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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의 공동체 (행 02: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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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우리는 부활주일을 지켰다. 오늘은 부활 후 첫주일이다. 절기에 맞춰 예 수께서 부활한 이후에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지난 주에 말씀드렸듯이 부활은 예수의 부활로 끝난 것이 아니다. 예수의 부활은 많은 사람들의 부활 중 첫 번째 일어난 첫열매일 뿐이다.

우리는 성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 한다. 다시 말 하면 교회는 부활한 예수의 몸이다. 부활한 예수가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 이다. 우리가 예수를 따르고 믿는 것은 다름 아닌 부활의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우 리가 십자가를 질 때는 힘들고 고달프지만 그 뒤에 따르는 부활이 있기 때문에 이 겨낼 수 있다. 희망을 잃어버린 자들에게 희망을 던져준 것이 부활사건이고, 희망 을 되찾은 이들이 함께 모여 역사를 이끌게 되었던 모체가 바로 교회였던 것이다.

예수께서 힘없이 십자가에 죽어가는 모습을 본 제자들은 각기 흩어졌다. 어부생 활하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고기 잡으러 다시 돌아갔다. 또한 두 제자도 희 망을 잃고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부활한 후 여러번 제자들에게 나타났다. 즉 예수의 부활을 눈으로 확인했다. 도마는 예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면서 부활의 희망을 확인했다. 이처럼 낙담하고 제각기 갈길로 돌아갔던 제자들 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다. 십 자가 처형 당시 움추러들었던 제자들, 그래서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고, 멀 리 도망쳤던 제자들이었지만 부활의 희망을 확인한 이후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는 놀라운 용기가 생겼다. 이들은 이적단체 정치범 하수인으로서 수배를 받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많은 청중들 앞에서 당당하게 "너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고 맹공격하였다. 잡혀가는 그 순간에도 "너희 권력자, 로마 제국주의 앞잡이들의 악한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의 정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으냐 판단하라" 고 하면서 총칼가진 자들에게 저항했다.

그러나 부활을 확인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러한 힘이 생긴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러한 용기와 힘은 초대교회 공동체의 상시적인 모임 속에서 이루어졌던 것 이다. 교회 공동체가 어떻게 보면 아무 것도 하는 것 없어 보이고 나약해 보이고 너 무나 부드러운 면이 많고 하지만 결코 그렇게만 생각할 것은 아니다. 작은 교회들일 지라도 매주일 수십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의논하고, 잘하 기 위해 공부도 하고, 인간관계를 꾸준히 가지고 하는 일이 얼마나 큰 힘인지 모른 다.

제자들은 가장 힘들고 신변이 위험한 시기에 다락방에 숨어서 모이기 시작했으나 점차 참여하는 수가 많아지면서 공개화되어 갔다. 12제자에서 120명 문도로, 500여 신자로, 3천명의 대중으로 확대되어갔다. 모인 사람들의 지역도 다양했다. 바대인, 메대인, 엘람인, 메소보다미아인, 유대인, 가바도기아인, 본도인, 아시아인, 브루 기아인, 밤빌리아인, 애굽인, 구레네인, 리비야인,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그레데 인, 아라비아인... 지금 우리가 들어도 알 수 있는 지명만 따져보더라도 그 지역이 얼마나 넓고 다양했던가를 알 수 있다. 서로 언어와 생활습관이 다른 지역에서 사람 들이 모여들었으므로 상당히 하나되기 힘들었겠지만 그러나 의외로 이들은 쉽게 하 나가 되었다. 그 증거가 본문에 기록되어 있다. 8절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한국교회는 그동안 신비주의에 빠져 혀가 꼬부라져야만 방언을 하는 것으로, 그래야만 성령을 받은 것으로 잘못 이야기되어 왔지만 본문을 자세히 보면 방언의 옳바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말을 하 는 사람이 혀꼬부라진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하는 사람은 한 가지 자기 말을 하는데 각 지역, 각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자기 말로 알아들었다는 얘기다.

다시 말하면 마음이 하나로 통했다는 의미다.

구약성서는 바벧탑 사건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언어가 혼돈되어 실패하는 모습을 그렸다. 자기만 살려고 하는 현장에는 마음이 서로 하나가 될 수 없어 궁극적으로는 실패하고 마는 교훈을 남겨준다. 마찬가지로 신약에 있는 본문에서는 말이 통함으 로 마음이 하나되는 모습을 여기서는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모두 다른 생활 습관을 가진 다른 지역출신이라 할지라도 오늘의 상징이 말해주듯 쉽게 하나될 수 있었던 것은 뚜렷한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로마의 식민지 민중들 로서 빼앗기고 억눌림을 당한 사람들이었다는 것, 로마의 지배로부터 하루 빨리 벗 어나 자유로운 몸이 되기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성서는 많은 놀라운 사건을 상징적으로 다루고 있다. 일명 기적사건들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기적사건은 바로 다름아닌 십자가와 부활인데 이것은 내일의 새 시대가 오늘의 옛 시대로 침입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우리 인간들은 지극히 자기중 심적으로 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시간도 나를 중심으로 따지게 되어 내일로 향해 가는 것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성서는 하나님 중심적, 즉 공적 개념을 가지고 기록 된 것이기에 오늘로 내일이 침입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그러니까 사실은 우리는 언 제나 오늘에만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시간이고 희망의 시간인 내일은 오늘로 다가오 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은 혁명적 역사를 서술할 때에 하나님의 역사적 개입으로 표현한다. 하나님의 시간이 인간의 시간 속으로 침입해 들어온 사건을 혁 명이라 한다. 그러기에 우리가 부활신앙을 가진다 함은 막연한 내일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다보고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일을 가진 자답게 항상 오늘을 충실 하게 사는 적극적인 삶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와 예수의 친구인 민중들을 죽음으로 몰아세우는 죽음 의 세력들과 대립하여 싸우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현재 세상 의 가치구조들에 대해 아니오라고 강하게 외치고 있기 때문에 교회는 세상에 대 항하여 싸울 수 밖에 없다. 이 시대의 세력들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정의에 속한 사람들을 십자가에 못박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교회는 옛 시대 가운에서 새 시대의 동터옴의 징표이며, 따라서 악의 세력들에 대항하여 싸우며 그들에 의해서 포위 공격 당하고 있는 하나님의 새 세 상의 선봉이다. 여기에는 고난이 필연적으로 따른다. 하지만 우리가 이 고난을 두 려워하지 않는 것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요, 죽음의 세력은 언제나 생명의 세력에 의해서 언젠가는 굴복당할 수 밖 에 없다는 영원불변의 하나님의 법칙을 믿기 때문인 것이다. (본문 사도행전 2:1-13 홍삼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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