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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설날을 주님안에서 보냅시다. (레 위기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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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28일은 우리 민족의 대대로 내려오는 명절인 설날입니다. 아마도 설을 맞아 수백만의 발걸음들이 고향을 찾아 내려갈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성도들도 대부분이 고향을 찾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설에 고향을 떠나서 멀리 떨어져 있던 자녀들이 부모님과 친지들을 찾아뵙고 평소에 다하지 못한 효를 실천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 설은 효와 믿음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어야할 것입니다.

성경은 육신의 어버이께 효성을 다하는 것이 축복의 근거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레위기 19:3, 출 20:12 ) 육신의 어버이께 효도하지 않는 자녀는 결코 하늘의 아버지를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살아계신 어버이뿐이 아니라 죽은 조상들 까지도 효를 행하여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돌아가신 조상들을 위한 제사에 지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버이에 대한 효를 가르치고 강조하면서도 돌아가신 조상을 예배하거나 경배하는 행위에 대하여는 엄격히 금하였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신자들 마저도 전통적인 제사의식 문제에 부딪혀서 갈등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이번 설을 양정의 성도들이 주님안에 보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추모 예배를 드릴 때 주의점

① 음식 준비 / 음식은 조상이 와서 먹는 것이 아니므로 제사상으로 차리면 안된다. 그러나 간편한 음식을 준비하였다가 추모 예배후에 가족들이 둘러 앉아 나누는 것은 좋은 일이다.

② 사진이나 영정 / 고인의 사진을 준비하는 것은 좋으나 향이나 촛불을 켜는 것은 기독교적이 아니다.

③ 절하는 문제 / 고인의 사진이나 영정 또는 음식물을 향하여 절을 하는 것은 우상 숭배를 금한 계명을 범하는 것으로 죄가 되므로 절대로 하지 않아야 합니다. 부모 공경은 살아 계실 때 최선을 다해서 해야하고 살아계신 부모님께 절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죄가되지 않는다.

④ 불신 가정에서의 문제 / 가족 전체가 불신 가정으로 제사를 드려야하는 입장에 있을 때는 그 자리를 피하지 말고 절하는 대신 가족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 된다. 이 때 분명하게 신앙상의 이유로 절은 할 수없지만 가족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드리겠다고 가족앞에 태도를 분명히 밝히는 것이 좋다.

⑤ 산소에 성묘갔을 때 / 음식을 차리고 절을 한다든지 묘지에 술을 붓는 행위는 신앙적인 것이 아니다. 대표자가 간단히 기도하고 묘에 묻힌 조상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나누고 묘지의 상태를 점검하고 돌아보면 됩니다. 불신 가정일 경우에는 다른 가족이 절할 때에 함께 서서 기도하고 가족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할 수있도록 여러모로 힘쓰십시오.

⑥ 기타 / 우리도 언젠가는 조상들처럼 육신은 한줌의 흙이 되어 하나님 품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깨달아야 하며, 조상들이 볼 때에 부끄럼 없는 삶을 살기 위해 다짐해야 하고, 형제 자매들 간에 더없는 우애와 사랑으로 살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결심하는 시간이어야 하며, 조상들이 남겨 놓고 가신 훌륭한 뜻을 받들어 교훈을 받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설날가족예배자료 (98년2월28일)

즐거운 명절을
주님안에서 가족과 함께.....

1930년대 초 미국은 심한 불경기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경제공황이 온 것입니다.
문을 닫는 공장과 은행이 늘어나고 거리에는 직장을 잃은
실업자들이 할 일 없이 어슬렁거렸습니다.
그런 때에 한 극장에 “입장료 없슴”라고 써 있는 광고가 있었습니다. 할 일 없이 거리를 방황하던 실업자의 무리들이 몰려갔고,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고 생각하며 무료로 입장하여 재미있게 영화 구경을 하고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윽고 영화는 끝나고 퇴장 시간이 되었습니다.
관객이 하나 둘씩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슬슬 퇴장을 하는데, 출입구 양쪽에 어깨가 딱벌어진 장정들이 서서 돈을 내고 나가라고 하는 것이였습니다.
놀란 군중들은 입장료가 무료 아니였느냐고 따졌습니다. 그러자 문지기가 말했습니다.
"예, 맞습니다. 입장료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퇴장료는 있습니다."
사람들은 공짜 영화인줄 알고 입장료 없이 들어왔다가 퇴장료를 내고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길도 이와 같은 것 아닐까요

대한예수교
장 로 회 전주양정교회

담임목사 박 재 신

-전주시 덕진구 송천 2가 225-12
☏ 75-9727 251-1903

설날감사예배순서

 시작하는말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설을 맞이하여 오늘 까지 우리 가족들을 지키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대하여 감사드리는 예배를 다같이 묵상 기도를 드리므로 시작하겠습니다.

 묵상기도 / 가족들은 묵상으로 기도하고 사회자가 낭독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찬 송:460
 성시교독:1번(시편1장) <다같이 사회자와 교독한다>

사회자 /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회 중 /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사회자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회 중 /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사회자 /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회 중 /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사회자 /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회 중 /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사회자 /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다같이 /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신앙고백:사도 신경을 외우므로
 대표기도:가족중에서
 성경봉독:눅7:11-15
 설 교:인도자가 설교문을 낭독해도 됨 .
 기 도:설교자.

 가훈설명 (생략해도 됨)
연장자 또는 가족중에 제일 어른이 가문의 전통이나 조상들의 훌륭한 일들과 가훈등을 자손들에게 설명하고 교훈 한다.

 찬 송:305
 폐 회:주님이 가르친 기도를 다함께 드리고 마친다.
 다과와식사 / 또는 가족 기념사진 촬영
추모예배에 참석한 가족들과 음식을 나누며 자유스럽게 대화하고 가족들이 기념으로 사진을 촬영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찬송가

460장 1절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2절 몸도 맘도 연약하나 새 힘 받아 살았네
물 붓듯이 부으시는 주의 은혜 족하다
사랑없는 거리에나 험한 산길 헤맬 때
주의 손을 굳게 잡고 찬송하며 가리라

3절 주님 다시 뵈올 날이 날로 날로 다가와
무거운 짐 주께 맡겨 벗을 날도 멀쟎네
나를 위해 예비하신 고향집에 돌아가
아버지의 품 안에서 영원토록 살리라

305장

1절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 우리 집 즐거운 동산이라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
고마워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 하루

2절 어버이 우리를 고이시고 동기들 사랑에 뭉쳐 있고
기쁨과 설움도 같이 하니 한 간의 초가도 천국이라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
고마워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 하루

3절 아침과 저녁에 수고하여 다같이 일하는 온 식구가
한 상에 둘러서 먹고 마셔 여기가 우리의 낙원이라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
고마워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 하루

 추도예배의 의미

예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시다. 돌아가신 조상들은 이미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 육신은 한 줌의 흙이 되어 주님 다시 오실 때 까지 흙 속에 묻혀 있게 되고 신자의 영혼은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삽니다. 물론 불신자의 영혼은 지옥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이 세상에서 헤메거나 다시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입장에서 가져야할 조상들에 대한 태도는 예배와 숭배의 대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그 남겨두신 뜻을 받들어 생전의 덕을 기리고 조상들의 명예와 이름 앞에 부끄럼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조상의 기일에 제사상을 차려 제사를 지내고 끝나는 정도의 추모가 아닌 조상들에게 부끄럼 없는 성경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기독교적인 제례의 의미이다.

설날 가정 예배 설교문

제목 / 우리의 절망을 위로하소서
본문 / 눅7:11-15

예수님 당시에 나인성이라는 곳에 한 여인이 살았습니다.
그는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키우며 행복을 가꾸어가던 어느날 갑자기 남편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꽃다운 나이에 과부가 된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 찾아왔습니다. 남편을 잃은 슬픔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와 어린 것 남겨두고 떠나간 남편이 원망스럽기만 하였습니다.
그래도 아들이 있었기에 조금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는 아들을 생각하여서라도 용기를 내야지... 그리고 참아야지....라고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달래며 여인은 슬픔을 잘 견디어냈습니다.

여인은 재혼하지도 않고 혼자서 아들을 키웠습니다.
아이는 고맙게도 아무탈없이 잘 자라서 청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여인의 슬픔도 잊어지고 아들과 함께 행복을 느끼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유도 없이 이번에는 아들이 갑자기 죽은 것입니다. 성경은 그의 사망원인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습니다. 병들어 죽었는지 무슨 사고를 당하여 죽었는지 전혀 언급이 없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여인이 걸어가는 인생길이 참으로 기구하다는 것입니다. 남편을 잃고 과부되어 십수년을 고생 고생하며 키운 아들인데 그 아들 마저 여인의 곁을 떠나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말을 빌리자면 팔자가 되게 쎈 여자인 셈입니다.
여인에게 아들의 죽음은 하늘이 두 번 무너지는 것이였습니다. 남편이 죽었을 때는 그래도 자식이 있으니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슬픔을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무엇으로도 위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인정많은 동네 사람들이 슬픔당한 이여인을 위로하기 위해 모여왔습니다. 그리고 함께 울며 슬픔을 나누려 하였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이 여인에게 있어서 문제는 아들의 죽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인생들의 문제도 결국은 죽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무문제도 없는 것 처럼 살아갑니다.
자신에게는 정녕 죽음 같은 것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며 온갖 죄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죄의 대가를 치루도록 되었있습니다. 성경은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했습니다. 죄값을 치르어야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1930년대 초 미국은 심한 불경기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경제공황이 온 것입니다. 문을 닫는 공장과 은행이 늘어나고 거리에는 직장을 잃은 실업자들이 할 일 없이 어슬렁거렸습니다. 그런 때에 한 극장에 “입장료 없슴”라고 써 있는 광고가 있었습니다. 할 일 없이 거리를 방황하던 실업자의 무리들이 몰려갔고,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고 생각하며 무료로 입장하여 재미있게 영화 구경을 하고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윽고 영화는 끝나고 퇴장 시간이 되었습니다.
관객이 하나 둘씩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슬슬 퇴장을 하는데, 출입구 양쪽에 어깨가 딱벌어진 장정들이 서서 돈을 내고 나가라고 하는 것이였습니다.
놀란 군중들은 입장료가 무료 아니였느냐고 따졌습니다. 그러자 문지기가 말했습니다. "예, 맞습니다. 입장료는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퇴장료는 있습니다."
사람들은 공짜 영화인줄 알고 입장료 없이 들어왔다가 퇴장료를 내고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입장료 내고 이 세상에 들어온 사람 있습니까
그러나 입장료 없다고 해서 진짜 공짜인줄 알고 마음껏 즐기고 멋대로 살면 큰일 납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무대에서 퇴장해야 할 때에 우리에게 인생을 즐긴만큼 퇴장료를 거두실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11: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그렇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한 생애동안 하나님을 모르고 마음껏 세상을 즐기기만 하고 산다면.... 아니 어쩌면 그것은 자유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마지막에 무거운 퇴장료를 물어야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유흥가에 가서 흥청거리고 하나님을 떠나서 온갖 죄악을 일삼는 것은 자유지만, 퇴장료는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것도 자유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인생의 무대에서 퇴장해야할 날이 올 때 물어야할 퇴장료는 사망입니다. 지옥 형벌인 것입니다.

하루 하루를 값지게 삽시다.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 만큼 값진 것은 없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종교를 갖는 일 쯤으로 생각하고, 또는 취미생활과 여가를 활용하는 정도로 생각하여 아주 가볍게 취급하시는 분이 계실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분들이 생각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생애에 있어서 가장 작은 비중을 차지했던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 생활이 여러분 인생의 퇴장시에 그 어느것 보다도 여러분을 가장 값지게 해줄것입니다. 황금은 퇴색되고 부귀와 영화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안내할 것입니다. 신앙생활 잘하십시오.

사람들이 죽은 청년의 시신을 관에 넣어 밖으로 메어나갔습니다.
성밖 동굴 무덤에 장사하기 위해서입니다. 여인은 아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따라갔습니다. 울며 울며 아들의 시신을 담은 관을 붙잡고 따라갔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 성으로 들어오시다가 이 장례행렬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가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장례행렬을 보셨습니다. 아니 장례행렬을 보신 것이 아니라 그 과부를 보신것입니다.
13절에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과부의 무엇을 보고 그를 불쌍히 여기셨을까요
슬픔을 보신것입니다.
아픔을 보신것입니다.
그리고 절망을 보셨습니다. 보셨다는 것은 아셨다는 것과 같습니다. 여인의 슬픔을 아셨고 아픔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절망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그는 우리의 질고를 아는 자라”라고 예수님에 대해서 설명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언제나 불꽃같은 눈동자로 우리를 살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상황은 어떠합니까
북한의 동포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최근들어 국제 단체들이 아우성입니다. 그냥두면 몇 달안에 북한의 주민 수십만명이 굶어죽을 위기에 처해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우리와 한가지의 언어를 쓰며 한 땅에서 같은 조상들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혈족이 아닙니까
그들은 뿔달린 괴물이 아닙니다.
우리가 도와야할 동족이요 구해야할 형제요 자매인것입니다. 여차하면 북한이 붕괴될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마지막 수단으로 전쟁이라는 극단적 행동으로 나올지도 모릅니다.
중국에서는 북한이 붕괴되면 자기들 땅으로 밀려올 난민을 수용하기 위한 난민 수용소를 만들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일본도 한반도에서 전쟁이 날 때를 가정해서 지금부터 대비를 해야한다고 떠들고 있습니다.

여인은 아들의 죽음 때문에 절망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아이 엠 에프(IMF) 때문에 절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처한 이 시대의 상황을 보면서 절망하고 있습니다. 경제가 곤두박질 치고 나라가 어려워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결국은 우리의 죄악입니다.
한동안 우리가 너무 교만했습니다.
언제부터 그렇게 잘살게 되었다고 자만에 빠졌습니다. 국민들은 힘들고 위험한 일은 하지않았습니다. 이른바 3D 직종의 일은 기피하고 그저 쉽고 편하게 돈 버는 쪽에만 사람이 몰려서 서비스 산업만 번창하였습니다. 정부는 당장에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부자 나라가 된 것처럼 떠들었습니다. 막 써도 되는 때가 왔다고 은근히 국민들을 부추겼습니다. 국제화니 세계화니 하면서 잘못된 비젼을 심어준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인력시장의 판도가 바뀌였답니다. 실업자가 늘어나고 일거리가 줄어들자 품삯이 얼마고 일이 무엇이든 써주시기만 해달라고 사정해야 할 형편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하는 직장들이 우리가 외면했기에 다 문을 닫아서 이젠 일터가 그만 큼 줄어든 것입니다. 이제는 오만하고 자만했던 우리의 지난날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낮은 자리에 업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살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아들의 죽음은 여인에게 큰 슬픔이고 절망이였지만 그 절망을 통해 주님을 만나게 되엇습니다. 주님은 죽은 청년의 관에 손을 대시고 말씀하엿습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그랬더니 청년이 일어났습니다. 살아난것입니다.
아직은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통하여 하실 일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청년을 살리셨듯이 이 절망 중에 있는 이 나라와 이 백성들 아니 오늘 우리를 살리셔서 하실일이 있습니다.

청년이 살아나자 사람들이 깜짝놀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하여 큰 선지자가 우리가운데 일어나셨다. 라고 증거하며 그 소문이 각처로 퍼저 나갔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위로를 받았고 하나님의 복음을 널리 퍼졌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희망입니다.
이 국민들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상이 들어가야 합니다. 아니 오늘 우리들의 마음이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절망중에 소망이신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의 죽음을 일으키사 새로우 삶을 주셨습니다. 그분만을 의지합시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생활 방식을 예수 그리스도의 방식으로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바로 십자가의 도 입니다. 희생과 헌신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다시 희망이 옵니다. 하나님께서 위로와 복을 허락하실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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