무엇이었으며, 그 의도와 운명을계속해서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멍키 렌취에서 사람에이르기까지 모든 것의 진실이라고 하겠다. 파이프 렌취가 무엇을위해 있느냐를 설명하지 않고서 그것이 무엇이라고 아이들에게설명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가끔우리는 역시 그의 목적과 종국을 포함하여 그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포함시키지 않고서, 단순히 그의 존재의 근거 위에서한 인간의 동일성을 보게 된다.
현재를 분별하는 변형의 변화시키는 능력에 관한 사실상 하나의 움직이는 실례가 라 맹샤의 사람(Man of La Mancha) 속의 돈키호테의 모습 안에 있다. 이 희극적 모습을 끈기있게 존재하는것("is")은 "되어질 것"(what will be) 위에 최종적인 전례를 취하는 것을 거절한다. 그는 매춘부 알돈자를 "나의 부인 둘키니아"라고 부르고, 이름짓고, 말로 표현하고, 보기를 고집한다. 연극의 종막에 가서 돈키호테는 죽어가고, 그리고 그의 동료 산초판자는 알돈자에게 말한다. 그녀는 그에게 조용히 그러나 힘있는어조로 "나의 이름은 둘키니아입니다."고 대답한다.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Jr.)은 워싱톤 D.C.에서의그의 위대한 연설문 "나는 산정에 갔다왔다...."에 대한 그의 영감과 환상을 발견한 것은 바로 그 변형의 산정에서부터였다. 그의 환상은 과거에 가졌으나 또는 현재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환상이었다. 사물의 종국과 운명에 관한 이 환상은사람들과 환경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그들을 해방시키고 그러나역시 고통 속에도 적용된다.
마가복음에 관한 학자들은 여기서 이 비밀의 목적이 단순히 기적 속에 나타나는 아들의 능력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역시 그의수난에서 나타나는 아들의 고통 위에 강조를 두고 있다. 고통의신비는 어떤 설교를 위해서나 의욕적인 제목이 된다. 그러나, 변형에 의한 변화는 어떤 접근에 관해서나 중요한 부분이 되어져야할 것이다. 수 년 동안 "개혁의 때"(The Protestant Hour)에 관해 선포된 모든 설교에 있어서 가장 요구된 대본은 존 레드헤드(John Redhead)에 의하면 고통에 관한 것이었다. 거기에는 이 제

목에 대한 주의력을 환기시키는 데 문제가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고통의 원인을 연루시키든지간에 모두가 그는 모든 고통 위에 계신 주님이라는 데 어떤 경우이든지 동의할 것이다. 로마서18:18에서 바울은 변형의 영광을 우리가 지금 어떤 고통을 보게할 수 있는 길과 연결시키고 있다. "생각컨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이 영광은 세 본문에 공통된다. 바울을 위하여 모세의 사역은영광스러운 것이었으나, 그러나 그리스도의 새 계약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모세의 얼굴을 내리덮는 면사포는 율법의영광의 제한을 숨긴다. 심지어 지금도 그의 적들의 심장을 덮고있는 면사포는 그들로부터 그 새롭고 더욱 영광스런 봉사를 숨긴다. 갈라디아에서 유대주의자들이나 고린도에서의 더욱 교활한의욕에 대한 바울의 논쟁은 교회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 자신의시대 속으로 계속되어지고 있다. 요한 웨슬레는 그의 회개 후에윌리암 로우(William Law)에게 그가 그에게 이 새롭고 더욱 영광스런 목사의 직무에 대해 결코 가르쳐 주지 않았던 사실을 불평하는 비난의 편지를 썼다. 누구나 옛 계약으로 그의 마음이 가리워져 있고, 그리고 이 의의 자유함에 대해 낯선 자들을 아직도고집하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 책임 해제, 용서, 그리고 의로움에관한 어떤 선포를 쓸데 없이 찾고 있으면서 어떤 전통적인 경건의 글들을 읽어야 할 것이다(고후 3:17 참조).

둘째 본문의 12절은 간과해서는 안 될 "그러므로 그런 희망을가지고...."라는 중요한 가정을 갖고 시작한다. "정죄"(condemn-ation)의 반대는 "의"(righteousness)라는 사실은 많은 교인들에게 놀라운 사실이 아닌가!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직분은 더욱 넘치리라"(9절). 여기서 "의"라는 단어는 "의인"(義認, justification)과 같은 것이며, 그리고 의인의 교리는 최근에 "용납"이나 혹은 성서적인 용어로 "의"와 일치하지 않는 묵인으로서 해석되어진다. 다른 한편, 각 시대와 회중 속에 정죄와반대되는 이 의의 지식으로부터 막이 쳐진 마음이 남아 있다.
그 때, 우리는 옛 봉사의 정죄로부터 새로운 봉사의 의와 자유로 움직여 가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핵심이 되는 단어는 18절에 나타난 대로 "영광"으로 보인다. 주님의 영광을 봄으로서 우리에게 오는 것이 영광이고, 그리고 우리의 통일성은 주님의 영에 의해 "영광에서 영광으로" 움직여 간다. 우리의 영광이 우리자신 안에서 온다고 세상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거짓이 있다. 햄릿에서 "그대 자신에게 진실인 것"이라고 러트스(Laertes)에게한 플로니우스 충고가 그것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현대음악 희곡 페핀(Peppin)에서("그러나 내가 내였을 뿐이다"라고) 죽음을당기는 것으로 진단되고 있다. 바울은 그들도 우리도 하나님과우리의 종말론적 주체, 우리의 진정한 의도, 운명, 그리고 목적이 둘 다 표현된 모습이신 그에게 봉사하지 아니하고는 우리가누구인지 알지 못할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봉사"(diakanos)란 단어는 흠정역(King James)의 "직무"(minis-tration)나 NEB의 "처방"(dispensation)에 의해서는 애매해질 뿐이다(9절).

엘리야가 만일 엘리사가 그 떠남을 본다면, 그가 요구했던 것이 허락될 것이라고 엘리사에게 대답했을 때에, 능력의 전이는신적 의지로 남겨 놓게 될 것이라고 한다. 예수의 제자들에 의하여 오른편과 좌편에 앉게 해 달라는 요구의 기대였고, 그리고 이것은 그가 주는 것이 아니고 그가 마실 잔을 기꺼이 마시는 것과관련되어 있었다(막 10:38). 엘리야의 사역을 따른 자로서 엘리

사의 꾸준함은 엘리야의 능력을 받는 경우이다. 비슷하게 예수의길을 따른 자로서 제자들의 꾸준함이 그들의 능력을 부여받는 경우였다. 오늘날도 그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봉사를 행함이 우리의 영광의 경우이다(그의 은혜와 말씀이 그 원인이듯).
변형되신 예수의 진정한 의미를 붙잡지 못한 베드로는 모든 사건을 본 길로서 그것을 보려는 것보다는 그 사건을 기억하기 위하여 초막을 짓기를 원하고 있다. 베드로처럼 교회조직은 항상그 희망의 능력에 의해 사건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환상을 고착시키고 기억하려는 시험을 항상 받고 있다.

W.B.Yeats의 시집(New York:MacMillan, 1956), p.21

1.
Soren Kierkegaard, quotes in J.Baillie, A Diary ofReadings(London:Oxford University Press, 1955), p.34

1.
Quoted from John Baillie, A Diary of Readings(London:Oxfo-rd University Press, 1955), p.28

4.
The Hymnal(New York:Oxford University Press,1940).no.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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