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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빛 가운데 행하라 (요 1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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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나사로가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고치기 위하여 베다니로 바로 가셔야 할텐데 오히려 이틀을 더 유하시다가 이제 가시는 것입니다.

3-8절으 읽어보시겠습니다.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예수게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 의 영광을 위함이며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 라 예수께서 본래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기 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 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우리는 이 내용을 보면서 놀라는 것은 베다니라는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된 소식을 듣고서 '베다니로 가자'거나 '나사로에게로 가자'고 하지 않고 '유 대로 다시 가자!'고 하셨다는 점입니다. 무었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셨겠습니 까 그것은 바로 앞의 요10:40절에서 "다시 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주 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셨더라"는 말씀에 대응되는 말씀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 11장이 요한복음에 있어서 제2부와 같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까지의 사역과 11장부터 끝장까지의 사역이 다릅니다. 앞 부분에서 는 예수님께서 진리되심과 생명되심 등등 우리에게 알게하고 싶은 내용들을 펼쳐놓 은 것이라면, 11장 이후부터는 펼쳐 놓은 장면이 아니라 행하시는 장면입니다. 사 람들 앞에 예수님께서 그의 진리되심과 구원의 핵심 되는 것들을 펼쳐 놓았을 때에 받는 반응이 무었인가를 결론 지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설명해도 오히려 돌로치려고 하고 죽이려 할뿐 알아듣지 못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사 실을 나타내는 것이 10장까지의 목표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잘 설명했는데 왜 그 바보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믿지 않았을까'를 나타내는 그런 대목이 아닙 니다. 우리는 알아들을 수 없고 선택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꺼꾸로 증명 하는 것이 10장까지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제2부인 11장부터는 예수님께서 우리 에게 복음을 전하거나 권유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알아듣지 못하는 우리를 고치러 오셨다는 것을 펼치시기 위하여 바로 십자가로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첫 사 건이 나사로입니다.

 <본론>

나사로를 언제 만나러 가십니까 살아 있는 동안 가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다음에 가서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죽어 가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 약을 먹으라, 저 약을 먹으라'하시면서 고쳐내는 장면이 아닙니다. 이것이 요 한복음에 있어서는 상당히 중심되는 사상입니다. 우리가 다 죽어가면서 어떻게 하 면 좋을지 몰랐을 때, 어느 날 영감을 받고, 혹은 용한 의사를 만나서, 혹은 좋은 약을 구해서 소생했다고 생각하셔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죽은 자들이었습 니다. 시체였습니다. 이 나사로를 살리신 식으로 이야기 하자면 이미 죽은 지 나흘 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살려 내십 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시체와 무슨 이야기를 하시겠습니까 '나사로야, 일어나 나오라!'하는 것은 누구에게 한 이야기입니까 '나사로야' 불렀더니 시체가 '네'하 고 대답을 했다고 했습니까 바로 이 부분이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예 수님의 이 말씀은 죽음과 사망에 대해서 그것을 깨고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선포되는 선언문일 뿐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놓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의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들, 곧 그 복음이 받는 은혜들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은 여러분들이 주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들은 것이 아니라, 죄 아래 있던 우리를 뽑아 내어서 우리를 움켜 쥐고 계셔서 여기에 앉혀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듣게된 것 입니다. 요한복음이 강조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말씀을 듣 고 설득당하고 그래서 선택한 자들이 아니라, 주께서 우리를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 만 붙잡아다 여기 앉히고, 눈을 뜨게 해서 이제 드디어 들을 수 있는 자가 되었다 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우리가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6절을 보면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 고 그 후에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십니다.

이 본문을 직역하면 이런 뜻이 있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그러므로 들으 시고 라고하여 '그러므로'란 말이 거기 하나 더 들어갑니다. 훨씬 이해하기 쉽게 말하면 '그러므로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일부러 이틀을 더 유하시고' 이런 뜻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일부러 시간을 지체하 셨습니까 21절을 보시면 바로 이 늦은 사건 때문에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 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되었다고 전해 들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는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인하여 영광을 얻게하려 함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수준이 며, 하나님의 지혜이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섭리하시 는 일들을 통하여 나타내십니다. 그리고 그 섭리 속에 가장 중심이 되는 대상은 바 로 인간입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항복되어지고, 완성되어지고, 인도되어 지는 것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 내시는 것입니다. 이 나사로 사건을 통하여 하나 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되 이 영광으로 인해 우리를 항복시키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시작한 이 나사로 사건은 우리의 구원 문제에 대한 하나님께서 목표하시는 것의 최고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 리를 지옥갈 자리, 형벌 받을 자리, 죄 아래 있는 자리에서 꺼내는 것이 전부가 아 닙니다. 물론 꺼내야 합니다. 지옥불에 타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꺼낸 우리 자신의 마음을 항복시켜 내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를 뜨거운 지옥으로부터 시원한 곳으로, 형벌받을 자리에서 좋은 자리로 지위를 바꿔 놓는 것이 일차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 에 항복시키는 것이 구원 문제에 있어서 최고의 싸움거리이고 최고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언제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달라! 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우리의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간 마음, 도망간 진심들을 회복시 켜 하나님의 무릎 앞에 꿇리는 작업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최고의 실력을 동원하 시고 지혜를 동원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원되 시는 것입니다.

본문 15절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예수님께서 일부러 늦어신 이유 중의 하나를 또한 이렇게 설명하시고 계십니다.

일부러 늦게 가셨는데 마다가 나중에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말하기를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을 늦게 오셔서 죽게 되었으니 이젠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라고 물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에게 가시기 전에 미리 그 말씀부터 하십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여기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었인가를 보십시오. 말 하자면 우리에게 믿음을 전제로 내 놓기를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다. 일방적으로 주 님께서 우리를 살리는 작업이 먼저입니다. 살려내어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가시 는 것입니다. 죽은 나사로처럼 우리는 진리와 생명에 대하여 무지했으며 전혀 반응 할 수 없었던 존재였습니다. 오히려 죽어 마땅하고 욕먹어 당연하다는 사실을 먼저 우리로 하여금 확인시키시는 것은 우리가 구원받고 중생하여 생명을 얻은 다음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중생받은 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선택해 야 되고 결심해야 되고 따라야 할 내용들이 많다는 것을 비로소 압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러 갑니다. 일차적으로 사건 자체만 따지자면 하나님의 말씀과 권면에 반응할 수 없는 자들이기에 예수님께서 친히 오셔서 수의를 입고 썩 어 문드러져 가고 있는 죽은 우리를 향하여 일어나라고 선언하심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우리를 일으키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일어켜 주시지 않는 한 은 우리에게는 어떠한 방법도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구원얻은 자 로서 볼때에는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며,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간섭하시는 분이시라는 멧시지를 보게 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이 순서를 절대로 바꾸어서는 안됩니다. 다시말해 선택을 위하여 성경의 여러 사건과 기록이 동원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었을 위 하여 동원되었습니까 이미 하나님께서 구원한 자 앞에다가 하나님이 누구시며, 하 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간섭하셨으며, 도대체 우리가 그 분에 대하여 어떤 꼴이었고 어떤 대접을 받아 마땅한 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찾아 오셨는가 하는 것을 설명해 서 우리의 마음을 뺏고 싶어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 있어서 중요한 핵심 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선택하기 원하시는 것은 운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항복을 위해서입 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의 운명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 라, '네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은즉 내가 누군가를 알고 내 앞에 너의 마음을 즐 겨 내 놓기를 바란다'라는 싸움일 뿐입니다. 나사로의 사건을 통해서 바로 이것을 원하셨는데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일라"는 말씀 가운데 이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 니다.

그런데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보면 이 사건이 조금 더 현실적으로 살펴볼 것 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하여 우리가 행복스러운 대목이 있는 것과 반하 여 행복스럽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은 시체 같은 처지에서 구 원과 생명으로 나아오는 과정이 아픔과 시련과 고난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 친척의 문제일 수도, 내 가정의 일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구약에 나타난 제사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상징하는 모습들을 이 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레2:11절을 보시면; "무릇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소제물에는 모든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 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 말하자면 첫 곡식이 나오면 소제를 드립니다. 농산물 중에 첫번째 수확물을 가지 고 하나님 앞에 가서 제사를 드리는데 이것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 하여 하나님 앞에서 제물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사역의 여러 면들 을 조금씩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제물 중에는 들어가지 말아야 할 것이 두 개 있었습니다. 하나는 누룩이고, 또 하나는 꿀입니다. 누룩은 정욕, 즉 욕심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역을 하시는데 있어서 이틀을 더 유하셨다는 것은 사실은 상당히 깊은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시는 일들, 우리 인생에 간 섭하셔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목적지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훨씬 뛰어 넘는다는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로 믿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 서 우리 인생에 간섭하시기 시작했고, 그 길을 우리는 다 헤아리지 못하는 것입니 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걸맞는 사람으로 삼기 위하여 고난의 길을 주시기도 히시고, 혹은 짐짓 외면하고 계시는 것같은 기간들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감상주의에 젖지는 않으십니다.

이는 피도 없고 눈물도 없으신 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나사로의 죽음에 오셔서 주님은 우셨습니다. 기억해야 할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 사건을 결론 짖는데 있어 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내용으로만 일관시키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우리의 결단이 요구되는 고난과 아픔의 일들이 등장되는 것 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유대로 가자!" 하시니, 제자들이 "방금도 유대인들이 핍박하고 죽이려고 했는데 거기를 다시 가십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대답하시 기를; 요11:9-10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 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 을 보므로 실족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고로 실족하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빛 가운데서 행하면 실족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열 두시'는 지금 우리 나라 시간으로 저녁 여섯 시입니다. 저녁 여섯 시란 아직 다닐만 한 때라는 것입 니다. 아직은 낮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아직은 내가죽을 때가 아니다'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무섭게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 낮에 다니는 것이고, 무엇이 밤에 다니는 것인가'하는 점입니다.

유대인들이 돌을 들고 있어도 하나님의 일을 하러 가는 것은 낮에 다니는 일이고, 돌이 무서워 후퇴하는 것이라면, 즉 인간들이 든 돌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보류하 는 것이라면 밤에 일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낮에 일하는 자들입니다. 낮이면 잘 들어야 합니다. 낮이면 모든 것 이 다 보입니다. 요한복음은 처음에 빛이 왔으되 빛을 보아도 빛이 무엇인지 모르 던 소경으로부터 시작한 책입니다. '낮에 다녀라 빛이 있을 때 다녀라!' 이렇게 말 씀하실 대상이 누구입니까 눈뜬 자들의 이야기입니다. 눈 뜬 자만이 낮이 있고 밤 이 있지 눈뜨지 않은 자에게는 낮이나 밤이 없습니다. 늘 밤입니다. 눈을 뜬 자를 향하여 낮에 다녀라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선별하라는 뜻을 넘어선 이야기입니다.

낮이 되었습니다. 빛이 비칩니다. 볼 수 있는 자들인 상대방을 향하여 낮에 다니라 고 하십니다. '네 눈을 떳는데도 왜 감고 다니느냐'는 이야기입니다. '낮에는 하 나님의 빛이 비치고 하나님의 의도하시고 요구하시는 길이 네 문 앞에 분명히 보이 는데도 불구하고 넌 왜 감고 다니느냐'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나사로 사건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시체 같은 우리를 일으 키시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한 걸음만 더 나아가서 보면 그렇게 해서 구원받은 우 리에게 예수님께서 지금 하신 일들은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나님이 예수 그리 스도를 보내어 우리에게 하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항복을 요구하고 있고, 그 항복을 할 수 밖에 없는 자라면 왜 낮에 다니고 있지 않느냐는 질문 앞에 서야 하 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대답은 여러분의 삶을 놓고 답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낮에 다니고 있습니까 성경이 요구하는 그 빛과 진 리와 생명의 요구 앞에 여러분의 인생을 비춰 보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사 로의 일으키심은 사실 무의미한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개인적으로 대답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단체적이지 않습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해야 할 가장 큰 싸움이 무 엇입니까 이것입니다. 교회의 싸움도 이것입니다.

내가 눈을 뜬 자로서 낮에 다니는 자 같이 단정히 행하고 빛의 자녀답게 사는 그 것이 우리의 본문이요 사명입니다.

여러분을 죽음에서 일으키시고 영원한 나라를 상속할 것을 약속하시고 최고의 사 랑과 최고의 지혜와 최고의 능력으로 간섭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삶을 모 두 꺼내 놓고 낮에 다니기로 대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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