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뜻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 (욘 01:1-16)

첨부 1


요나서는 여로보암 2세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에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에서 가장 가까운 가드헤벨에서 출생한 아밋대의 아들 요나(왕상14:25)를 불러 선지자로 세우시고 동시 최강대국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성의 멸망을 예고하라는 사명을 주신 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요나서의 전체 주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역사와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입니다.
또 한가지의 주제는 하나님의 자비가 나타나 있습니다.
특히 죄악의 도성 니느웨성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가 나타나 있습니다.
요나서의 내용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멀리멀리 도망하는 요나의 도피행각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떨어지고 드디어 그를 버리시지 않고 기적을 일으키셔서 그를 다시 불러 들임으로 하나님의 일을 시키시는 과정이 전개됩니다.
이 책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회개할 자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요나처럼 참된 증인의 사명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1.요나가 받은 사명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을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1:2상)

느니웨성 가로를 질러 3일 길을 걸어야 하는(3:3)큰 도성으로 어린아이만 12만이 되는(4:11) 당시의 최강대국 앗시리아의 수도였습니다.
성벽의 높이가 100피트 이상이요 폭은 큰 수레 3대가 나란히 다닐 수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그러나 그 성은 악독한 성, 피의 도성이었습니다(1:2,홈3:1-5).
여러 나라를 지배했으니 피지배국에는 원수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요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가서 외쳐라’ 이것은 회개 촉구의 복음이었고 회개하면 반드시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요나에게는 반갑지 않은 분부였습니다.
‘일어나’ ‘가서’ ‘외치라’는 세가지 명령은 마태복음 28장 18절 이하의 예수님의 명령과 흡사합니다.
먼저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신구약의 모든 성도는 사명을 위하여 일어나야 합니다
(창13:17,수1:2,행8:26,9:10,10:20).
다음에는 가야 합니다.
교회는 모이는 교회에서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 돌아가면 거기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직장에 흩어지면 그곳에서 복음을 확장하고 성도들이 서 있는 곳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높이 드러나져야 되는 것입니다.
일어나 가서는 입을 열고 전해야 합니다.
증거는 사명이요 사명은 곧 그리스동인의 생명입니다.
사명수행이 없는 곳에는 그리스도의 생명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분부가 시시각각으로 우리에게 떨어지고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상식을 초월하는 분부가 떨어질 때도 있습니다.
인간은 생각이 짧아 우리 수준으로 밖에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많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 중심의 이해 속에서 판단이 되기 때문에 자기 수준에서 모든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순간적으로 들다가도 알고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뜻을 어그리고 점점 불순종과 무감각과 불평과 이기심에 매여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죄인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자신의 내면성을 솔직하게 들여다 보고 마음 구석구석을 청소합니다.

2.요나의 거부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 갔더니”(1:3상)

요나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과 달라서 말씀에 대한 거부감정이 생겼습니다.
‘악독한 도성은 회개할 필요도 없이 망해 싸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요나는 앗수르가 망할 것을 기도하는 선지자였습니다.
또 한가지 이유는 종교적, 신앙적인 편견 때문이었습니다.
선민 만이 구원을 받아야 되는데 원수 나라가 요나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해서 하나님께 복을 받으면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질투심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한가지 이유는 가서 말씀을 외치면 선지자가 왔다고 환영과 대접을 할 것이 아니라 조롱과 멸시와 학대 밖에 당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심리적 불안과, 초조, 공포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니느웨성의 악을 외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요나는 ‘그러나’ 로 반응을 하였습니다.
‘그러나’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반역할 때 항상 쓰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지만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어떻게 그 일을 합니까” 이것이 항상 문제입니다.
무조건 순종 뿐인 성도의 삶에서 ‘그러나’는 조건부 불순종인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명령에 ‘그러나’라고 반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러나’ 라고 말씀하시게 해야 합니다.
“너는 자꾸 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러나’ 너는 순종만 해 보아라 복이 임한다”라고 말씀하시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지상 명령을 항상 기억하고 있습니까. 익서을 행하면 살고 행하지 못하면 죽을 것도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러나’ 의유혹을 피하십시요. ‘그러나’의 함정에 빠져서 원치 않는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지 맙시다.
양심생활을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분부 앞에 ‘그러나’의 반응으로 비양심적인 행동을 하지 맙시다.
성결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앞에 ‘그러나’ 세상이 다 악하니 나 혼자서 성결해야 무슨 유익이 있으리이까‘ 로 나락에 떨어지지 맙시다.
정도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분부 앞에 ‘그러나’ 세상이 다 제길로 가는데 나혼자 정도를 걸어 별 수 있습니까, 로 거스리지 맙시다.
오직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러나’로 말씀하시게 합니다.

그러나 의 조건부 신앙은 하나님의 길에서 어긋나게 합니다.
죄악의 도성, 원수의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를 본 요나는 순간 못마땅하여 ‘그러나’의 이유를 달아 불쾌와 불만을 행동으로 표출 하였습니다.
‘일어나 가서 외치라’고 하셨는데 요나는 일어나 딴길로 가서 입을 다물었습니다.‘일어나는 것’이 중요하되 무엇을 위해 일어나는가가 중요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기는 했는데 하나님의 길로 가지 않고 제길로 갔습니다.
가릇 유다 처럼 제길로 간 자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길을 가야할 요나도 그길을 가지 않고 자기의 뜻을 좇아 제길로 간 것입니다.
‘요나’는 히브리어로 ‘비둘기’ 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순결과 순종의 뜻과 달리 질투와 편협심, 고집과 불평으로 순종의 길을 가지 못하고 불순종의 길을 갔습니다.
이름과 삶이 같지 않은 자가 많습니다.
‘유익’이란 뜻의 오네시모는 도덕질한 무익한사람이었고 “무죄자” 란 뜻의 삭개오는 실재로는 선량한 백성을 토색한 죄인이었습니다.
크리스챤이라는 이름은 가졌으나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인간의 삶의 차이가 백지 한 장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왔느냐 제길로 갔느냐의 차입니다.
두길 만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과 하나님을 배역하고 제길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한 정확환 길을 않고 자기의 길을 가고 계십니까
돌이킵시다, 세계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을 나의 열심으로 삼읍시다.
엘리야처럼, 하나님에 대한 열심히 특심하게 합시다.
침묵만을 지킬 것이 아니라 입을 열고 외침시다.
내가 서는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합니다.
입으로만 아니라 행동으로 증거합시다.

3.요나의 도피행각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1:3하)

불순종의 섬리가 작용할 때 저일 먼저 나타나는 현상을 여호와의 낮을 피하려고 도망하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리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을 갑니다.
컴컴한 새벽 아직 땅거미가 거두어지는 새벽이 오기 전 저 동쪽 바다에서 해가 솟아오르기 전, 새벽 햇살의 날개를 타고 도망을 갔으나 그 속도가 얼마나 빠릅니까(시139:7). 요나는 항구로 바꾸어 욥바로 내려 갔습니다.
‘내려 갔다’는 말씀은 지리적인 표현 만은 아닙니다.
영적인 귀한 진리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기독인들은 독수리처럼 올라가야 하는데 땅거미처럼 내려갑니다.
요나는 욥바로 내려 갔고 배 밑층으로 내려 갔습니다.
그가 어디까지 내려 갔습니까 산의 뿌리까지 내려 갔으니 엄청난 낙하입니다.
내려가고 또 내려가고 짜꾸 내려가는데 한꺼번에 뚝 떨어지는 것ㅇ 아니고 한겹 한겹 내려 갑니다.
요나는 배삯을 지불했으나 배를 타고 목적지까지 가지는 못했습니다.
배삯만 아깝게 손해를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자는 메사에 손해를 봅시다.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의 눈을 속이면 모든 것이 형통할 것같은데 불통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는 불통일 것같으나 형통입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처럼 목적을 이루되 삯까지 받아가며 이룹니다.
요나는 목적을 이루지 못하되 삯까지 잃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눈을 피하려고 하면 삶이 자꾸 내려갑니다.
사업이 안되고 직장에서 떨려나고 몸에 병들고 마음에 병들었습니까 교통 사고, 화재, 재난이 자꾸 일어나 되는 일이 없습니까 선을 행하는 가운데 이와같이 되었다면 하나님의 연단으로 받으시고 때를 기다리며 인내하십시오, 그 길만이 회복하는 길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죄악으로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돌이켜 회개하여 구원 받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4.여호와의 추적1).자연 동원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1:4상)

‘도망’ 이라는 뜻은 하나님께 대한 봉사로부터 도피 혹은 포기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도망간다고 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피조물에 대한 주권을 포기하시지는 않습니다.
여호와는 새벽날개보다 더 빨리 요나를 추적하였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빨리 도망을 가봐도 하나님의 눈초리를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에초에 하나님의 눈을 피하여 도망갈 생각을 않는 것이 상책입니다.
세상 도처에 편만해 계시는 하나님을 어디 가서 피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거센 바람과 폭풍을 요나를 향하여 ‘세게 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