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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둘기 같은 신자 (창 08: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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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종전과 같이 강해 설교는 하지 않고 병자년 새해 첫 주일이므로 역시 전하는 창세기 말씀 가운데서 8:6-12절의 말씀을 택해 비둘기가 방주를 중심으로 해서 살아가듯이 우리 성도가 이 방주인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살아가도록 바라는 마음으로 제목을 ‘비둘기 같은 신자’로 정했습니다.

이 말씀을 전하실 때 주님께서 은혜를 더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전하고자 하는 말씀의 배경은 이러합니다.

비는 노아 나이 600세 되던 해 2월 27일에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 창이 열려 40주야 밤낮으로 비가 쏟아졌습니다.(7:12) 그리고 모든 높은 산들은 다 묻히고 그 위에 15규빗(7m)의 물이 더 올라가서 코로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습니다.(7:22) 그리고 물은 땅에 150일(5개월) 동안 창일 했습니다. 배는 물 위에 둥둥 떠 다녔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노아를 잊지 않으시고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중심을 지키는 노아를 돌아보시고 권념(remember)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생각하시고 위해서 1) 땅에 바람이 불게 하셨습니다.(8:1) 2) 물이 물러가게 하셨습니다.(8:1) 3) 깊음의 샘과 하늘 창을 막으시고(8:2) 4) 하늘에서 비를 그치게 하셨습니다.(8:2) 5) 물을 땅에서 빠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물이 물러가고 빠지게 하시니 그해 7월 17일에 방주가 해발 5,100m나 되는 지금의 알메니아(Armenia)고지 아라랏 산에 머무르게 하셨습니다.(8:4) 그리고 10월 1일에 물을 점점 물러가게 하시고 산 봉우리가 보이게 하셨습니다.(8:5) 노아는 10월 1일 산들이 속속 보이기 시작한 때부터 40일이 지나서 11월 10일 경쯤 오늘 본문 6절입니다. 노아가 그 방주에 지은 창을 열고 까마귀를 내어놓았습니다.

 까마귀와 비둘기를 방주에서 밖으로 내어 보낸 사건을 여러 시대를 거쳐 많은 신학자들이나 설교자들은 때로는 교훈을 삼으며 흥미를 돋우는 비유 자료로 써 왔습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까마귀는 어둡고 무서운 율법을 내 놓는 그림자로 묘사했고, 비둘기는 평화의 복음을 가져다주는 신약을 비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오늘 까마귀는 두고 비둘기만 예로 들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0개월간 방주에 있던 노아가 땅에 물이 얼마나 빠졌는가 그 여부를 알려고 먼저 까마귀를 내어 보내니 까마귀는 사명을 버리고 영영 방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 시체 저 시체에서 먹이를 찾아 헤매며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다시 비둘기를 내어 보냈습니다. 비둘기를 내어 보냈더니 비둘기는 물이 있어 발붙일 곳을 얻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왔습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 사명을 주어 내 보냈는데 ① 까마귀 같은 인생을 사는 자가 있는가 하면 ② 비둘기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까마귀는 홍수로 인해 죽은 짐승의 시체나 각종 시체를 먹느라고 방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까마귀는 썩은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썩은 시체들을 뜯어 먹으면서 거기에 발을 붙이고 살았습니다. 이는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사는 까마귀 같은 인생을 묘사하겠습니다.

그러나 비둘기는 건조한 곳을 좋아하고 깨끗한 곳을 좋아합니다. 비둘기는 순결과 정조, 평화를 상징하는 새입니다. 또, 성경에는 “성령”을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비둘기는 정결한 곳을 좋아하므로 성도(聖徒)를 표시하기도 합니다. 썩을 세상에 실망하고 발붙일 곳을 얻지 못하고 다시 방주로 돌아와서야 참 쉼을 얻는 것, 그것이 성도입니다.

 Ⅰ.왜 비둘기가 발붙일 곳을 얻지 못했습니까

그 까닭은 온 지면에 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은 하나님이 심판의 채찍으로 주었으므로 비둘기가 발붙일 곳을 얻지 못했습니다. 비둘기 같은 신자들에게 발붙일 곳이 없고 살기 힘든 곳입니다. 오늘날 세상엔 하나님의 진노의 홍수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처럼 복 있는 성도는 어느 쪽도 설 곳이 없고, 앉을 자리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오만한 자리라서 앉을 곳이 없습니다. 어디 날개를 접고 비둘기 한 마리가 앉아 쉴 곳을 찾았으나, 쉴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전부 흙탕물이요, 썩은 시체만 떠 있어서 비둘기 같은 신자들에겐 앉을 곳이나 쉴 만한 곳이 없습니다.

까마귀 같으면야 전부 앉을 곳이고, 전부 갈 곳이고, 전부 머무를 곳이고 발붙여 맘껏 즐기며 살 곳입니다.

그러나 비둘기는 갈 곳이 없습니다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제가 이 설교를 하면 성도님들은 “그 목사 고지식하다”고 할 것입니다.

몇 달 전 타 지방에서 성경 공부를 하고서, 저를 대접한다고 볼링 장을 가자고 하기에 “난 볼링을 쳐 본 일이 없어서 안 간다”고 했더니 요사이 이런 목사가 어디 있느냐며 하도 권유하기에 한번 따라 가 보았습니다. 모두들 잘 치더군요. 멋도 있고요. 또, 뭐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도 노래 방에 신부들과 가 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노래 방에도 가 보질 않았습니다. 요사이 당구는 스포츠로서 많이 들 한다고 하지만 그곳도 갈 곳이 안되고 어디 갈 곳이 없습니다.

진정한 성도는 갈 곳이 없습니다. 우리 성도가 세상에서 성스러운 거룩한 생활을 하려면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살 길을 찾기 위해서 유일한 방주로 돌아오라고 합니다. 방주 안에서는 한 번이라도 날개를 접고 쉴 수 있지만 방주를 떠나면 괴로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둘기란 방주를 중심으로 해서 살아가야만 평안히 잇고 잠시라도 쉼을 얻습니다. 노고지리 통 같지만 방주 안에 찾아 들고 여기만 들락날락해야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둘기는 신자의 영혼을 잘 묘사해 줍니다. 사람들의 영혼은 때때로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모든 것을 관찰해 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고서는 어디서나 안식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오랫동안 날아 다녀 보아도 결국 자기 자신의 합당한 안식처로 돌아오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만족이 없습니다. 일단 자기 안에 영광의 소망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모신 체험이 있었던 사람은 주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고는 안식이나 영광을 절대로 찾을 수 없습니다.

 Ⅱ.방주를 떠나 날아가는 비둘기

홍수로 인해 근 1년 동안 방주 안에 갇혀 있던 비둘기가 갑갑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동료 비둘기는 다 멸절되고 방주 안에 든 비둘기만 살았습니다. 닫혀 있던 방주의 창을 열고 노아가 물의 여부를 알려고 내어 보내니 좋아라 날아갔습니다. 방주만 떠나면 자유의 몸으로 어디든지 가고 자유 할 줄로 여겼을 것입니다. 방주가 거추장스러웠을 것입니다. 부담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방주만 떠나면 자유하고 행복하리라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방주 안에 갇혀 있던 비둘기가 방주에서 나와 푸른 하늘을 보자 말자 통쾌하게 훨훨 날아갔습니다.

어딘지 방향 없이 훨훨 날아갔습니다. 비둘기는 동쪽으로, 북쪽으로, 남쪽으로, 서쪽으로 사방을 날아 봅니다. 날다 보니 날개가 아프고 피로가 왔습니다. 나무 한 그루가 뽑혀 물 위에 돛단배처럼 둥둥 떠 있어서 여기라도 사뿐히 앉아 보려고 했으나 이 나무는 온통 진흙과 오물로 뒤덮여 있습니다. 물 묻은 진흙이 자기에게 어울릴 턱이 없습니다. 그래서 또 날개를 펴고 날아갔습니다.

또, 저 멀리 있는 물체가 매력을 끌기에 그는 죽을 힘을 다해 날아가 보았지만 거기도 쉴 만한 곳이 되지못했습니다.

 인생이라면 자기 나름대로의 날개가 있습니다.

그 날개가 있기 때문에 날아 보려고 합니다. 날개가 있기에 날아서 쉴 곳을 찾습니다. 날개의 힘은 한정이 있습니다. 이 날개는 인간의 재능과 지혜나 재력을 상징하겠습니다. 이런 것들로 제 맘껏 날아서 멀리멀리 올라가기도 하고, 날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한 마리 비둘기가 방주를 떠나 멀리 멀리 가면 갈수록 자기 날개는 아프고 돌아오기에 힘이 듭니다.

아직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인 물 아래 사는 비둘기 같아서 방주를 떠나는 생활을 하며 멀리 가면 갈수록 고달프고 힘이 들고 어렵습니다. 멀리 가면 갈 수록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했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올 때까지 좀 답답하고 비좁지만 그때까지 방주를 중심으로 해서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합니다. 부자유스러운 것 같아도 복음의 방주 안에서 살아갈 때 거기에 참된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

항해하는 선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한참 철새가 오갈 때쯤이 되면 철새들이 배 가에 날개를 접고 쉬다가 날아가는 것을 본다고 합니다. 비둘기가 피로한 몸을 몸체 맡길 수 있는 곳은 방주 안입니다. 거기는 노아가 있어 받아 주며 모이도 줍니다. 영적으로 기진 맥진한 실패자가 쉴 곳은 오직 방주인 교회뿐입니다. 이 방주 안에는 노아처럼 유일하신 하나님이 계셔서 힘을 주시고 은혜를 입혀 주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란 말은 헬라 말로 에클레시아라고 해서 ‘불러낸 무리의 모임’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말로 디아스포라라고 해서 ‘흩어지는 무리’라는 뜻입니다.

즉 흩어졌다가 또 모여서 힘을 얻고, 또 흩어지고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한 주간 흩어졌다가(디아스포라) 모이는(에클레시아) 이것이 신자인 비둘기가 해야 할 일입니다. 신년 벽두에 서서 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모이고 새 힘을 얻고 또 나가서 교인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Ⅲ.비둘기가 발붙일 곳을 찾지 못했을 때는 돌아와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비둘기 같은 신자는 세상에서 실망하고 낭패를 당했으면 주님께로 돌아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조그마한 유산의 날개로 아버지 품안을 떠났던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처럼 돌아와야 하고, 구약의 나오미처럼 방주의 생활이 힘겨워 모압에 내려가 날개가 꺾어진 쳬로라도 돌아와야 합니다. 돌아올 때 거기에 진정한 행복과 만족이 있습니다.

비둘기는 날다가 지쳤을 때 안간힘을 다해 방주로 날아왔습니다. 이것이 잘한 일입니다. 120년간 방주를 지어 기다리고 있던 방주 안으로 날아 왔을 때 노아는 팔 벌려 기뻐 맞아 주었습니다. 우리 쉴 곳을 마련키 위해 예비한 방주 안으로 우리가 찾아 들 때 참 쉴 곳을 얻습니다. 거기는 인자한 노아가 팔 벌려 비둘기를 받아 드리는 것 같이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날개에 흙이 묻고, 온 몸이 물에 젖은 체로, 상처가 난 체로, 흙탕물이 튀어서 더러워진 체로 돌아오면 하나님은 방주 안으로 노아처럼 날개를 씻어 주시고 상처를 싸매 주시고 치료해 주시고 모이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찬송 315장처럼 집을 나간 자여 어서와 돌아와 어서와 돌아 오라 하십니다.

 까마귀처럼 행여나 가 버리지나 않았나 문을 열고 기다리시는 우리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십시오. 피로에 지친 자여, 실패한 자여, 날개를 접고 오십시오. 쉴 곳도 있고 막을 것도 있습니다.

요세푸스는 말하기를 “비둘기가 날다가 흙탕물과 진흙으로 얼룩진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다” 고 했습니다.

우리는 비둘기처럼 인생을 헤매다 고생을 하며, 실패도 하며, 날개가 꺾이기도 합니다. 흙탕물로 얼룩진 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찬송가에 있는 대로 그 크신 공로를 모르고 깊은 죄악에 빠져서 그 뜨거운 사막 가운데 늘 헤매고 다녔네, 오! 사랑의 구주님 내 맘을 곧 엽니다. 곧 들어와 나와 동거하며 내 생명이 되소서.

 Charles Wesley(찰스 훼스레) 목사님이 1740년에 441장 찬송 가사를 작시했는데 그 배경은 이러합니다.

목사님이 조지아 식민지로 갈 때 심한 폭풍우를 만나서 어느 동굴로 피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새 한 마리도 폭우를 피하다 매에게 쫓기어 어찌할 줄을 모르다 훼슬레 목사님의 코트 속으로 날아들었습니다. 새는 추위와 비에 젖어 파르르 떨고 있었습니다. 쫓던 매도 날아가고 시간이 흐르자 이 작은 새는 새록새록 잠이 들고 어느덧 깃털이 포송포송 마르고 눈망울이 맑아졌습니다. 안도의 숨을 쉬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재잘거립니다. 그것을 보고 441장 찬송 시를 쓴 것입니다.

 1. 비바람이 칠 때와 물결 높이 일 때에 사랑하는 우리 주 나를 품어 주소서 풍파 지나가도록 나를 숨겨 주시고, 안식 얻는 곳으로 주여 인도하소서.

 2. 나의 영혼 피할 때 예수밖에 없으니 혼자 있게 마시고 위로하여 주소서 구주 의지 하옵고, 도와주심 비오니 할 수 없는 죄인을 주여 보호하소서.

 노아는 비둘기가 지진 체, 흙을 날개에 묻힌 체 창밖에 날개를 퍼덕일 때 손을 내밀어 받으시며 얼룩진 것을 씻기시며 떨어 주시며, 어루만져 주십니다.

비록 그 입에 가람 나무 잎사귀가 없어도 반갑게 반갑게 받아 주었습니다.

비둘기는 방주를 떠나 멀리 멀리 갈수록 피로하고 지칩니다. 발붙일 곳이 없는 고해 바다, 흙탕물이 넘실거리는 곳에 접촉하지 말고 있는 힘을 다해 방주로 날아오십시오. 참 쉼, 참 안식이 거기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십니다.

② 이사야는 보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불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1:18) 주님께서 죄로 흙 묻은 우리 몸을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이 씻어 주십니다. 우리 진홍 같은 죄를 눈 같이 양털 같이 희게 씻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모습 그대로, 실패한 그대로, 젖은 그대로, 병든 그대로, 발붙일 곳 없고 맘 둘 곳 없을 때 그대로 방주로 돌아오십시오.

다윗은 시 55:6절에 “내가 비둘기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서 쉬리라” 했습니다.

한번이라도 그리스도를 모신 체험이 있었던 사람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고는 안식이나 평강이 절대로 없습니다. 참 안식과 평안은 주님의 품안입니다. 방주 안 노아인 그리스도 안입니다. 거기에 참 평안과 안식이 있습니다.

 1996.

 1.

 7.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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