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부활 (고전 15:3)

첨부 1


일찍이 저 유명한 파렐(Farrel)은 ‘인간의 기록 중에서 본질의 말처럼 슬픔을 당한 여러 만인들에게 위로를 준말은 아직 없다’고 한 바 있다.
고린도전서 13장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 유명하다면, 고린도전서 15장은 미래를 향한 인류 소망을 선언함에서 유명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모든 인류가 한결같이 열망하는 인생의 미래 문제, 본질 문제, 곧 영생 문제를 해결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생을 받은 모든 인류가 만날 피할 수 없는 인생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영감의 편지를 받는 고린도교회는 문제가 많은 교회였다.
예컨대, 교회 분쟁 문제(1:10-4:), 도덕 문제(5:-7:), 우상 제물 문제(8:-10:), 모임(집회)과 은사에 관한 문제(11:-14:) 등이었다. 성령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 이 여러 문제들에 대한 해결점을 알려 주었다.
그 중에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는데 ‘부활’에 관한 문제였다.
고린도교회에 야기된 부활에 관한 문제는 15장 12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는 것과 15장 35절에 만약에 부활이 있다면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하는 것이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에 대한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논증적 답변으로 부활은 확실히 있다(15:1-34)는 첫 번째의 내용이고 두 번째의 논증적 답변으로 부활의 몸은 영생체, 곧 영광스러운 불사의 몸이다는 내용이 15장 35절로 57절이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 부분이 15장 58절이다.
그렇다면 고린도전서 15장의 구성 내용은,

첫째 서론(15:1-2):구원의 복음
둘째 본론:부활론(15:3-57)
Ⅰ. 부활의 확실성(15:3-34)
II. 부활의 양태와 성격(15:35-57)
셋째 결론:(15:58)

첫째, 서론 (15:1-2)-구원의 복음

바울은 서론에서 고린도 교인을 향하여 형제라고 부르고 있다(15:1). 마지막 58절에서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영통 가족이 된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리스도인을 향한 메시지이다.
바울은 15장 1절에서 저들에게 내가 너희에 전한 복음이 있다고 하였다. 15장 2절에는 나의 전한 그 말이라고 하였다. 15장 3절에서는 내가 받은 것을 너희에게 전했다고 하였다.
여기에 바울이 고린도 교인을 향하여 사용한 ‘복음’은 총체적인 복음을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의 화육강세, 무죄의 삶, 십자가의 죽으심, 부활과 승천과 재림과 영생 등의 내용을 말한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의 형제들에게 이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우리 본문에 알게 하노니라고 하였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미 처음부터 이 복음을 받은 자들이요, 그 복음 안에서 자리를 잡았다고 하였다(15:1).
그러므로 15장 2절에서 형제들이 이 복음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다. 바울은 그가 전해 준 복음은 헛되이 믿지 말아야된다고 하였다. 이것은 아무런 목적이나, 내용이나, 계획성 없이 믿는 맹종적, 방종적 신앙을 가리킨다. 고린도 교인들이 받은 복음은 확실한 목적과 알찬 내용을 갖고 있다는 말이 된다. 결코 그리스도인들이 받고 믿는 복음은 ‘구원’이라고 하는 어마 어마한 내용과 목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본론:부활론 (15:3-57)

Ⅰ. 부활의 확실성(15:3-34)
15장 12절 부활이 없다는 주장에 대한 답변

1. 부활은 역사적 사실(15:3-11)
1) 성경의 증거(15:3-4)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성경 예언의 성취이다.
(1)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15:3)
15장 3절에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라고 하였다. 이것은 저 구약의 예언의 중심이다(사53:, 시22:). 그리고 예수 자신이 예언한 바이다(막10:45, 마16:21a, 요2:22a). 그는 성경 예언 대로 오시고, 사시고, 죽으셨다. 그는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실 때는 성경을 이루셨다고 하였다(요19:30).
(2) 그리스도의 장사 지냄(15:4a)
15장 4절에 장사 지낸 바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사야는 그의 장사지냄을 가리켜 그의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도다고 하였다(사53:9). 마태복음 12장 40절에는 예수께서 선지자 요나의 사실을 인용하면서 자신이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고 하였다. 그가 장사지낸 바 되었다는 말은 그의 죽으심이 확실하다는 사실이다.
(3) 그리스도의 부활(15:4b)
15장 4절...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 나사라고 하였다. 여기에 사흘이란 꼭 72시간을 이름이 아니고 금요일에 돌아가시고 토요일 안식일이 지나고, 안식후 첫날, 지금의 주일, 곧 사흘 되던 날을 뜻하고 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고 성경 예언 성취의 필연이라는 사실이다(마16:21b, 요2:22b, 요2:1

9....).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경’이 증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한복음 5장 39절대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엠마오를 향하던 두 제자를 만나, 근심 중에 있는 자들에게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게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다고 하였다(눅24:25-26).
성경은 위대하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가리키는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다(딤후3:16, 벧후1:20-21).

2) 제자들(목격자)들의 증거(15:5-8)

사도는 예수 부활의 역사적 사실을 입증할 때 첫 번째가 성경 예언의 증거라고 하였다. 그 두 번째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체험한 목격적 증거라고 하였다. 15장 5절로 8절 중에서는 다섯 번의 공적 증거를 말하고 있다.
(1) 게바에게(15:5); 개인적으로 보이심이었다(눅24:34)
(2) 열두 제자에게(15:5); 실지로 열한 제자였으나, 모든 제자들에게 나타났음을 입증하는 말이다(눅24:33-39, 요20:19, 26).
(3) 오백여 형제들에게(15:6); 복음서에는 없는 기록이나, 그 중에 태반이 이 서신을 기록할 때까지 살아 있다고 하였다. 1,000개의 눈동자가 확인한 셈이 된다.
(4) 야고보에게(15:7a); 여기에 나타난 야고보는 사도 야고보가 아니라 주의 형제 야고보라고 하는 것이 통설이다. 그는 예수님 공생애 중에는 예수를 믿지 않았으나(7:5), 오순절 때 제자들과 함께 했고(행1:14), 그 후 예루살렘 교회에 지도자로 활동한 사실을 보게 된다(행15:13, 21:18, 갈2:9). 아마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후 신자가 되었는지 모른다.
(5) 모든 사도에게(15:7)
이 말은 열두 제자 뿐아닌 넓은 의미에서의 모든 제자단을 이름이다. 예컨대 바나바와 실라 등이 포함된 사도단일 것이다.
복음서에는 여기 기록 외에 ① 막달라 마리아에게(막16:9, 요20:11-18) ② 다른 여인들에게(마28:9-10) ③ 글로바와 동행한 청년에게(눅24:13-15) ④ 디베랴 바다에서 제자들에게(요21:1-14) ⑤ 도마와 그리고 열 한 제자에게(요20:24-29) ⑥ 승천 직전에 열 한 제자들과 여러 문도들에게(행1:4-11, 눅24:50-51)도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났다.
(6) 바울 자신에게도 나타났다고 하였다
15장 8절에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 하였다.
이 모든 성경의 기록은 예수께서 부활 후 40일 동안 세상에 머물면서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낸 부활의 입증이다(행1:3).

※ 부활하신 후 예수님의 몸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났다.
첫째, 갑작스러운 출현과 사라짐이었다. 예컨대, 엠마오로 항하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사 동행해 주심(눅24:15)과 또 축사하실 때 홀연히 사라져 버림이다(눅24:31).
안식 후 첫날 저녁에 제자들이 두려움 속에서 문빗장을 잠그고 있는 곳에 홀연히 나타나사 평강을 선언하였고, 그리고 성령을 받으라고 하였다(요20:19-21).
둘째, 그의 몸은 물질적이고, 실제적인 인격체로 나타났다.
(1) 말을 했다 (2) 음식을 먹었다. (3) 도마에게 상처받은 두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 주고 만져 보라고 하였다. (4) 제자들과 꼭 같이 활동했다.
셋째, 시간적이고 공간적이면서, 또한 초시간적이고 초공간적이었다.
넷째, 물리적이면서, 또한 초물리적이었다.
다섯째, 여러 장소,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나타났다.
여섯째, 가시적인 인격체(영체)로 승천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초월하는 신공위성과도 같았다.
일곱째, 바로 그 부활의 영체(靈體)는 우리 부활의 예표였다(잠자는 자들의 첫열매 였다).

3) 바울 회심의 증거(15:9-11)

바울은 자신에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사실을 말하기를 15장 7절에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나에게도 보이셨다고 하였다. 이 말은 바로 저 유명한 다메섹 도상에서의 예수 부활 체험을 술회하는 말이다.
부활하신 주님이 어떻게 그에게 보이셨는가
사도행전 9장에 보면,
(1) 초자연적 영광의 빛으로 나타났다(행9:3).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저를 둘러 비추었다고 하였다(객관적 역사).
(2) 이름을 불러 주는 음성으로 나타났다. 사울아 사울아....(9:5). 이는 인격적 소명의 음성이다 사울을,① 앎 ② 사랑 ③ 소원이 있다는 내용이다.
(3) 사울의 죄를 찔러 주면서 찾아 왔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9:4). 고린도전서 15장 9절에는 교회를 핍박했다고 하였다.
사도행전 9장 1절, 7장 58절, 22장 19절로 20절에 그의 죄가 나타나 있다.
(4) 사울에게 사명을 가지고 오셨다.
주님은 주권적 방문, 선택적 방문, 사랑의 방문, 은혜의 방문을 하셨다(행9:15).
그래서 사도 바울은 ① 15장 9절에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하였고 ② 15장 10절에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였다. ③ 사도로 수고함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였다. ⑤ 15장 11절에 바울과(내), 다른 사도들(저희)은 이같은 부활의 복음을 전했고, 고린도 교인인 너희들도 그렇게 받았다고 하였다.
바로 그가 예수를 만난 다메섹 도상의 그 순간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새로운 삶의 분기점이 된 것이다.
그것은 B.C와 A.D였다. 그 순간의 은총으로 그는 세계 선교 지도를 새로 그릴 수밖에 없었다. 선교의 동인(動因)이었다.
이것은 만인공지의 역사적 사건의 사실이라는 영감의 사람 바울의 주장이다(행26:26).
15장 1절로 11절은부활이 없다고 하는 자들에게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하는 답변의 논증이었다.

2. 부활은 기독교회 존재의 기초(15:12-19; 과거와 현재)

서론:예수 부활의 산물로서의 그리스도 교회
지구촌에 역사의 한가운데 존재하는 기독교는 역사적 종교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결과 새롭게 나타난 또 다른 예수 운동의 실증이 된다.
보통 우리가 ‘역사’라고 할 때는 몇 가지 역사 성립의 요건들을 생각하게 된다.
시간이 매개된다(언제)
공간이 매개된다(어디에서)
사람이 매개된다(누가)-역사의 행위자로서의 사람이다.
사건이 매개된다(무엇을)
왜 일어났는가(목적론)
어떻게 되었는가(결과론적 의미)
기록이 따른다. 기록할 가치 유무는 후대의 교훈을 위함이다.
기독교가 역사적 종교라고 할 때 이러한 모든 조건에 충족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예수 부활 사건이 이런 의미에서 지구촌에서 일어난 사건이요 역사였다.
그러므로 역사를 부인하는 자는 사실상 자기 존재 의미를 스스로 상실시키는 자이다.
이순신 장군, 이준 열사, 안중근 의사 등은 역사적인 인물이다.
사도는 15장 14절에서 가정법의 표현으로 만약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지상에 존재하는 기독교회의 존재 의미나, 존재 가치나 존재 목적이 전혀 성립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금 영감의 사도 바울은 ‘부활이 없다’(15:12)는 자들에게 예수 부활의 산물로서 역사상에 존재케 된 그리스도 교회가 예수 부활의 역사적 사실을 두 번째로 논증하고 있다고 한 것이다.
바울의 답변적 논증은 일곱 가지이다.
만약에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1) 그리스도 자신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15:13, 16).

본문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13절).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16절)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머리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음과 부활은 전 인류의 죽음과 부활이 된다. 그가 부활하셨다면, 전 인류도 부활하는 것이요, 또한 전 인류에게 부활이 없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에게도 부활이 있을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로마서 4장 25절에 그는 우리의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줌이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 나셨다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그가 부활하시므로 교회의 머리와 몸이 되셨다.

2) 그 교회의 선교 행위(복음 전파)도 헛됨(15:14a)

본문에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이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회가 받은 선교의 모토(motto) 중에 하나이다. 그것은 오순절 설교의 주제 중에 하나였다(행2:36). 사도 바울 선교의 주제였다. 그는 가는 곳마다 죽은 자의 부활을 전하는 일 때문에 존재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하는 부활 소망의 증거 때문에 ① 염병 같은 놈의 취급을 받았다(행24:5). ② 송사를 받았다(25:-26:) ③ 미친 놈이라고 하는 오해를 받았다(행26:24).
만약에 예수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역사의 한가운데 존재하는 기독교회는 ‘빈 껍데기’라고 하였다.
본문에 우리의 전파하는 것은 헛것이라(κενν)는 말은 텅 빈 껍데기를 뜻하는 말이다.
허실이요, 허상이요, 위선이요, 외식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존재하는 기독교회의 ‘알맹이’는 부활 소망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부활의 복음’은 선교의 주제였다. 또 그것이 전 인류의 소망이었다. 그 이유 때문에 이천년간이나 기독교회는 역사의 한가운데를 달리고 있다.

3) 교회 신자들의 믿음도 헛것임(15:14b, 17)

성경은 다시 말하기를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14절),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여러 세기를 거처 이 세상을 살다 갔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내용이요, 고백의 주제 중에 하나이다. 이것은 바로 사도신경 중에도 고백을 이루고 있다.
예수께서 사흘만에 무덤에서 살아난 것을 믿고 또 마지막 날에 몸이 다시 사는 것(부활)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영생)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부활 신앙이나, 자신의 부활 소망이 없는 자는 깡통교인()밖에 안될 것이다.
교인은 될는지 몰라도 신자는 아닌 것이다. 존재하는 참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 속에 ‘부활’이라고 하는 생명의 알맹이를 담고 있다.

4) 복음 전도자들이 거짓 증인이 됨(15:15)

성경은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엿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였으리라고 하였다.
참으로 대단한 말이다. 예수 부활이 없다면, 단순한 껍데기 교회나, 껍데기 신자나, 껍데기 선교 정도가 아니라, 역사상에 존재하는 모든 예수 증인들이 사기꾼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없는 부활’을 있다고 증거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증거 했기 때문이다. 저들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살리셨다고 증거 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사기꾼치고는 극악한 종류의 사기꾼이 되는 것이다. 사기꾼 치고 종교 사기꾼, 특히 기독교 사기꾼은 악성적이다.
그러나 이천년 동안 모든 인류 중에서도 이루 셀 수 없는 수다한 무리의 전도자들이 전한 예수 부활의 복음을 받았고, 믿었고, 그 결과 영생을 얻었다. 그 이유는 저들이 전한 부활의 복음이 사기가 아니고, 사실이요,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거짓말이 그렇게도 오래 갈 수 있단 말인가
무슨 거짓말이 그렇게도 영향력이 있고, 설득력이 있고, 감화력이 있단 말인가
예수 부활은 거짓이 아니고 사실이기 때문이다. 허실이나, 허상이 아니고, 실체요, 실상이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다면 예수의 역사적 부활 신앙을 갖지 못한 자는 사기꾼에게 속은 사람이 된다.

5) 인류의 죄 사함도 없을 것임(15:17b)

성경은 말하기를 ...너희가 영원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로마서 4장 25절에 예수는 우리의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우리의 의롭다 하심을 인하여 다시 살아 났기 때문이다
예수 부활은 우리 ‘칭의’의 근거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부활을 믿음으로 이방인들에게 사죄 받은 역사가 일어났다(행10:43, 11:1-18). 예수 부활을 믿는 생명의 소망이 신자의 마음에 없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실체가 없는 것이다. 신자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내 죄 때문에 나의 죄값을 지불했다는 사실을 믿는다. 그리고 예수 자신이 부활하시므로, 그 죄값과 전혀 상관없이 우리를 다시 무덤에서 이끌어 올리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8장 1절로 2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하였다.

6) 이미 믿고 세상을 떠난 신자들이 망하게 됨(15:18)

다시 성경은 말하기를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라고 하였다.
멋지고 멋진 말이 있다. 예수를 믿고 죽은 자들이 망하지 아니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 안에 잠자고 있는 자라고 표현했다.
이 세상에서 육신의 죽음을 맞이한 그리스도인을 잠자고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 14절로 15절에서도 잠자는 자들이라고 표현하였다.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죽음을 가리켜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자고 있다고 하였다(막5:39). 이 소리를 들은 무리들은 비웃었다.
예수님은 자기 친구 나사로의 죽음을 가리켜 내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니 깨우러 가자고 하였다(요11:11).
요한계시록 14장 13절에는 이 잠자는 상태를 가리켜 쉬고 있다고 표현하였다.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고 육신이 죽은 자들은 결코 망한 자들이 아니고 잠자고 있는 자들이다. 깰 때가 전제된 말이 아닌가
여기 우리 본문에 ...망한다는 말은 ‘영원한 파멸’을 뜻한다. 그러나 결코 저들은 망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저들은 예수 부활의 씨를 받고 갔기 때문이다.

7) 현재 세상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더욱 불쌍한 자가 됨(15:19)

성경은 또 말하기를 만약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서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의 소망이 금세 뿐이라면, 우리는 불쌍한 자 중에도 더욱 불쌍한 자가 된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1) 껍데기 인생(헛된)을 살았기 때문이다(헛된 믿음)
(2) 사기꾼 노릇을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인 명예에 수치요, 가문과 민족과 역사 앞에 불명예스러운 일이 아닌가
(3) 예수 때문에 모든 고난을 감수했기 때문이다. 온갖 세상의 핍박과 멸시와 모욕과 천대와 심지어 죽음까지 받았기 때문이다.
누구보다도 바울 자신이 그러한 사람이 되고만 것이다. 그는 예수 부활 증거 때문에 넘치는 수고, 옥에 갇힘과 수 없이 맞은 매,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시내의 위험, 광야의 위험, 거짓 형제의 위험, 계속되는 수고, 애씀, 잠자지 못함, 굶주림, 목마름, 추위와 헐벗음, 그리고 모든 교회를 위한 눌림(고후11:23-28), 그리고 고소를 당함, 마침내 죽임에까지 이르렀다.
예수 신앙 때문에 가정에 버림을 당하고 친구와 직장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 여러 류의 인권유린, 자유 박탈, 가산의 탕진, 그리고 추방과 죽음까지 불사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영감의 기록이 우리에게 주는 중대한 교훈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결코 그리스도 자신은 다시 살았다는 것이다. 교회의 전도는 확실하고, 신자들의 믿음도 확실하고, 모든 복음 증인들의 증거가 사실이고, 죄 문제 해결도 사실이고, 이미 믿고 죽은 자들은 성공했고, 이 세상을 살고 있는 모든 류의 그리스도인들은 불쌍한 자가 아니고, 행복하다는 사실이다. 내용있는 삶, 미래적 삶, 소망의 삶, 창조적 삶, 목적적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신앙 내용과 삶의 내용을 고백하는 단체가 교회라는 것이다. 그래서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예수 부활을 입증하는 역사적 표징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는 바로 예수 부활의 또다른 모습이요 실체요 증거이다.

3. 성도 부활의 보증으로서 증거(15:20-28 ;미래)
1)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열매(15:20-22)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열매가 되셨도다고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라고 하는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기절했다거나, 안 죽었다는 말이 자리를 잡지 못하게 한다. 그는 분명히 죽으셨고, 무덤에 장사지낸바 된 사실을 숙지시키는 말이다.
여기 잠자는 자들이란 육신이 죽어 무덤에 있는 자들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다. 우리는 다시 이 멋진 말을 새겨야 한다. 주 안에서 육신이 무덤에 가버린 자는 잠자는 자들이라고 거듭 거듭 표현하고 있다(15:18, 20, 51). 잠을 자고 있음은 안식의 시간이요 그것은 다른 활동을 준비하는 잠정적 조치가 아닌가
곧 그리스도의 부활은 장차 성도 부활의 예조요, 보증이라고 하였다. 첫 열매라고 하는 말은 추수의 시작을 알리는 말로 계속적인 수확을 알리는 신호가 된다.
15장 21절에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 도다고 하였다. 이것은 첫사람 아담의 범죄가 모든 사람에게 죽음을 가져 온 것처럼 마지막 아담(15:45) 예수의 부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부활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로마서 5장 12절로 21절에 나타난 대표 원리의 설명이다.
15장 22절에 다시 같은 내용의 원리가 반복되고 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하였다. 예수 부활은 잠자는 자의 부활의 첫열매라고 하는 사실을 부가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2) 부활의 순서(15:23-24)

15장 23절에 그러나 각각 차례대로 되리니라고 하였다. 여기 차례대로 된다는 말은 군대 술어로써 ‘부대가 행렬을 맞추어 진행’함을 뜻한다. 부활에도 질서 정연한 순서가 있다는 사실이다.
부활의 첫째 부대는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하였다(15:22a)
먼저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라고 하였다. 그는 부활의 원형이요 왕이 시요 대장이시다.
둘째 부대는 신자의 부활이라고 하였다(15:22b)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 하실 때 그에게 붙은 자요라고 하였다.
여기 그리스도 강림은 그리스도 재림 때를 가리키는 뜻이다 강림(παρυσα)은 황제나, 왕의 도착, 또는 방문을 뜻하는 말로 예수 황제의 재림에 이 말을 사용하였다.
그 때 그에게 붙은 자의 부활이 있다.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곧 ‘그와 짝하고’, ‘그에게 소속되어 있는 자’를 가리킨다.
이것은 부활의 제 2부대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사 영생의 황제로 다시 오실 때 먼저 죽은 성도들이 부활하고, 그 다음에 그 때 살고 있는 신자들은 변화하여 부활의 영체로 주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살전4:16, 17, 3:13).
셋째 부대는 나중 부활이다(15:24)
그 후에는 나중이니...라고 하였다. 여기 나타난 ‘나중’은(το τλο)은 ‘세상 끝’을 의미한다. 이것은 성도들의 부활이 있은 후 따르게 될 불신자들의 부활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5장 29절에 나오는 두 가지 부활 중 ‘심판의 부활’을 뜻함이다. 이것은 예수 최후 심판의 날에 있을 불신자들의 부활이다. 계시록 20장 13절로 15절에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각 사람이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 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 우니라고 하였다.
성경은 신자의 ‘부활’을 ‘생명의 부활’(요5:29)이라고 하였다. 불신자의 마지막 부활은 사망의 부활, 또한 심판의 부활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셋째 부대의 부활은 불신자의 부활이다.

3) 그 결과(15:24b-28)

(1) 원수 사망은 멸망된다(15:25a). 다시는 사망이란 폭군이 인류를 괴롭힐 수 없게 된다. 그리스도는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을 하나님께 바치게 된다(15:24b). 이 말은 영계와 인간계의 모든 권력을 총칭하는 말이다.
(2) 그리스도는 사망을 정복한 생명의 왕노릇을 하게 된다(15:25b).
(3) 새로운 우주 질서가 회복된다(15:27-28a). 그것은 바로 만물의 갱신과 질서 회복이다. 만물은 그리스도에게 새롭게 복종하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 복종하게 된다.
인류가 범죄로 인하여 타락하였을 때 만물과 인류의 타락과 함께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데로 타락하였다. 그것이 우주 질서의 파괴였다.
이제 예수의 최종 심판과 함께 새하늘과, 새 땅의 세계가 도래하고 전 우주를 새롭게 창조 질서로 회복된다.
만물은 성도에게 복속하고 성도는 그리스도에게 복속하고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복종하기에 이른다(고전3:21-23).
(4) 하나님은 만유의 주가 되신다(15:28).

4. 성도의 소망 생활의 증거(15:29-34; 현재)

예수 부활의 확실성의 마지막 부분이다. 이것은 예수 부활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실제적으로 저들의 삶에서 나타내는 경험적 증거, 체험적 증거이다.
1) 세례 받음(신앙고백)은 부활 소망 때문이다(15:29)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였으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라고 하였다.
이 구절에 우리가 주의해야 한다. 이 말은 결코 죽은 자를 위하여 대신 세례 받는 이른바 대리적 세례가 아니다. 그것은 이단적 해석이다.
이 말의 바른 해석은 예수를 믿고 죽어 가는 성도가, 그의 불신 가족이나, 친척이나, 친구더러 부디 예수 믿고 세례를 받으라고 부탁 받은 자(전도 받은 자)가 나중에 그 사람의 전도를 받고 회개하여 세례를 받음, 곧 신앙고백을 함을 의미한다.
여기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 받는다는 말은 ‘죽은 자들 위에서’하는 말로 자기에게 죽어 가면서도 전도해 준 그 사람을 생각하고, 그 사람의 무덤 위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의미를 뜻함이다. 초대 교회에서 이런 일들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이 성경이 주장하는 중대한 교훈은 ① 부활 신앙을 가진 신자들이 죽어 가는 순간까지도 예수를 증거 했다는 사실과 ② 또 그들의 전도를 받은 사람들이 그 부활 소망을 믿고 깨달아 저들도 함께 부활 신앙을 고백하는데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 부활의 확실성은 예수 부활을 고백하는 신자들의 수세(水洗) 행위에서 입증된다는 것이다.
지상에 모든 교회들은 저들의 신조 가운데 예수께서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것과 그를 믿는 신자들이 마지막 날에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다.

2) 일사각오의 박해 감수 생활도 부활 소망 때문이다(15:30-32)

또 우리가 어찌하여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하였으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노라고 하였다.
만약에 바울이 부활 소망이 없었다고 하면 죽음에 이르는 그 무수한 선교 여정의 고난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고전4:9-13, 고후4:·10, 11:23-27).
바울은 자기의 자랑거리인 교회를 두고 엄숙하게 맹세하기를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다. 이 말은 ‘나는 매일 죽음의 위험 가운데 있노라고 하는 말이다. 그는 또 말하기를 내가 부활 신앙이 없는 보통 사람(범인)으로 에베소의 박해자들(맹수)과 싸웠으면 무슨 유익이 있었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그는 에베소에서 예수 부활 신앙과 선교 때문에 박해자들과 더불어 분투했다고 하였다.
만약에 부활 소망이 없다면 내일 죽으리니 오늘 먹고 마시고 즐기자는 현실 쾌락주의가 훨씬 더 나았을 것이라고 하였다(사22:13).
문제는 찬란한 내일의 부활 소망 때문에 오늘의 고난과 핍박과 죽음의 현실을 감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각성하는 삶도 부활 소망 때문이다(15:33-34)

본문에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 하였다.
(1) 악한 동무들에게 속지 말라고 하였다(15:33).
그것은 부활 소망을 가진 신자들의 복음 중심 생활이 더럽혀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사람에게 대한 각성이다.
(2) 깨어 라고 하였다(15:34a)
여기 깬다는 말은 ‘술취함에서 깨어남’을 가리킴인데 순간주의적 쾌락 사상에서 일어남을 가리킨다. 육체주의에 대한 각성이다.
(3) 의로 행하고 죄를 범치 말라고 하였다(15:34b)
이는 성별 생활을 가리킨다. 고린도 도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러한 세속주의자로 가득차 있었는데, 심지어 그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까지 들어와서 순진한 신자들을 속이고 유혹하여 속화시키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 소망을 가진 자는 오늘에서 내일로, 현재에서 미래로 그 삶의 방향을 돌리고 포커스를 맞추고 살아가는 자들이란 말이다.
이렇게 예수 부활은 우리들의 삶을 미래 지향적으로 바꾸어 놓고 만다. 오늘의 절망에서 내일의 소망을 찾고, 오늘의 실패에서 내일의 성공을 찾고, 오늘의 답답함에서 내일의 시원함을 찾고, 오늘의 불쾌함에서 내일의 유쾌함을 찾고, 오늘의 유한에서 내일의 무한을 찾는 것이다. 오늘의 눈물에서 내일의 웃음을 찾고, 오늘의 탄식에서 내일의 개가를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의 고난과, 장차의 영광은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 부활을 확신한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이것은 ‘예수 부활이 없다’(고전15:12)는 주장에 대한 답변이다.
그것은 역사적 사실로서 증거 했다. 역사 가운데 존재하는 교회로서 증거 했다. 장래 성도 부활의 보증으로서 증거했다. 현재 성도의 소망 생활로서 증거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