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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버지께서 주신 잔 (요 18: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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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 주신 잔
이제 한 3주 후에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고난 주간이 다가옵니다. 고난 주간을 앞두고 우리가 요한 복음 18장 이하의 말씀을 읽으면서 함께 은혜 받을 수 있게 된 것을 저는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다락방에서 제자들을 앞에 놓고 마지막 기도를 해 주신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어두운 밤하늘을 환하게 밝히는 달빛을 밟아가며 예수님과 제자들은 성벽을 따라 나 있는 기드론 시내로 내려가는 비탈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기드론 시내는 예루살렘과 감람산 사이를 가로지르는 조그마한 개천입니다. 저도 가 보았지만, 아주 볼품없는 작은 골짜기입니다. 2천 년 전에는 그 모습이 달랐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개천이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개천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으로 내려가셔서 서편 비탈에 자리 잡고 있는 겟세마네 동산이라고 하는 곳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요한은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만 누가는 예수님께서 낮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시다가 저녁이면 자주 오셔서 쉬기도 하시고 기도하신 곳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신 데는 매우 상징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그 날이 유월절을 불과 하루 앞둔, 유월절 양 잡는 날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아니 세계 각지에서 수십 만도 더 되는 수많은 사람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와서 불과 몇 시간 전에 그 성전 마당에서 어린양을 끌고 와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자신의 죄와 나라의 죄를 어린양에게 짊어지우고는 성전의 단 위에서 그 양을 잡아 피를 흘려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는 어마어마한 행사입니다.
어떤 기록에 보면 한번에 256,000 마리의 양이 희생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로 정확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대단한 숫자의 양을 잡았다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양을 잡아서 흘리는 피는 하수구를 통해 곧 바로 기드론 시내로 흘러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기드론 시내를 건널 때쯤에는 아마 달빛에 검붉은 피가 섞인 물이 흘러 내려가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제 날이 새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될 것이고, 그가 흘리신 의로운 피가 짐승의 피를 대신해서 기드론 시내로 흘러 내려 갈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영원하고 온전한 제사를 드리심으로 짐승을 가지고 드리던 불완전한 제사를 완전히 끝내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와 같은 대 역사를 불과 몇 시간 앞두고 지금 기드론 시내를 건너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의 고난의 길에 발을 들여놓으셨습니다. 그 길은 너무나 무섭고 고통스러운 슬픔의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걸어가는 그 길을, 자기가 당해야 되는 그 고난을 일컬어 '잔'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1절 중간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십자가의 길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잔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실 때 예수님에게 몇 가지를 명령하셨습니다.
먼저, 육신의 몸을 입고, 종의 모습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와 똑같은 몸을 입고 말구유에 태어나서 육신을 입고 사는 사람이 당하는 모든 고통과 슬픔을 맛보셨습니다.
둘째는, 3년 동안 사방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병든 자에게 고침을 주고, 눌린 자에게 자유 함을 주는 복음을 전하신 것입니다. 그 3년이 거의 끝났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중요한 일은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십자가의 마지막 죽음을 일컬어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 '잔'은 주로 '고난의 잔'이나 '슬픔의 잔', '저주의 잔'을 상징합니다. 예레미야 애가 3장 1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쑥 물이 얼마나 쓴 지 여러분이 아시지 않습니까 쓸개 탄 술이 얼마나 쓴지도 여러분이 잘 아시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과 슬픔, 이것을 일컬어서 쑥물이요 쓸개 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쑥물과 쓸개 물을 담은 잔은 다름 아닌 고통의 잔이요, 저주의 잔이요, 슬픔의 잔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하나님께서 주신 이와 같은 잔으로 보고 계셨습니다.
이와 같이 어려운 일을 목전에 두고 계셨기 때문에 주님은 이 잔을 마시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꼭 해야 될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였습니다. 이 잔은 기도로 준비하지 아니하면 도무지 마실 수 없는 잔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들어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본문의 2절과 3절 사이에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가 있는데, 요한은 이 기도를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 누가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어떻게 기도하셨는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누가 복음 22장 42절 이하를 보십시오. 예수님은 세 번이나 엎드려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 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 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얼마나 힘쓰고 애써 간절히 기도하셨으면 땀방울에 피가 섞여 나오겠습니까 얼마나 그 속이 탔으면, 얼마나 진액을 쏟아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으면 그렇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지금까지 기도해 보았지만 이처럼 땀방울이 피가 되도록 힘쓰고 애써 기도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의 잔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으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쓴잔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도움이 임할 때까지 땀이 피가 되도록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겟세마네'라는 말은 원래 '기름틀'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아마도 그곳에 감람 유를 짜는 기름 집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기도하시던 그 동산을 '겟세마네 동산'이라고 불렀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모습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마치 기름틀 속에 들어간 올리브 열매가 으깨지는 것 같은 것은 느낌을 받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고난의 잔이요, 저주의 잔이요 심판의 잔인 십자가의 잔을 마시려고 기름 틀 위에 올려진 올리브 열매처럼 그 몸이 으깨어지도록 하나 님 앞에 부르짖는 모습을 우리가 보는 것입니다.

기꺼이 마시셨다
예수님께서 처하신 이러한 정황을 제가 하나하나 검토하며 읽는 가운데 성령께서 제 마음에 몇 가지 은혜를 주셨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내용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내용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감사하게도 제가 예수님께서 수난의 잔을 마시는 모습을 좀더 실감하고, 새롭게 느끼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도록 하기 위해 성령께서는 제 마음에 세 가지 단어를 주셨습니다.
첫째는, '기꺼이'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잔을 '기꺼이' 마시셨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홀로'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잔을 '홀로' 마시셨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억울함에도'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잔을 '억울함에도' 마시셨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기꺼이'와 '홀로'와 '억울함에도' 이 세 단어를 중심으로 우리가 본문을 좀더 검토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자신이 마셔야 할 잔을 '기꺼이', 다시 말해 기쁜 마음으로 자원해서 마시셨습니다. 주님은 이미 가룟 유다가 자기를 배신하고 대제사장과 함께 자기를 잡기 위해 꾸민 흉계를 행동에 옮기고 있다는 것을 훤히 내다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오래 전부터 가룟 유다가 그런 일을 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만일 이 죽음을 피하기를 원했다면 예수님은 절대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가룟 유다가 뻔히 알고 있는 그곳으로 가셨겠습니까 그럼에도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십자가를 질 모든 준비를 하고서 가룟 유다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드디어 가룟 유다가 군인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철면피 같은 얼굴을 하고서 "랍비여, 안녕하시옵나이까"하면서 예수님에게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 때 주님은 출 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친구여, 네 할 일을 해라. 네가 입맞춤으로 나를 파느냐"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가룟 유다를 옆으로 재끼고 앞으로 나서서 자기를 잡으러 온 군인들을 향해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요18:4) 아무리 보름달이 환히 비치는 밤이라고 할지라도 잎사귀가 짙은 올리브 나무가 가리고 있는 그늘에서는 누가 누구인지 금방 분별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자기 몸을 숨기시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앞에 나서서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이 "나사렛 예수를 찾습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한 마디로 잘라 말씀했습니다. "내로라." 그러자 그 말을 들은 군병들은 얼떨결에 뒷걸음을 치다가 땅 바닥에 그만 주저앉아 엎드렸습니다.
이것은 참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들이 쓰러졌을까요 무엇 때문에 그들이 엎드러져서 일어나지를 못했을까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범하게 나올 줄을 미처 예상을 못했기 때문에 충격을 받은 것일까요 물론 그런 면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내로라."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이 그 악한 사람들의 마음에 비쳤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내로라."하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여호와"로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뜻이 무엇입니까 'I AM' 곧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내로라."하시는 예수님의 말씀도 "I AM He."입니다. 여기서 'I am'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 시간에 이미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신 것을 그 말속에 담아 증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악한 자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환하게 비쳤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굴복하지 않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다를 잔잔케 하신 권세, 죽은 자를 살리신 권세, 이 땅의 어두운 권세를 몰아 내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 권세를 누추한 옷 속에, 사람들에게 별로 매력을 주지 못하는 모습 속에 감추고 계셨지만 그 영광이나 권세가 조금이라도 드러나기만 한다면 어떤 인간도 그 앞에 뻣뻣하게 서서 대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비록 달빛이 희미하게 비치고, 윤곽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내로라." 하시는 그 모습 속에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이 분명히 드러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악한 원수들도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피하기를 원하셨다면, "내로라."라는 한 마디에 쓰러지는 그런 사람들을 처리 못했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늘에 있는 12군단이나 더 되는 천사들을 불러서 그 원수들을 쫓아 버리지 못했겠습니까(마26:53) 마음만 먹었다면 그 죽음을 피할 수가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다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영광과 권세를 사용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자기가 불러 올 수 있는 천사도 동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죽음이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의 가슴이 너무 뜨거웠기 때문에 우리를 살리고자 우리를 살리고자 주님은 기꺼이 그 잔을 마시기로 결정하셨던 것입니다.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체포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죽인 사람이 누구입니까 가룟 유다입니까 아니면 빌라도입니까 아니면 대제사장입니까 물론 정황으로 봐서는 그들이지요. 그러나 엄밀하게 따지고 들어가면 예수님을 체포한 사람은 다름 아닌 예수님 자신이셨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자도 예수님 자신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기꺼이 자기 생명을 내어놓고 우리를 구원하려고 작정하셨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를 던져서 그들의 손에 잡히셨고, 십자가에 죽으셨던 것입니다.
집에 가셔서 마지막 한 열흘 동안 예수님께서 행하신 행동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하나님의 타이밍에 맞추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단축시킬 수 있는 굉장히 위험한 행동을 과감하게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어린양을 끌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야 하는 날이 따로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날에 맞추어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하고 주님을 환영했습니다. 이것은 자기의 죽음을 부르는 아주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서 유월절을 맞아서 큰 대목을 만난 것처럼 장사하는 사람들을 전부 쫓아냈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대제사장의 돈줄이었는데, 그 돈줄을 대고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쫓아냈으니 얼마나 위험한 행동입니까 아닌게 아니라 이 때부터 대제사장들은 모여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구체적으로 협의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조금 후에는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자 악한 종교 지도자들의 의지가 더욱 굳어졌습니다. 그리하여 결과 적으로 이 일 때문에 예수님은 결정적으로 죽음의 덫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위험한 행동을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꺼이 자기 생명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놓기 위해서였습니다. 요한 복음 10장 11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주님은 목숨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버리는 것입니다. 또 18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를(내 목숨을)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자기 생명을 내 놓으셨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저주와 심판의 잔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기꺼이 다 마시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말씀을 읽으면서 이런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억지로 마시는 것이 아니야. 너를 위해 기꺼이 마시는 거야. 너를 살리기 위해서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나는 마시기를 원해." 저 뿐만 아니라 여러분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들어보십시오. 주님의 이러한 음성이 들리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러분 가운데 어둠의 권세에 귀를 빼앗겨서 이런 말씀을 들어도 전혀 남의 말처럼 들리는 그런 분이 있습니까 성령께서 여러분의 어두운 귀와 캄캄한 심령을 밝혀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저주와 우리의 심판을 홀로 당하기 위해서 주님은 기꺼이 자기 생명을 내어놓으셨습니다. "내가 너를 살리기 위해 이 잔을 기꺼이 마시노라."하시는 그 주님의 음성을 여러분이 들으시기 바랍니다.

홀로 마시셨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혼자서' 그 잔을 마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구원자로 지명하여 보내신 분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말고는 이 세상의 죄를 다 씻어 내기 위해서 피 흘릴 수 있는 다른 자격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죄를 담당할 수 있는 어린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일컬어 하나님의 '독생자'(獨生子)라고 말씀했습니다(요3:16). 독생자, 곧 외아들은 둘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의 잔이요 심판의 잔인 십자가의 잔을 마실 수 있습니다. 그 잔은 아무도 나누어 마실 수 없는 잔인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잔을 자기도 나누어 마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22장 3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가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대뜸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쉽게 말해서 "그래도 내가 제자 중에 대표가 되는 사람인데 어떻게 예수님 혼자 그 잔을 마시도록 내버려두겠습니까 나도 따라가겠습니다. 주님이 마시는 그 잔을 저도 같이 마시겠습니다." 하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자기도 그 잔을 나누어 마실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군병들의 손에 붙잡히는 어려운 위기를 만나자 베드로는 자기도 모르게 칼을 뽑아 들고 함부로 휘둘렀습니다. 그는 칼을 쓰는 훈련이 전혀 안 되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전문적인 칼잡이였다면 목을 잘랐을 테지만 그는 칼을 휘둘러 귀만 자르고 말았습니다. 칼을 잘 쓰지도 못하면서 그가 이렇게 서툰 짓을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혼자 잡혀가도록 내버려두어서 되겠는가 내가 여기서 뭔가 한 몫을 해야 되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에 충동적으로 칼을 휘둘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모습을 보시고 나무라셨습니다. "칼을 집에 꽂으라.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어찌 마시지 않겠느냐" 그리고는 순순히 군병들의 손에 잡히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제자들은 전부 도망을 갔습니다. 베드로도 도망을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래도 양심상 그대로 도망갈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는 몰라도 나만이라도 주님 곁에 있어야 되지 않는가 의리상 어떻게 이렇게 도망갈 수 있겠는가'하는 생각에 다시금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리고는 체포되어 안나스 라는 면직 당한 대제사장 집에 끌려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멀찌감치 따라갔습니다.
어떻게 연줄이 닿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마당에까지 들어갔습니다. 바로 옆에서는 예수님께서 심문을 당하시는 모습이 보이고, 예수님을 심문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마당에는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습니다. 그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그 모닥불 옆에 앉아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자인지 남자인지는 모르지만 어떤 종 하나가 와서 베드로의 얼굴을 찬찬히 보더니 이렇게 다그치는 것이었습니다. "아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본 얼굴인데. 자네 나사렛 예수의 제자가 아닌가"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그는 아니라고 부인을 했습니다. 이상하게 그는 세 번이나 똑 같은 추궁을 받았습니다. 마지막에는 얼마나 급했던지 맹세하고 저주하면서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베드로의 그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가 무슨 말을 했을까요
"내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하면서 맹세를 했습니다. 그리고 "빌어먹을. 내 손에 장을 지진다."하면서 저주하기까지 했습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모습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잔은 아무도 나누어 마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가슴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주님의 잔을 함께 마시겠다는 의도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위험도 무릅쓰고 예수님이 당하는 옆자리까지 갔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잔을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만이 마시는 잔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는 하나님마저도 그 얼굴을 돌리시고 말았습니다. 그 잔은 하나님 자신도 마시지 않는, 오직 예수님만이 마시는 저주의 잔이요, 심판의 잔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성가대에서 참 좋은 찬양을 불렀습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만이 홀로 우리의 죽음의 잔을 대신 마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오늘도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 잔은 나 혼자 마셔야 해. 네가 거들려고 해도 안돼. 너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면 나는 이 잔을 혼자 마시는 것으로 만족해." 주님께서 여러분에게도 이 음성을 주실 줄 믿습니다.

억울함에도 마시셨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억울함에도' 그 잔을 마시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밤중에 안나스 라고 하는 대제사장 집으로 끌려가셨습니다. 안나스는 정말로 악질적인 인간입니다. 우리 나라로 말하면 매국노나 다름없는 사람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나라는 로마 제국의 속국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을 등에 업고 로마 제국에 아부를 해서 대제사장 자리를 얻어냈습니다. 그는 9년을 대제사장 행세를 하면서 자기 아들 넷도 대제사장으로 만들고, 자기 사위도 대제사장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를 하게 해주고는 그 모든 이윤을 빼돌려 축재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황제의 눈밖에 났는지 면직을 당했습니다. 지금은 그의 사위 되는 가야바가 대제사장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안나스는 자신이 면직 된 대제사장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체포해서는 자기 집으로 끌고 오게 했습니다. 그렇게 할 권리도 없는 사람이, 그것도 밤중에 어떤 사람을 체포하고 심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비공식 청문회요, 유대 나라 법에 의하면 불법입니다. 그 자체가 불법적인 청문회니 일이 잘 될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청문회의 불법성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신지라 묵비권을 행사하셨습니다. 한 말씀도 안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안나스는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을 자기 사위 되는 현직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호송시켰습니다.
예수님이 끌려오시자 아직 새벽녘이지만 가야바는 산헤드린 공의회를 정식으로 소집했습니다. 이것은 합법적인 재판석입니다. 71명의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서 이 재판을 주관하게 됩니다. 날짜도 정확하게 주후 30년 4월 5일, 그 때가 보름이었습니다. 드디어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때는 아직 날이 밝지 않은 새벽녘이었습니다. 유대 나라에는 탈무드라고 하는 훌륭한 법전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로는 세계에서 가장 재판 절차가 잘 되어 있는 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법전에는 인권을 전적으로 존중하는 정 신이 그 밑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처럼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고 하는 긍휼이 그 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이 법전에 의하면 재판을 열어도 해가 뜨고 나서 열어야 되고, 재판은 해가 지고 나서는 다시 속개가 되면 안되고 연장하면 안됩니다. 반드시 해가 뜨고 해가 지는 낮 시간에 재판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어두운 밤의 재판은 공정하다고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심문하기 위해 새벽녘에 소집한 이 재판은 불법 재판이었습니다.
더욱이 유대 나라에서는 혐의자를 기소하느냐, 형을 주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증인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증인 두 사람만 정확하게 나오면 그 혐의자는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두 사람이 와서 "이 사람이 도둑 질 하는 것을 우리가 봤습니다. 예, 얼굴도 똑같습니다. 맞습니다. 옷도 검은 옷이요. 신발은 저런 샌들을 신었습니다. 맞습니다. 음성도 똑같아요."하고 정확하게 일치된 증거를 되면 그는 기소되고 형을 받게 됩니다. 이만큼 증인이 재판 결과를 좌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재판할 때는 많은 거짓 증인들이 동원되었습니다. 그들은 이 사람은 이 말하고, 저 사람은 저 말하면서 야단법석을 떨었지만 어느 한 사람도 신빙성 있는 증언을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증인으로 나와서 제법 그럴 듯한 증거를 내 놓았습니다. "우리는 이 자가 '예루살렘 성전을 헐어라. 40년 동안 지은 이 성전 헐어라. 나는 3일만에 짓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성전을 모독하는 죄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 두 사람의 증거가 상당히 괜찮은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 보면 이 두 사람의 증언조차도 서로 일치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분위기 전체가 예수님의 무혐의로 기울어 가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낭패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만일 이 사건을 바로 처리하지 못하면 자기의 입지가 대단히 어려워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그의 마음을 압박해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면 돌파를 시도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63절에 보면, 그는 예수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재판장이 유도 심문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맹세하고, 네 양심상 대답하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렇다면 똑똑히 네 입으로 대답하라."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재판이든지 혐의를 받고 있는 당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가지고는 재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증거가 있어야지요. 억지 증거를 만들려고 유도 심문을 하는 것은 파렴치하기 짝이 없는 행동입니다. 이것은 마치 살인 혐의를 받고 있는 피고를 앞에 놓고 '저 놈이 죽였다.'는 심증은 가는데 증거가 없을 때 하다 하다 안 되니까 이렇게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피고, 나는 자네가 사람을 죽였다고 생각하네. 그러나 도무지 증거를 찾을 수가 없어. 그렇다고 너를 석방할 마음도 없어. 그러니까 내가 부탁하는데, 내 앞에서 네가 죽였다고 양심 선언 할 수 없나 나의 입장을 생각해서 양심 선언 좀 해 줘." 이런 재판이 있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바로 이와 같은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받으신 그 질문은 진리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대답을 함으로 자기가 어떻게 될 것을 뻔히 하시면서도 대답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64절을 보십시오.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예수님은 세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너희가 나를 죽일 터이지만 나는 부활해서 하나님 우편에 앉을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때가 되면 내가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서 재림할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시자 대제사장은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하냐"면서 옷을 찢고 법석을 떨면서 사형을 언도했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집단 폭행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인권을 짓밟는 불법 재판이 어디 있습니까 유대 나라는 웬만하면 사형을 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법 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기록을 보면, "만일 산헤드린 공의회가 7년 동안 한 사람이라도 사형 선고를 했다면 그곳은 도살장이다."라는 말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사형을 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도 예수님에 대해서만은 철저하게 예외로 했습니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불법이었습니다. 밤에 재판한 것도 불법이요, 약식으로 처리한 것도 불법이요, 증인도 없으면서 유도 심문을 한 것도 불법이요, 집단 폭행을 한 것도 불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모든 억울함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그 잔을 마시셨습니다. 변명 한 마디 없이 항의하는 몸짓 하나 없이 그 잔을 마셨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억울해도 괜찮아. 네가 하나님 나라에서 축복을 누릴 수 있게만 된다면 나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 그렇습니다. 주님은 내가 당할 억울함을 대신 담당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도 이 음성 들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은 우리 손에 있는 죽음과 진노의 잔은 빼앗아 자신이 마시고, 우리에게는 영생의 잔과 축복의 잔을 들려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그 죽음의 잔을 억울함에도, 기꺼이, 홀로 마시셨습니다. 이와 같은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여러분은 마음에 감격이 있습니까 이 놀라운 사랑 앞에 가슴이 뜨거워집니까 여러분의 눈에 눈물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내가 마셔야 될 그 쓴잔을 대신 마셔 주셨다는 사실 앞에 여러분은 얼마나 감격하고 있습니까 이 시간 그 마음이 얼음장처럼 굳어 있는 분이 계시다면 십자가의 사랑으로 녹아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또 여러분에게 이런 고민이 있습니까 '나를 구원하고자 하나님의 아들이 이 쓰고 지독한 잔을 홀로, 기꺼이, 억울함에도 마셔 주셨는데, 한번밖에 없는 남은 생을 내가 어떻게 살까 어떻게 하면 이 은혜를 조금이라도 보답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주님께 기쁨이 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우리에게 이런 고민이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구원받은 존재인데 우리가 되는대로 세상을 살겠습니까 우리 안에 '어떻게 하면 주님께 조금이라도 이 은혜를 보답할 수 있을까'하는 고민이 있어야 됩니다.
이 자리에 아직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지 못하고 계시는 분이 계십니까 주님께서 나 대신 고통의 쓴잔을, 저주의 잔을 마시셨다는 말씀이 아직도 마음에 잘 들어오지 않는 분이 계십니까 예수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믿지 않으면 주님께서 마신 그 저주의 잔을 결국 여러분이 마셔야 됩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망합니다. 그러므로 나 대신 그 잔을 마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가슴을 열고 그분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예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사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이와 같은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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