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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육체적 죽음과 부활 (겔 37:11-14 롬 08:6-11 요 11:1-4,17, 3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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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이번 주일의 주제는 육체적 죽음에 대한 성서적인 변화 의 개념을 중심하는 것이다. 그것은 부활절을 예기하는 듯하나 일차적으로는 이제 교회가 강조하기 시작하고 있는 십자가에 맞 는 것이다. 지난 주일에는 십자가 처형이 성공과 이 세상 영광 에 대한 기대를 역설적으로 대답하는 것으로서 예견되었다. 수 난주일에는 십자가가 죽음이 생명으로 바뀌어 지는 면에서 보여 진다.

 제 1주제:인간적 삶을 이루어 나가는 것은 남자와 여자가 함 께 행하도록 하나님이 맡겨주신 선물이다. 이를 행할 수 있는 바로 그 능력은 인간적 삶을 견지해 나가는 데 불가능하게 하는 점고하는 압력과 남용, 즉 생태학적 차원에서 생명을 파괴하는 생활 양식과 함께 제한된 차원에 대한 인구 폭발의 긴장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다. 죽음은 바로 성서적 종교가 분명히 받아들이 고 있는 하나의 사실로 나타나고 있다. 기독교는 죽음을 그 신 앙 가운데 취급함으로써 죽음을 수용하고 변화시키고 있다. 죽 음은 또한 능력과 관계와 미래의 희망이 결여되어 있음을 나타 내는 적절한 비유다. 에스겔이 관심을 가지는 것이 여기에 있 다.

생명이 떠나갈 때 뼈들이 마르게 된다. 뼈들 안에는 생명을 생성할 능력이 없으며 또한 환경도 생명을 회복시킬 수 없다.

제 1주제의 강조점은 개인적인 죽음에 있지 않고 한 민족과 국 가로서의 이스라엘의 해체(disintegration)에 있다. 회복은 하 나님의 말씀과 선제적인 행위(initiative)가 없이는 성취할 수 없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선지자에게 위탁되어 나타난다. 오직 하나님 만이 유형(exile)의 무덤을 열 수 있다(죽음은 진정한 의미에서--잘 아는 땅과 친숙한 길로부터의--유형이다. 그 리고 유형은 죽음이다). 오직 하나님 만이 죽은 자를 다시 살아 나게할 수 있고, 해골과 같은 죽은 자들의 희망에 살을 붙일 수 있으며, 그들 자신의 발로 서게 하고 움직일 수 있는 자유를 불 어 넣으실 수 있으며, 생명 안에서 가능하도록 할 수 있는 분이 시다. "나 여호와가 말씀하였고 행할 것이다". 그를 위하여 우 리는 말씀이 주어지기까지 그리고 성령에서 움직이기까지 기다 릴 수 있을 뿐이다.

 우리 시대의 많은 이들은 죽음이 마지막이고 무에로 나가는 길이며, 부활은 신화이고 소원 성취를 비는 기원이며 부활자체 가 죽은 환상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 음이 상실되어 있음을 보여주는데, 왜냐하면 새로운 생명이란 선물의 가능성을 믿는 것은 부활에 대한 신앙이 아니고 하나님 에 대한 신앙이기 때문이다--성서는 인간성이 어떤 모양으로 든 계속되고, 내재하는 신적인 불꽃(spark)이 계속되는 것으로 서 "불멸성"(immortality)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주석을 보 라) 새로운 창조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죽은자를 살리시

며, 원하기만하면 말라빠진 뼈들조차도 해결하실 수 있는 하나 님을 믿는 것이며, 신앙은 바로 하나님이 그렇게 행하기를 원하 면 그렇게 행해지는 것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적인 독립 성과 전재성과 은혜의 행위는 창조와 새 창조 안에 다같이 나타 나 있다. 새 창조는 옛 것을 새 영의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든다.

 제 2주제:하나님이 행하셨다는, 즉 새 창조가 있고 그새 창조 가 시작되었다는 이러한 개념은 바울이 여기에서 취급하고 있는 바를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개념은 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전 달되게 되어 있는 새로움과 해방과 즐거운 축제(예기에 의해서 만 가능한)와 같은 것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생명에 대한 새로 운 인식은 전혀 새로운 20세기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 그 때에야 비로소 시작할 곳을 찾은 것 이 아닌가 생각된다--소원하는 바 무엇으로서, 즉 받아들여야 하는 무엇으로 서가 아니라, 그것이 없이는 문명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어떻게 뼈들을 더욱 마르게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으 로서 말이다. 우리는 "육"(뼈들은 말랐고 우리에게 아무 것도 준 것이 없다), 즉 육체적 욕망의 만족을 구하는 육에 신세진 것이 하나도 없다. 그 육체적 욕망이 성례전적이 아닌 육체적인 행위에 의해서나, 아무리 유혹적으로 선전하는 상업적인 기술에 의해서나, 사람들을 조종함으로써 성공을 약속하는 것에 의해서 나, 여가를 늘리는 성과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든 관계없이 그러 하다. 그러한 것들은 본질적으로 새로운 생명에 창조적으로 기 여하지 못한다.

 가능해진 새로운 생명, 즉 그리스도인에게 이미 알려진(느낌 과 실제에 있어서 활발하지는 못하다 하더라도) 새로운 생명은 새로운 존재의 상태, 즉 본질적으로 우리의 세례를 실현한 상태 이다. 상징적으로 말해 우리는 거기에서 이미 죽어서 묻혔고, 살아나서 새로운 영을 부여받았다. "본래의 우리 자신이 되는 것"(성례전적으로)은 그것을 표현하는 한 가지 방법이나 상투적 인 냄새가 나고 오도할 가능성이 있다. 바울은 그것을 보다 낫 게 말하고 있는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새로운 관계다. 죽음은 관계의 상실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물질적 세계는 물론 사람들에게도 해 당되는 모든 응답의 정지, 또는 응답할 능력의 정지를 말한다.

탄식의 본질은 관계의 수단을 빼앗긴 것이다. 성령에 의해 인도 함을 받는 것은 (세례를 통해 우리 에게 보증된) 서로간의 상관 성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으며, 진실로 그것이 이미 주어진 관계 속으로 능동적으로 들어감으로써 분명히 드러나게 되고, 하나님 과 사람들에 대한 관계가 실현되게 된다. 성령은 관계라고 말하 는 것이 틀리다고는 못하리라.

 이 마지막 말( 관계)을 나타내기 위하여 바울이 사용한 말 이외에 어던 용어가 쓰일 수 있을까 "핵가족"(nuclear family) 이 가지는 분열성(disintegration)과 심지어 가족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성격(denigration)은 그러한 용어가 어떤 "아들들"(그 리고 딸들)에게는 모호한 것이 되게 한다. 낳고 생명이 주어진 자녀들 이상의 무엇이 세상에 들어왔다 __그것은 물론 모든 인 간에게 사실이다. "아들됨"(sonship)은 보다 중요한 것을 암시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아들됨을 함께 소유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성년이 되어"(come of age), 우리가 물려받은 지점에 도달한 것이다. 비록 물려받은 유산의 측량할 수 없는 부요함을 온전히 즐기는 일은 앞에 놓여 있어도,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상속자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에베소서에 있는 "풍

성"(riches)의 정도에 대한 배경과 반복되는 강조로서 가라디아 3:23-4:7에 있는 바울의 말을 필요로한다. 생명이란 측면에서 마하면 우리의 육체의 죽어가는 몸의 바로 핵심부에 이미 생겨 나고 사망을 이기는 생명과 힘을 얻어가고 있는 새로운 몸(말하 자면)이 존재하고 있다. 만약 부활이 예상되는 것이면 사망도 그러하다. 몸이 죽기 전인 바로 지금에도 우리가 죽을 수 있는 많은 죽음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진보는 우리가 "죽을 " (반응을 정지할)필요가 있는 반복되는 삶의 새로운 영역의 개발 로서 표현될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살아갈"(거기 에 열렬히 반응할)수 있고 사망의 지배를 받지 않는 열려진 새 로운 영역을 발견하게 된다.

 아들과 딸, 즉 후사로서의 우리의 위치를 의식하는 것은 성령 을 아는 것이며, 그 반대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우 리는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한 목소리로 가족어인 "아버지"란 말 을 하게 된다. 따라서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호 소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교제의 주요 특징이고, 미리 맛보는 생명의(life-ahead)암시이며, 공유하고 있는 기대에 대한 실재 일 뿐 아니라 측량할 수 없는 정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가 축하하려고 모이는 것은 이것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나가서 다 른 사람에게 그것을 전한다. 바울이 본 대로 그것은 바로 이러 한 관련성 안에서 성과 문화와 심지어 "종교"의 모든 오랫동안 지치게 만든 장벽들을 초월한다(갈 3:28).

 그것이 하나의 속박에서 다른 속박으로 탈출하는 것으로나 기 계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하나의 율법으로부터 다른 법으로 탈출 하는 것으로서 생각한다면 그것을 완전히 오해하는 것이다. 그 것은 자유의 개념으로 말해서 노예와 상속자(heir) 사이에 있는 모든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우리의 문화에서는 (분명히) 노예 를 소유하지 않고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방면에서, 즉 규격 화된 삶 때문에, 책략에 대한 그럴 듯한 의존 때문에, 권력의 집중에 의한 제한된 기회 때문에, 그리고 산업지역 및 도시 밀 집 때문에 우리는 새로이 인식되고 있는 심리학적 속박 형태는 거론하지 않더라도 속박 상태에 있는 것 아닌가 다른 어떤 속 박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우리의 새로운 관계가 가지는 본 질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새로운 생활, 즉 그리스도 안에서 성 숙한 생활은 가장 지고하고 심원한 의미에서의 자유인데, 다른 모든 자유들은 그것들이 자치적인 생활 속에 있는 것이라 하더 라도 지고하고 심원한 이미에서의 자유에 대해서는 단지 그림자 요 연습일 뿐이다.

 성령은 동기를 부여하는 힘으로서 생명의 관계에 이끌어 주기 때문에 세례시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주석을 보라)이 우리를 진 실로 살아 있는 사람들, 즉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 니하는 것으로서 너희를 위해 하늘에 간직하신...."(벧전 1:4, 새로 세례 받은 사람들에게 주는 말씀임)기업 (inheritance)이 있는 아들과 딸이 되게 하신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어떠한 종류의 고난도 저울(balance)에서 무게를 점점 덜 차지하게 된 다. 그것을 생명을 경험하는 것으로 취급하며 패배한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그러했던 것처럼) 보지 않는 것은 미래의 영광에 대한 저당(pledge)이며 "할부"(down-payment)__ 어떤 거래의 요 소도 없이--를 의미한다. 죽음은 여전히 실재이나 위새를 잃고 폭군적인 힘이 빼앗겼으며, 하인처럼 되어 생명으로 들어가게 하는 수단이 되었다.

 복음서 주제:에스겔의 본문이 전적인 의미에서 부활을 언급한 것이 아니듯이 (현재적)생명에로 회복된 나사로의 이야기도 그 렇게 취급되어서는 안 되고, 잘못된 의미에서 "표적"(sign)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오해되어서도 안 된다. 사실상 오직 하나의 "표적"만이 복음서를 지배하고 있다. 왜냐하면 제 4 복음서의 그리스도의 영광을 진정으로 나타내는 것은 십자가 위에서 죽은 예수의 죽으심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용어가 변화되고 있다.

예수의 "들려 올림"(십자가 위로)은 사실상("바로 그 진리 안에 서")우주 가운데 예수의 궁극적인 능력과 영광의 자리로 "들려 올라감"(lifting up)이 되고 있다. 나사로를 "일으키는" 것은 모든 주장에 쐐기를 박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인 위협으로서 드 러나고 또 예수의 체포와 죽음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복음서의 짧은 형태를 주목하라, 45-47-53절.)

긴 이야기의 형태는 설명이 필요하다. 처음부터 거기에는 기 적 이야기의 표준적인 틀 안에서 죽음의 문제와 씨름하고 있다.

여기 요한의 틀 안에는 죽음이 인간이 알고 있으며 그 충격을 경험하는 것으로서 제시되어 있다. 거기에는 따뜻하고 친밀한 관계가 일시적인 병으로 위협받는 것으로 나타나 있고, 그것을 "인자"의 영광 받으시는 수단으로서 예수께서 재평가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마지막 귀절은 역사적 수난에 관련되고 있다. 예수 에게는 유대로 돌아간다는 것이 제자들이 느낀 대로 그의 죽음 을 의미한다. 도마는 누구보다도 그것을 직감하고 다른 제자들 에게 예수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하자고 요청한다. 모든 것은 마 지막 부분에 가서 불가피하게 나타난다. 여기에서의 문제는 생 명에 기여하는 것으로서 (말하자면) 죽음에 강조를 두는 것이 다. 죽음에 매어 있는 분은 바로 예수이시다. 그 문제는 나사로 가 일시적인 생명을 되찾게 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고 예수께 서 직접 죽음에 들어가서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심으로써 해결 된다. 요한의 "시간", 즉 계시의 순간은 나사로가 무덤으로부터 나오는 때에 점화되지 않으나 예수께서 십자가를 향해서 나아갈 때 비로소 점화되고 있다(12:27-28).

 마르다는 여기에서 죽음과 잃음과 슬픔의 흔히 있는 공통의 문제를 진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녀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궁극적인 부활에 대한 일반적인 신앙이 가지는 무능을 훌 륭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마르다가 "마지막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요 11:24)라고 말한 것은 실재의 문제가 놓여져 있는 현재를 견디어 내어 궁극적인 해결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종교적인 상투어를 포함한 모든 위로를 거절하는 사랑하 는 사람을 잃은 자의 절망을 표현한 말이다. 이것은 일련의 표 적 중 마지막 표적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나 말씀"(I am)선언 의 하나를 구체화시킨다. 예수는 궁극적 실재를 현재에 가지고 왔다. 죽음에 대한 유일한 대답인 새로운 생명의 관계를 예기하 는 것은 바로 예수와의 관계를 의미하는데, 왜냐하면 그는 인간 으로서의 출생을 "거부하지도"(spurn)않았으며 인간으로서의 죽 음을 "걷어차려고도"(spurn)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일이 없이 그리고 그렇게 인간성을 마침이 없이, 우리의 운명을 함께 나누며 우리와 온전히 하나가 되려는 것은 허무맹랑한 것이 되 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르다가 시작하는 곳에서 마리아 역시 끝나고 있다.

사실상 쉬운(혹은 "값싼") 위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각적인 문제들과만 관계하는, 즉 일시적 해결 만을 가져오는 "기적"은 하나님의 구속의 실재를 표현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마르다와 마리아와 함께 우리는 여전히 십자가 편에 서 있다. 그들의 문

제에 대한 해결은 하나님의 계시 안에서 모든 사람들에 대한 문 제의 해결이 없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아 왔으며, 공통의 인간 운명인 슬픔을 함께 나누었으며, 우리 자신의 불가피한 죽음이 가지는 (알빈 토플러의 용어를 사용한다면) "미래의 충격"과 그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부과할 상실을 경험하고 있으나--예수 가 죽는 것을 아직 보지 못하였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살아계 신 주님의 부활 경험은 결정적인 사실이며 바로 이 이야기의 주 제이다. 생명의 관계(the relationship-in-ilfe)는--일시적이 기는 하지만--마리아와 마르다와 나사로의 가정에 회복되었 다. 실재에 있어 나사로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의 드라마를 그들 과 함께 나누게 되도록 회복되었을 뿐이라고 말할수 있다! 예수 는 그의 말씀이 40-42 상반절까지) 그 당시 개인적으로 관여되 지 않았던 무리를 믿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였다.

 인간이 사건에 참여하는 것으로서의 "역사" 는 예수의 뜻이 실현되려면 움직여야만 한다는 것이 바로 복음의 역설이다. "왜 냐하면 모든 사람이" 결론 부분(따로 취급할 수도 있을 것이나 나머지 부분을 가정하고 있다)에 대한 뒤섞인 단서가 되기 때문 이다. 공회의 결의에 의해 보증된 대제사장 의 판단은 모든 백 성이 "멸망하는"--것은, 즉 한 민족으로서의 땅과 희망과 실체 를 잃은, 다시 말해 사실상 집단적으로 죽는(에스겔에 관한 앞 의 주석을 보라) 것을 의미한다--것 보다 오히려 한 사람이 죽 는 것(부당하게 죽는다 하더라도)이 낫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 상의 "편의 위주"(expediency)의 생각이며, "육"이 위급할 때 발휘하는 지혜이다. 이러한 십자가와 부활의(우리의) 측면에서, 대제사장의 판단을, 예수의 죽음이 백성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자녀를 구속하기 위해서 기여할 것이라는 예언으로 변형시 켜 쓰고 있는 사람은 바로 요한 복음서 기자이다. 예수께서 고 난("죽기까지,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빌 2:8)을 기꺼이 받아 들인 것은 정말 우리가 고난에 관해 알 수 있는 모든 것이다--그래서 예수의 믿음은 확증되었고 하나님은 어찌해서든지 고난 을 그의 사랑과 구속의 목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죽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서, 하나님은 죽음을 그의 목적에 사용하실 수 있고 또 사용하셨으며, 진실로 자신의 경험 이 되게 했으며 그것에 의해 패배당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미에 서 생명인 그 생명에의 입구가 되게 하셨다.

 어떤 일시적인 완화제나 어떤 연기(postponement)나 어떤 하 나님의 뜻에 대한 상투적인 말이나 기다려 보자는 구실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며, 다만 한번 태어나시고 한번 죽으신 실재로서의 그리스도의 현재적 경험 만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실재(reality)는 생명과 죽음의 분리를 초월하며, 성령에 의해 생명을 부여받은 하나님의 모든 아들 딸들이 이미 그들의 기업 인 생명, 즉 생명을 미리 맛본 영원한 관계 안에서 생명과 죽음 의 분리를 괄호 안에 넣어 버리도록 해준다.

 이렇게 우리는 인간이 되시는(human-beingness) 하나님의 아 들의 경험으로서 마지막 극한인 십자가 __인간성 자체를 부정하 고 비틀고 무시하는--가까이 나아오도록 초대를 받았다. 십자 가에 의해서 예수는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할 수 없는 자"이며, "그 자신이 고난을 받고 시험을 받은 자"라는 것이 확 증되었으며, "한본성( 혈육)에 참예하심"으로써 "사망의 세력 을 잡은 자를 사망으로 말미암아 없이하시며"또 "죽기를 무서워 하므로 일생동안 종노릇하는 데 매어 있는 "우리를 해방시키고 자 하셨다(히 4:15, 2:14-15 등을 보라). 왜냐하면 죽음이 가진 "분리시키려는" 위협은 자유에 대한 근본적이고 마지막 대적이 기 때문이며, 우리가 일련의 사순절 주제를 통하여 여러 방면에 서 관찰한 대로 죽음은 구원의 본질인 자유에로 해방되는 것이 며, 그것은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서, 그리고 우리가 아버지의 사랑을 상속하였다고 주장하게 되는 성령의 공동체 안 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누리는 자유에로 해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참된 성례전적 경험으로서의 수난절과 부활절이 가지는 "기념"과 "기대"에로 보다 온전하게 들어갈 준 비가 되어 있음으로 하여, 설교자는 역설적으로 "하나님께 그 형언할 수 없는 선물을 인하여 감사하리로다" 라고 탄성을 지 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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