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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율법의 의미(II) (마 05:2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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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절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간음은 십계명 중 제 7계명에 해당된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가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 아내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 형제를 해하지 말라" (살전4:3-6) 하였다. 이 말씀에서 가르치는 간음의 의미는 (1) 간음은 거룩하메 배치되는 부정한 것이며. (2) 자기의 아내를 존귀함으로 취할 줄 모르는 자들의 소행이며. (3)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의 본능적 처사이며 (4) 정욕의 정상적인 분수를 넘어 형제를 해치는 처사다 히브리 기자는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리라" (히13:4). 하였다.

 간음에 대한 예수의 정확한 가르침은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를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라" (마태복음 5:32) 했다.

 28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이 말은 남자에게 해당되는 말로, 이는 남자가 성적인 면에 있어서 공격적이기 때문에 한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상대적이어서 여자에게도 해당된다. 이 말의 근본적 핵심은 나타나지 않은 마음의 범죄를 지적한 말이다.아무도 모르는 마음의 세계에서 비정상적으로 여자가 남자에 대하여, 남자가 여자에 대하여 음욕을 일으킬 때 이것이 곧 간음이라는 예수의 말씀이다. 이유는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범죄의 현상은 이미 마음에서 시작되었기 대문이다. 이러한 이런은 당시 율법주의자들과 큰 차이를 보여준다.

예수의 간음이론은 행동적이거나 결과론적인 간음보다는 보다 근원적인 면에서 보이지 않는 죄악의 뿌리와 근원을 밝힘으로써 마음의 세계에서 죄악의 발생과 발달을 막아 성결한 심령을 만들기 위함이지 외형적인 거룩을 좇음이 아니다.

 29절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를 실족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네 배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절 "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내버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29,30절의 구조적 형태는 똑같다. 만일, 오른, 너로 실족케, 내 백체중,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 유익, 이상의 것들이 모두 같은 형태의 용어이다. 그러나 다른 점도 있다. 눈,빼어버리라(29절) 손.찍어 버리라(30절) 와 같은 것들은 다르다. 손과 눈은 소재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때 29,30절은 모두 동일하다고 해야할 것이다. 29,30절에서 생각해야 할 과제는 27절에서부터 간음에 관한 문제를 말하다가 갑자기 오른 눈과 오른 손을 빼고 찍어 없애라고 하는 급격하도도 과격한 말을 함과 동시에 지옥에 던지우는 종말론적인 말슴이 나온 까닭이다.

29-30절이 27-28절과 무관한 말로 인식하기가 쉽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31-32절에서 다시 음행과 간음에 대하여 계속 말함으로써 29-30절의 말씀이 음행이나 간음에 무관한 말이 아니라 큰 관계가 있음을 시사해 준다.그렇다면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음란과 간음은 눈으로 봄으로써 시작된다. 즉 견물생심과 같다. 이성이 서로 눈으로 보는 가운데서 음란과 간음의 씨가 움튼다. 그러나 보았다는 그 자체가 음란과 간음 자체가 아니다. 이성을 서로가 보았으나 절제와 근신, 성결과 구별됨에 의하여 거룩하게 삶을 살 수 있다. 그렇지 못 할 때 음행과 간음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근신과 절제, 구별됨과 성결이 없는 음행과 간음으로 발전되지 못하도록 오른 눈을 빼라고 했다. '오른눈' 이라고 하는 '오른'의 의미는 힘과 강함으로 뜻한다. 두 눈을 빼지않도록 하게 하는 것은 경건과 근신이다. 눈은 작은 것이로되 이 눈이 범죄의 길을 열어 줌으로써 전 인격과 생명이 지옥의 판결을 받게 된다면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철저한 회개와 근신과 절제를 통해서 영생에 이르게 하기 위한 예수의 가르침이다. '오른손을 찍어버리라'함은, 손은 행동을 뜻한다. 예수께서는 행동의 대표적 자체로 보았기 때문에 찍어라 했다.

즉 음행과 간음의 행동을 중지시킴을 강조하는 말이다. 이토록 예수께서는 종말론적인 신앙 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회개의 결다늘 촉구함으로써 죄악과 구별된 성결한 삶을 가르쳤다.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는 자들이 유대 랍비들(범죄의 행위와 결과 대하여 처벌받는 것을 가르치는 신앙의 지도자)과는 달리, 범죄의 발발이 되는 근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겪는 눈을 빼는 괴로움과 손을 찍는 고통을 단행함으로써 미래와 영원한 세상에서 지옥의 멸망에 들어가지 않도록 진리의 삶을 보여 주었다.

 31절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이 말씀은 신명기 24:1-3을 근원으로 삼고 있다. 이에 대해 마태복음 19:7-8에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증서를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모세가 허락한 이혼의 허락은 상항적 편법이 었음을 말함과 동시에 원천적인 면에 있어서는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라고 말함으로써 이혼은 결격 사유(간음의 증거) 가 없이는 할 수 없음을 가르쳐 줌으로써 가정의 안정과, 평화의 질서를 강조하였고, 남여의 성의 질서와 순결을 유지해야 함을 주장했다.

 32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 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간음의 과오가 없는 여인과 이혼하는 것은, 간음의 세포분열과 같은 범죄의 번식이 일어나게 하고 혈통과 신앙정신을 혼탁하게 함으로써 사회와 가정의 성 질서가 무너져 거룩한 신앙행위와 의의 진리생활에서 멀어지게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간음에 대하여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는 없느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랴,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서 죄를 범하느니라" (고전 6:15-18)라고 하였다. 바울이 주장하는 음행의 이론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구원 받은 자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다.

고린도전서 3:16에서 우리의 몸은 성령에 계시는 하나님의 전이라 했다. 이러한 구원받은 성도의 몸을 가지고 이혼한 여인에게 또는 이혼한 남자에게 부도덕하고 불경건하게 또는 창녀와 남창에게 결합한다면 이는 하나님에게 큰 죄인이 되며 또 결합하는 대로 그와 하나의 몸이 된다는 사실이다.

 (2) 구원받은 성도의 몸이 타락한 자와 결합한다면 그와 한 영이 된다.

여기서 음행은 단순한 음행이 아니라 영적 세계의 행위를 말한다. 즉, 창기와 결합할 때에 그와 한 영이 되고 이혼한 남자와 여자에게 결합할 때에도 그들과 한 영이 된다는 바울의 이론이다. 이것은 타락한 자의 영과 하나가 된다는 똑같이 회개해야할 공범자가 됨을 말한다.

 (3) 음행의 죄는 몸안에 있다.

음행의 죄가 몸 안에 있음은 음욕이 사람의 본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며 이 음욕이 음행으로 나타난다. 이 죄악의 근본은 본능적인 성적 작용이기 때문에 다른 범죄와 크게 다른 결과에 이르게 된다.

예수께서 말씀한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라는 말과 같이 간음의 사실이 없는 여인과 이혼한다면 이 여인의 영혼과 구원의 길을 외면하며 짓밟는 자가 된다. 그러므로 범죄의 사실이 없이는 해서는 안된다. 이와 같은 예수의 음행과 간음에 대한 가르침은 모세의 가르침에(마태복음 19:3-9) 대한 바른 해석을 가르쳐주기 위함이 었으며 또 당시 바리새인들의 이혼에 대한 가르침이 바르지 못함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었따. 예수께서 활동하던 시대를 예수께서는 음란과 패역의 시대라고 지적했다.(마태복음 12:39, 마가복음 8:38). 이러한 시대의 타락한 조류를 예수께서 지적하면서, 가르치는 자들의 잘못을 책망했다.

 33절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 맹세를 하지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이 말씀의 근원은 모세의 오경에서 찾을 수 있다.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위기 19:12). 이외에도 민수기 30:2,신명기 23:21에서 볼것들을 종합한 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맹세는 그 원문의 뜻이 맹세, 저주, 약속이라는 말이다. 맹세는 말이나 자기 주장이 참되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입증하지 못할 경우 그 주장의 신뢰성을 높이는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맹세에 사용된 말의 구조의 대하여 성서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면 거의 모두가 "명예를-걸고-말하거니와" (On-my-word-of honor)라는 공식과 흡사하다. 신앙인에게서 만이 아니라 하나님은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라고 말씀하셨다.(창22:6,암6:8, 사45:23).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라고 말씀하였다.

(겔 17:19) 하나님은 '큰 이름으로' (렘 44:26) 그의 '거룩함'으로 (암4:2) '그 오른손, 그의 능력의 팔로'(사62:8) 로 맹세하였다.

신앙인들이 맹세할 때에 행한 형식과 행위를 살펴보면 (1) 손을 내밀고 (겔 17:18) (2)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며 (신32:40) (3) 환도뼈 아래 손을 넣는 일(창24:2,47:29) (4) 특히 오른손을 드는 일 (단 12:7, 계10:5,6) 이상의 것들을 살펴볼 때 맹세의 성격은 자기보다 크고 거룩한 자에게 했고 그래야만 효과가 있었다. 자기 자신만으로서 능히 맹세할 이는 하나님 한 분 뿐이다.(히6:13).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옛적부터 그 성실성을 맹세할 때에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의지했고 그 이외의 신의 이름으로 맹세하면

1.2계명을 범하는 것으로 알고 이러한 맹세는 도저히 행할 수 없는 일로 알았다. 여인들은 잉태를 위하여 맹세하고 또 맹세대로 응답받고 실행했으며 장군들은 전쟁에 나갈 때에 맹세하고 나감으로 개선하였다. (삿 11:29)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의 심령이 약해지고 세속화 됨에 따라서 맹세를 반드시 지키려는 의지보다는 하나의 요식 행위가 되었으며 어느 면에서는 맹세를 이용하여 (빙자하여) 자기들의 삶을 위한 처세방법으로 사용함으써 여호와 하나님의 신뢰성과 거룩성을 하락시켜 제3계명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한 계명에 저촉이 되어 하나님의 성성을 짓밟는 결과에 이르게 되었다.그러므로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 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라는 말씀을 함으로써 예수께서는 사람이 사람에 대해 하는 맹세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맹세로 말하였다.

 34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 임이요"

예수게서는 단호히 맹세를 거절했다.맹세는 사람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거짓에 치우칠 경우도 있으며 또 감정적일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한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수단일 수도 있는 맹세이기 때문이다. 구약 성서에 대하여 명예를 훼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좌인 하늘을 맹세의 조건으로 삼지 말라 하였다.

 35절 "땅으로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이기 때문에 맹세한 조건으로 이용하지 말라 함이다. 실천하지 못할 경우 하나님의 명예에 누를 끼치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큰 임금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큰 임금이라함은 시편 48:2,99:2의 말과 같이 왕 되신 주님이 계신 도성이기 때문이다.

맹세를 실천하지 못하면 거룩한 성을 욕되게 하기 때문이며, 또 큰 임금을 욕되게 하기 때문이다.

 36절 "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 이라."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머리털을 근본적으로 희고 검게 만들 수 없다.

그런데 어찌 머리로 맹세할 수 있느냐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의 뜻대로 우지 좌지 할 수 없는 것 (하늘,땅,예루살렘성, 사람의 머리 등등)으로 맹세하는 것은 무책임한 맹세이며 미래를 모르는 사람이 맹세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기 때문에 어떤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라 했다.

 37절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이 말씀은 아교보 5:12의말과 같은 가르침인 것을 볼 수 있다. 예수의 가르침은 흑백논리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옳은 것을 옳다 하지 않는,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하지 않는 (또는 못하는) 예수시대의 율법주의자들과 서기관 바리새인들의 신앙생활 방법을 지적한 말이다.뿐만 아니라 옳은 것을 옳다 하지 못하고 아닌 것을 아니다 하지 못하는 백성의 무력한 언어 세계를 지적한 말씀이다.예수께서 가르치신 맹세에 있어서는 아니면 아니고 옳으면 옳다는 하지 못하고 여기에서 벗어나는 맹세의 방법으로 빗나갈때 바로 이것이 악으로부터 좇아나는 것임을 말했다.

진실한 자에게는 맹세라 해당되지 않으면, 변명과 구구한 말이 없이 단순할 뿐이다. 언어는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에 맹세를 자주하는 자는 진실치 못한 사람이다. 마음에 궤계와 술수가 많은 사람일수록 맹세가 많다.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들은 심령의 진실롸 정직으로 언어의 진실한 삶을 생활화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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