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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산 자와 죽은 자 (사 38: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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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남왕국 유다의 제13대 왕이었던 히스기야가 중병으로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자신의 병을 고쳐 주실 것을 기도한 내용의 일부입니다.
그의 병명은 자세히 나와 있지 않습니다만,그가 중병에 걸렸던 때는 대략 주전 701년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이 병들어 죽게 될 것이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듣고 난 후 바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이것은 평소 그가 기도의 능력과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는 하나님께 곧 바로 상달되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 년을 더하고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 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38:5-6)는 응답을 받게 되었습니다.
특히 우리는 본문에서 히스기야의 신앙과 그 고백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며 주관자이시며 구원자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는 기도가 되느냐에는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믿느냐가 중요하게 작용합니다.유한한 하나님으로 믿으면 기도도 응답도 제한받고 맙니다.그러나 무한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으면 응답도 제한받지 않게 됩니다.
히스기야의 기도 속에 나타난 신앙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사는 것과 생명이 주께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16절을 보면 “주여 사람의 사는 것이 이에 있고 내 심령의 생명도 온전히 거기 있사오니 원컨대 나를 치료하시며 나를 살려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사는 것도,생명도 주께 있사오니 나를 치료하시며 살려 주옵소서라는 기도는 생사(生死)와 치료와 생명이 주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창조 신앙에 근거합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하나님께서는 모든 것들을 창조하시고 그것들에게 생명을 주셨다고 했습니다.그리고 인간에게는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창조자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의미합니다.흙으로 빚은 무생명체 속에 하나님께서 생기를 넣어 주셔 생명체가 되었기 때문에,그 생명체는 만드신 하나님에 의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는 것이 히스기야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리고 보다더 중요한 것은 제아무리 튼튼한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생명을 거두시면 죽게 되고 제아무리 죽음 일보 앞에 서있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살리시면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히스기랴는 “나를 치료하시며 나를 살려 주옵소서”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0:28을 보면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살고 죽는 것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지(無知) 아니면 교만입니다.
누가복음 12:20을 보면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생명도,사는 것도 주께 있다는 신앙이 올바른 신앙입니다.

2.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고 고백했습니다.
17절을 보면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참으로 위대한 신앙입니다.
현재 내가 겪고 있는 고통만을 바라본다면 절망과 원망이 뒤엉키게 됩니다만,그러나 고통 뒤에 도사리고 있는 평안을 바라본다면 감사와 인내가 솟아나게 될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에게 임한 고통 뒤에 있는 하나님의 평안을 본 것입니다.
신앙의 선진들이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기뻐하고 감사한 이유는,그 후에 임하는 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의 경험입니다만,충치 때문에 잇몸이 붓고 아파서 밤새도록 잠을 설치면 고생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흔들거리는 이를 뽑으려면 치과에 가기보다는 실로 묶어서 잡아 뽑기 일쑤였습니다.그러나 상태가 심하면 치과에 가서 뽑곤 했습니다.
그런데 병원은 무서운 곳으로 어른들이 겁을 주곤 했기 때문에,쑤시고 아픈 이를 뽑기 위해 병원에 가는 것을 한사코 거절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가 쑤시고 아픈 것보다는 병원에 가는 것이 좋고 뽑을 때 아픈 것보다는 뽑고 난 후 건강한 것이 더 좋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만,그러나 순간의 고통이나 아픔 때문에 보다 나은 것을 거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도 마찬가지 이치라고 생각합니다.
고통 뒤에 더 큰 고통이 온다면 그것은 무가치한 고통입니다만,그러나 큰 고통 뒤에 큰 평안이 온다면 그 고통은 가치 있는 고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직면한 큰 고통은 두 가지였습니다.첫째는 숙적인 앗수르가 쳐들어 오는 것이었고,둘째는 자신이 중병에 걸린 것이었습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두 큰 고통을 평안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사야 38:3을 보면 15년을 더 살도록 해주겠다고 했고,38:6에서는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 내고 성을 보호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한 나라의 통치자로서 외적의 침략 때문에 국권과 영토가 유린되고 나라가 망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은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영화를 하루 아침에 포기하고 중병으로 죽어야 한다는 것보다 더 큰 고통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엄청나고 큰 고통을 하나님께서 평안으로 바꾸어 주셨다는 것이 히스기야의 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큰 고통을 평안으로 바꾸시는 분입니다.단 그렇게 믿는 사람에게만 말입니다.

3.모든 죄를 주의 등뒤에 던지셨다고 고백했습니다.
17하반절을 보면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던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뒤에 던지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롤린슨은 “우리의 모든 죄는 하나님의 얼굴 앞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부터 그 죄는 하나님의 등뒤로 던져졌다.죄는 더 이상 하나님의 눈앞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죄를 하나님의 등뒤로 던졌다는 것은 완전한 용서를 의미합니다.
이것을 시편 103:12에서는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라고 했고,이사야 44:22에서는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죄를 주의 등뒤에 던지셨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로,나의 등뒤가 아니고 하나님의 등뒤에 던지셨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일단 내가 하나님께 나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게 되면 그 죄는 그 시간부터 내 죄가 아니라는 사실을 설명해 줍니다.
둘째는,하나님만이 죄를 등뒤로 던지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죄란 내가 던져 버린다고 던져지는 것이 아닙니다.죄는 마치 찰거머리와 같아서 한 번 붙으면 좀처럼 떨어지지 않습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등뒤로 던지시는 사죄의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셋째는,하나님께서 등뒤로 던지신 그 죄를 다시 찾아다가 하나님의 얼굴 앞에 갖다 놓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죄를 사함받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다시 그 죄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신자가 되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그러나 보다더 중요한 것은 하루하루 신자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 번 신자가 되는 것은 쉽습니다만 날마다 신자가 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한번 주님을 만나는 것은 쉽지만 날마다 주님을 만나며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내 죄를 하나님의 등뒤로 던지셨다는 구속의 확신과 감격을 지니고 살때 감사하는 생활이 지속되는 것입니다.

4.산 자만이 주께 감사한다고 고백했습니다.
18-19절을 보면 “음부가 주께 사례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날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비가 그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영적으로 죽은 자는 찬양도 감사도 고백도 증거도 할 수가 없지만 산 자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육체는 살아 있으나 영혼은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
영혼은 살아 있으나 육체가 병든 사람도 있습니다.
이 두 사람 가운데 영혼이 살아 있는 사람이 진짜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나의 신앙이 살아 있는 신앙인가 아니면 죽은 신앙인가를 측정하려면 나의 삶 속에 감사와 찬양과 증거가 있는지의 여부를 확인하면 됩니다.
병원에 가면 눈을 들여다 보고 혓바닥을 들여다 보고 맥을 짚어 보고 그리고 청진기로 가슴을 짚어 봅니다.
이것은 진찰의 초보 단계입니다.그러나 그것은 진찰의 기본이기도 합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감사라든지 찬양이라든지 증거라든지 하는 것이 없으면 그 신앙은 병든 신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죽은 자나 구덩이에 들어간 자나 음부에 들어간 자는 주님을 찬양하거나 사례하거나 감사할 수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바꾸어서 말하면,살았다는 증거는 사례와 감사와 증거에 있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본문 20절에서 “우리가 종신토록 여호와의 전에서 수금으로 나의 노래를 노래하리로다”라고 하며 자신의 기도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죽은 자에겐 노래가 없습니다.죽은 자는 말도 없습니다.
어느 날 저는 연못 위에 떠 있는 물고기를 보았습니다.하얀 배를 드러낸 채 떠 있었습니다.눈도 그대로였고 지느러미도 그대로였고 비늘도 그대로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물고기와 다른 점이 있었는데,그것은 헤엄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물고기들은 지느러미를 날렵하게 움직이며 물 속을 시원스럽게 왔다갔다하는데.그 물고기는 그저 둥둥 떠 있었습니다.이유는 죽었기 때문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는 무엇으로 구분합니까 그것은 호흡과 활동으로 구분합니다.
산 신자와 죽은 신자는 무엇으로 구분합니까 그것은 그의 신앙생활을 통해 구분하게 됩니다.
제때에 일어나고 밥 먹고 일터로 나가고 자기 구실을 해내는 사람은 산 사람입니다.마찬가지로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생명을 그 안에 지닌 사람이며,그 생명력으로 일하고 쉬고 전진하는 사람입니다.
요한계시록 3:1을 보면,사데 교회는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책망받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후서 6:9에서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라고 했습니다.
실상은 죽은 자가 아니라 실상은 산 자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살고 열심이 살고 사랑이 살고 기도가 되살아나고 감사가 되살아나기를 바랍니다.
받은 바 은혜가 되살아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산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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