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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풍성한 제물 (대상 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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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상 28장과 29장은 다윗 왕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그 필요성을 설명하고 전 국민의 참여를 당부했더니 모든 사람이 이 일을 기쁘게 여기고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기록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들이 하나님께 드렸던 물질의 양이나 질을 논할 필요는 없습니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태도이기 때문입니다.그들은 어떤 태도로 드렸습니까

1.즐겁게 드렸습니다.
29:6을 보면 “모든 족장과 모든 지파의 어른들과 천부장과 백부장과 왕의 사무 감독이 다 즐거이 드리되”라고 했고,14절을 보면 “즐거운 마음으로 드렸다”고 했습니다.두 구절을 요약하면 모든 사람이 다 참여했습니다.어른도 군인도 지도자도 모두가 참여했습니다.그리고 즐겁게 드렸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즐거웠을까요
드릴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쁘고 즐겁고 감사한 것입니다.
가령 한 손에 빈그릇을 든 채 줄을 서서 밥 얻어 먹는 차례를 기다린다면 기쁜게 뭐가 있겠습니까 줄 수 있다는 것,드릴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하고 즐거운 일입니다.그러나 그들이 즐거워한 것은 하나님께 드린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29장을 살펴보면 드렸노니,드리되,드리고,드림으로,드렸을 뿐,드렸사오며라는 표현이 거듭 여섯 차례 이상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사람에게 꾸어 주었다든지 베풀었다는 것이 아닙니다.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집트의 왕릉 석벽에는 이런 문구들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나는 신의 것을 도적질하지 않았노라」
「나는 신에게 신의 것을 드렸노라」
「나는 신에게 십분의 일을 드렸노라」….
이교도들도 자신들이 숭배하는 신에게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을 바친다는 행위를 최상과 최선으로 생각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지금은 자취를 감추었지만 한 때 중동지방에는「몰렉」신을 숭배하는 종교가 있었습니다.그들은 몰렉 신에게 자기 자식을 제물로 바친후 제단 앞에서 뛰고 춤추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다윗과 그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물질을 드리면서 즐거워 했습니다.이유는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2.성심으로 드렸습니다.
29:9을 보면 “저희가 성심으로 여호와께 즐거이 드림이며 다윗 왕도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심이란 최선을 다하여 드렸다는 것입니다.하나님께 드리는 행위는 분명히 눈에 보이는 행위입니다.드리는 사람의 얼굴도 드러나고 이름도 드러나고 액수도 드러납니다.
그러나 헌금은 드러나지 않는 부분이 더 중요합니다.드러나지 않는 부분이란 그 사람의 믿음과 정성과 마음입니다.그리고 그가 가진 소유의 분량이나 돈의 액수도 드러나지 않습니다.
돈 많은 사람이니까 헌금도 많이 하고 가난한 사람이니까 드리는 것도 적을 것이라는 이론은 기독교 이천년 역사동안 그리고 구약시대로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적용되어 본 일이 없습니다.
예를 들겠습니다.1백억의 재산을 가진 사람이 1억을 헌금했다면 그는 100분의 1을 헌금한 것이 됩니다.1억 재산을 가진 사람이 100만원을 헌금했다면 역시 100분의 1을 헌금한 셈이 됩니다.
1억과 백만원은 100분의 1의 차이가 납니다만,헌금의 원리로 보면 1억이 더 많은 헌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성심성의껏 드렸느냐,얼마나 준비했느냐,어떤 태도로 드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매일처럼 저희 교회 사무실을 찾는 단골 손님들이 있습니다.그리고 주일이면 상당히 많은 분들이 저희 교회에 손님으로 찾아오고 있습니다.그분들은 교회의 도움을 청하러 오는 걸인들입니다.
주일에 오는 이들을 비좁긴 하지만 식당에서 국밥도 만들어 대접하고 적은 돈이지만 나누어 주는데 봉투에 넣어서 줍니다.이유는 비록 얻어 먹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고자하는 뜻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마음의 태도와 성실성을 점검해 봅시다.주님이 그 예물을 받으시고 기분이 어떠하셨을까를 생각해 보십시다.
라면 한 그릇을 먹어도 대접하는 사람의 정성과 태도에 따라 꿀맛이 될 수도 있고,모래알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다윗과 그의 백성들은 정성을 다해 최선을 다하여,미리 준비된 예물을 드렸습니다.

3.정직한 마음으로 드렸습니다.
17절을 보면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 내가 아나이다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사오며”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인간의 행위가 크게 두 가지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는 불신입니다.불신은 하나님의 존재와 권위와 관계되신 행위이기 때문에 싫어하십니다.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그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가 바로 불신행위입니다.이스라엘 백성의 경우 불신하는 죄로 망했습니다.
둘은 부정직입니다.부정직은 하나님의 품성과 관계되어 있습니다.하나님은 진실하시고 거짓이 없으신 분입니다.그런데 하나님을 향하여 부정직과 비진실을 보이고 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에 결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요한계시록 21:27을 보면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고 들어오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거짓말하다가 죽었고,가롯 유다는 거짓의 앞잡이 노릇하다가 죽었습니다.
재주있고,능력있고,거짓말 잘 하는 사람보다는 무능하더라도 정직한 사람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는 정직해야 합니다.이유는 이미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17절을 보면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신다”고 했습니다.그 뜻은 우리네 속 마음을 다 아신다는 것이고 그래서 속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사람을 속이는 것은 가능합니다.자신의 부정직을 은폐하거나 위장할 수는 있습니다.그러나 그것도 그리 오랫동안 계속될 수는 없습니다.하물며 하나님을 누가 어떻게 속일 수 있단 말입니까
베드로후서 3:10을 보면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주님 앞에서는 감출 것도 없고 감출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오직 정직만이 통할 뿐입니다.다윗과 그의 백성들은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정직하게 드렸습니다.

4.풍성하게 드렸습니다.
29:21 끝을 보면 “풍성한 제물을 드리고”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풍성하게 드린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물질입니다. 그들이 드린 것은 금,은,철,동,나무, 보석, 화반석 등입니다.29:4을 보면 오빌의 금 삼천 달란트와 칠천 달란트의 천을 다윗이 드렸고 지도급 인사들은 금 오천 달란트와 금 다릭 일만과 은 일만 달란트 놋 일만 팔천 달란트,철은 십만 달란트 외에 보석도 드렸습니다.
둘째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다시 말하면 감사와 경배의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본문 21절을 보면 번제 제물로 수송아지 일천마리,수양 일천마리,어린양 일천마리 등 도합 삼천마리의 짐승으로 번제를 드렸습니다.그리고 22절을 보면 “그날 무리가 크게 기뻐하였다”고 했습니다.
신세 한탄이나 넋두리가 없었습니다.기쁨이 넘쳤고 제물은 풍성했습니다.참으로 멋지고 감동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경우를 놓고 생각해 봅시다.
받고 난 다음의 기쁨과 드리고 난 다음의 기쁨 중 어느 것이 더 클까요 드리는 기쁨이 클 때 그 믿음도 큰 믿음이 됩니다.6.25 전쟁이 끝나고 우리나라가 가난과 혼란 속에 빠져 있을 때 미국 교회 성도들이 정성을 다해 모은 구호품들을 보내 주었습니다.보내준 그들은 정성과 기쁨으로 보내 주었지만 그것을 받는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붉히고 받아야 했습니다.이유는 얻어 먹고 입는 것이 창피스러웠기 때문이고,서로 더 먹고 더 가져가기 위해 다투었기 때문입니다.그 때를 생각하면 오늘 우리는 너무나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주고 나서 기뻐하고 드리고 나서 감사하고 축제를 벌이는 사람이 됩시다.
그러면 왜 그들은 그토록 풍성한 제물을 드리면서 기뻐하고 즐거워 했을까요
첫째 모든 것이 다 주의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29:14을 보면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라고 했고 16절을 보면 “다 주의 손에서 왔사오니 다 주의 것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한 마디로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주님이 주신 주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린 여기서 다윗의 소유개념과 그 신앙을 발견하게 됩니다.그는 최고의 명예와 부를 누리는 국왕입니다.그러나 본래 국왕인 것은 아니었습니다.베들레헴 마을의 양치기 소년이었습니다.그런데 그가 국왕의 지위에 오르고 부자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그의 신앙이었습니다.
우선 어떻습니까
본래부터 부자,본래부터 회장,뱃속에서부터 박사,사장,전무였던 사람,손들어 보십시요!
바울은 고백했습니다.“나의 나된 것은 주의 은혜라”고.
둘째 모든 것이 주의 손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29:12을 보면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어느날 TV에서 손으로 차돌을 깨는 사람을 보았습니다.기의 힘을 이용한다고 했습니다.그러나 그 어떤 힘도 하나님의 손을 당할순 없습니다.그 손에 권세,능력이 있습니다.그리고 크게도,작게도,강하게도,약하게도,살게도,죽게도 하십니다.
다윗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서부 총잡이 세계의 불문율이 있습니다.그것은 손들고 있는 사람과 등돌리고 가는 사람을 향해 등뒤에서 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의 세계는 손을 들거나 말거나 돌아서서 가거나 말거나 상관없습니다.닥치는 대로 쏘고 덤비는 것이 사단의 세계입니다.
교인들의 신앙태도를 지켜보면서 놀라는 것이 있습니다.그것은 사람은 무서워하고 마귀는 두려워하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해 도리를 못 다하고 인사를 제대로 차리지 못한 것은 죄송해 하고 안절부절하면서 하나님께 대해선 철면피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찾아가고,눈치 살피고,눈 밖에 벗어나지 않기 위해 온갖 지혜를 다 짜내면서 하나님께 대해선 무관심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1년 동안 나를 지켜주고 보호해 주고 사랑과 정성을 기울여 주었다면 그 사람에게 나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만일 어떤 사람이 내 대신 죽음으로 내 목숨을 건져 주었다면 나는 그에게 어떤 사례를 해야 하겠습니까
만일 나에게 평생 못다 갚을 은혜를 베푼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가 누구입니까 내 주님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소홀히 취급하면 안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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