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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속죄소 (요 08: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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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간음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잡아와 심판을 내려 달라는 본문을 통하여 이 사건이 주는 더 깊은 의미를 구약의 속죄소를 중심으로 하여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 다.

 <본론>

우선 히브리서 9:1-7절의 말씀을 찾아 보도록 하시겠습니다.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 일 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 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이 말씀에는 우리가 기억할 만한 구약의 아름다운 상징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나 오는 언약궤라는 것은 다른 말로 바꾸면 법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는 하 나님께서 친히 쓰신 두 돌판이 들어있기 때문에 보통 법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러나 이 언약궤 속에는 두 돌판 뿐만 아니라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 있습니다. 이것이 위치하고 있는 자리는 지성소인데, 지성소 안에는 금향로가 놓여있고 언약궤가 놓여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방금 읽은 6-7절의 말씀과 같이 지성소에는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번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제사장들은 물론 레위지파에서 뽑지만 레위지파라고 해서 누구나 제사장이 되고 대제사장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레위지파는 일차적으로 성전을 섬기는 일을 합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교회의 관리인들입니다. 물도 긷고 장작도 패고 청소도 하는데 이런 일들은 레위 지파가 아니면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제사장들만 첫 장막에 들어갈 수 있었으므로 그들은 늘 진설 병을 갈아 놓아야 하고 촛대도 늘 불을 밝혀 놓는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그러나 지성소에는 아무때나 무시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씩 들어가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속죄제를 드리는 곳이었습니다. 피가 없이는 못 들어가는 곳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출애굽기 25:17-22절에 보면 더 상세히나타나 있습니다.

"정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되 장이 이 규빗 반,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 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구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속죄소라는 것은 속죄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피를 쏟아 붓는 장소입니다. 그것은 법궤 바로 위에 위치하게 되어 있습니다. 속죄소의 두 끝에는 천사를 만들었는데 그 천사의 이름은 구룹입니다. 여기서 구룹이라는 것은 천사의 개인 명칭을 가리키 는 것이 아니라 직분 명칭인데 친위대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친위대이므로 그룹 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이 거기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룹들은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게 되어 있었고, 얼굴은 마주 보되 속죄소를 보게 되어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엄위로우신 통치권으로 이곳을 내려다보고 계시는 장소인 것입니다. 그 아래에 법궤가 놓여 있습니다. 이 것은 아주 상징적인 것입니다.

다시 17절을 보십시오.

"정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되..."라고 되어 있는데 속죄소는 다른 말로 시은좌, 즉 은혜를 베푸시는 장소라는 말입니다. 속죄소라는 말은 죄를 속해 주는 장소인데 어 떻게 해야만 죄가 속해집니까 피가 있어야만 합니다.

피는 죄의 대가로서 성경에서 죄에 대한 일관된 요구입니다. 죄값은 사망입니다.

사망은 피를 흘렸다는 의미이며 피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죄값으로 생명을 요구하여 받아낸 것이라면 그것이 어찌 시은좌가 될 수 있겠습니까 죄값으로 생명을 취하는 것은 마땅하지만 생명을 살려주고 대신 다른 것으로 대치시키겠다고 하면 시은좌 곧, 은혜를 베푸는 자리라는 말이 타당합니다.

그러나 죄값은 사망이므로 목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자리인데 어찌 시은좌가 된다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여기에는 틀리는 말이 서로 붙어 있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추적하고자 하는 말씀입니다. 밑에 있는 법궤야말로 인간이 누구냐 하는 것을 가장 대표적으로 구약이 지적하고 싶은 고소 들입니다. 인간이 누구냐면 법궤라는 말입니다. 다시말해 법궤 앞에서의 인간은 죄 악 투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흔히 법궤를 상상하면 훨씬 멋있는 것같이 느껴집 니다.

법궤 안에는 만나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율법이 들어 있습니다. 여기에 만나와 지팡이와 하나님께서 직접 새기신 두 돌판들을 볼 때에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함을 보게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거기에다 피를 붓습니까 그것은 그 법궤가 훨씬 다른 의미들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법궤 안에 들어 있 는 돌판과 만나와 지팡이는 곧 인간이란 얼마나 죄인이며 희망이 없고 한심한 존 재인가 하는 것을 지적하는 역사적인 고소장들인 것입니다. 이 법궤 안에 들어 있 는 돌판은 하나님께서 친히 써주신 것이지만 그것은 첫 번째 것이 아니라 두 번째 돌판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첫 번째 새긴 돌판을 받아 가지고 내려왔을 때 백 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경배하며 먹고 뛰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 돌판을 집어던져 깨뜨려 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두 돌판을 받았습니다. 그 두 번째 돌판이 법궤 안에 있는 돌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번째 돌판은 말씀하 시기 이전에 두 번째라는 그것 자체로 첫 번째 돌판은 어디 갔느냐에 대한 고소인 것입니다. 오늘은 그것을 더 확실히 하기 위해 만나 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출16:1-3절을 보십시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산 사이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제이월 십 오 일이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 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 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출애굽기 16장은 홍해를 건너서 찬송을 부른던 바로 뒷장입니다. 15장이 홍해를 막 건너와서 기쁨과 감사를 하는 장이라면, 16장은 그 찬송의 후렴이 끝나기도 전 에 일어나는 원망입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하나님의 열가지 재앙을 목도하였던 자 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홍해 바다를 육지같이 친히 건너 보았던 자들입니다. 또한 홍해에서 뒤쫓아 오던 애굽의 군사들이 수장되는 것도 보았습니 다. 그래서 그 구원의 감격과 기쁨에 환호성 속에 감사와 찬송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환호성 속에 감사를 드리다가 곧 지치고 배가고파올 때에 이제 원 성의 소리가 점점 커져 갔던 것입니다. 다시말해 공연히 건너왔다는 것입니다. 얼 마나 웃지 못할 사건입니까 여러분은 절대로 여러분의 신앙을 기적과 경험에 견주지 마십시오. 기적과 체험은 분명히 우리를 힘있게 하고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믿음의 근거로서는 부족 한 것들입니다. 신자치고 기적과 경험과 간증거리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신자가 가장 잘 흔들리는 곳은 일상 생활이 있는 곳입니다. 큰 문제로 흔들리는 것 이 아니라 바로 끼니 문제 때문에 흔들리는 것입니다.

조금 전의 말씀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뭐라고 하고 있습니까 비록 노예 이긴 했지만 우리는 고기 가마 곁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우리 인류가 갖 는 끊임없는 불평일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나서 맨 처음으로 요구하는 것이 무었이냐 하면 예수를 믿었 으면 이전보다 더 나은 것이 있어야 할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데 왜 더 가난해 지고, 아이들은 더욱 공부를 못하고, 더 아픈 이유가 무었이냐는 질문은 당연히 있어야 하고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봤자 해 답을 얻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아예 질문조차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더 잘못된 증 거입니다. 그러므로 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 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왜 주셨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과연 율법을 지키나 안 지키나를 보기 위해서 였습니다. 여기 출애굽기의 말씀처럼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 보다 나은 점이 조금도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이렇게 기도하신 분은 안 계십니까 '하나님 이 자식을 합격만 하게 해주신다면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라고 말입니 다. 그래놓고 막상 합격을 하고 나면 하나님께가 아니라 목사인 저한테 와서 묻습 니다.

'목사님, 제가요 그때 이런 기도를 하였는데 꼭 신학교에 보내야만 하나님께 바 치는 것인가요 돈을 많이 벌어서 헌금도 많이 내고 좋은 장로가 되면 안 될까요' 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느 누구도 이 시험을 통과한 자가 없다고 말씀합 니다. 이 시험은 시기적으로 홍해를 건너자마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광야 생 활 사십년이 지나고 나서는 어떻게 되었나 보십시다. 신 8:1-6절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 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네 하 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 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 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년 동안에 네 의복이 헤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너 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이제는 광야 생활 사십 년을 끝내고 가나안 입국을 눈 앞에 두고 모세가 그의 후 손들에게 간곡한 유언을 하는데, 바로 이것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너희는 광야 생활 사십 년 동안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잠자리에 대해서 불편한 적 이 없었는데 결과적으로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영향을 주었느냐'고 묻습니다.

원래 사십 년 광야 생활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의도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 간은 언제나 이미 지나온 과거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늘 현실 만을 귀중하게 여길 뿐입니다. 그러므로 홍해를 건너온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때가 되어 배가 고프자 지금까지의 기적은 아랑곳하지도 않은 채 현재의 배고픔의 해결만을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내가 먹을 것과 입을 것과 너희의 삶을 책임지겠다. 그렇게 하면 너희가 나를 믿는가 보자'하시며 본문의 말씀과 같이 의복이 헤어지는 일이 없고, 발이 부릍지 않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이 있는 곳은 광야 지대인 지라 일교차가 아주 심한 곳입니다. 낮에는 섭씨 오십도를 오르내리며 밤에는 영도 가까이 떨어집니다. 그런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 으로 평안하게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가 내려왔을 때 무었을 하고 있었 습니까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먹고 마시고 춤추고 있었습니다. 만나를 먹 으면서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먹을 것 때문에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에게 먹을 것을 풍성히 주셨건만, 그들은 불평한던 것이 해결되었어도 율법을 준행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앞으로도 그 기록이 나오겠습니다만 아론의 싹난 지팡이에 서도 동일한 사건이 생깁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먹고 힘을 내서 오히려 하나님께 대항하고 있는 것 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입니다. 먹을 것이 없음을 불평할 때 먹을 것을 주었 지만, 그것으로도 그들은 율법을 준행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출애굽기에서부터 신명 기까지의 기록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에 하나님께서 오셔서 이 문제를 해결만 해주신 다면 나는 절대로 하나님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 것처름 어리석은 생각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직 인간적인 필요에 불과할 뿐 입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구하던 먹을 것을 주면 그들이 하나님을 따를 것같이 생각하므로 먹을 것을 준 것이 아니 라, 하나님이 먹을 것을 주신 것은 그들을 시험하고 낮추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시험이란 너희가 과연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편인가 아닌가 알아보겠다는 말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편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 셈입니다.

이와같이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자발적으로 하나님 편에 속하려는 본성이 없습니 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만나 는 법궤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만나를 법궤 속에 넣어서 보관했을까요 그것은 인간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요구하는 이런 것들을 주면 너희 스스로 나를 찾으리 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종교일 뿐이지 그것처럼 어리석 은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기독교는 도를 깨우치는 종교가 아닙니다. 마치 부처가 도를 깨우친 것처럼 생각 하는 한 우리는 늘 시험에서 넘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가장 큰 적은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무었을 스스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해도 해도 스스로 될 수 없다느 것을 알고 마침내 주님께 항복하는 종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답과 행동이 바로 스스로 도를 깨닫겠다는 자세였습니다. 그 래서 '이것 저것만 알려 주시고, 약도만 잘 그려 주시고, 차만 보내 주시면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은 '너희는 죄인이니라. 빛이 왔으나 빛이 빛인 줄을 모르므로 빛을 증거하러 다른 사 람을 보내었더니 그도 죽였고 빛도 죽인 자이며, 너희는 장님이며 하나님에 대하여 관심도 감각도 없는 자'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또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꼭 이렇게 되묻습니다. 어떻 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데도 우리는 자꾸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 가 묻는 말이 '주여! 이제 도무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까지 가야하는 것입니 다. 이렇게 복음은 '그러면 나더러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가 변해서 '하 나님, 이제 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라고 낮아져 서 엎드려 빌기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먹을 것만 해결해 주면 믿을 것처럼 생각하므로 먹을 것을 주었는 데도 하나님을 믿지 않은 그들을 통하여 인간은 그 어떤 것이 해결된다고 하여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족속들이라는 것을, 즉 인간이 어떠한 존재들인가를 깨닫게 해주시기 위하여 만나를 보관케 하시는 것입니다.

속죄소는 법궤 위에 놓여져 있습니다. 그들을 죽여야 하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칼을 누군가가 대신 와서 맞아야 하는데, 그 때 흐르는 피는 바로 법궤 위로 흘러 넘 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법궤 안에 있는 것은 어떻게 됩니까 열어볼 것도 없이 얼마나 깊이 찔렀으면 피가 밖에까지 온통 젖어들었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병에 이미 물이 넘치고 있는데 그 병의 물이 어느 정도인지 쏟아보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것은 이미 꽉 찼으므로 흔들 필요도, 쏟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법궤 위로 피가 흘러 넘치는 것은 이미 속에 있는 것은 다 죽었다는 뜻 입니다. 이것이 그곳이 속죄소이며,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되는 동시에 시은좌가 될 수 있는 비밀인 것입니다. 여기서 칼은 어떻게 표현되어 있습니까 구룹들이 날개 를 펴고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밑을 보고 있습니다. 법궤, 즉 인간의 죄악을 들여 다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죄악을 해결하려면 죽이는 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으 므로 피가 철철 흘러 넘치도록 찌릅니다.

그러나 제사법에 분명하게 명시된 것처럼 법궤 안에 있는 것을 찔러 피를 흘리게 하여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들어온 제 3의 제물로써 속죄소를 적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누가 감당하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것은 이 사 건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유월절에서 이미 양을 잡음으로써 있었던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당시에 열 번째 재앙을 애굽 백성에게 내리셨던 하나님 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인방과 좌우 설주에 바르라고 명하 십니다. 문턱에는 왜 안발랐습니까 양을 문턱에서 잡았으므로 어차피 피가 묻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내신 천군이 내려와서 심판할 때는 이미 피가 묻 어 있으므로, 즉 그 안에 있는 것은 죽었다는 표시가 되므로 피를 바른 집에는 그 대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아무런 피해가 없는 우리 입장에서 볼 때는 재앙이 그대로 넘어간 것같지만 하나 님께서는 우리의 죄값에 대한 사망의 대가를 치르신 셈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흘려 야 하는 피였지만 우리가 흘린 피값보다 훨씬 비싼 값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속죄소의 사건입니다.

속죄소는 우리에게 죄값을 받아 내는 장소이면서도 동시에 은혜가 넘쳐나는 놀라 운 비밀이 숨겨진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요 주의 능력 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향하여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 라'는 말씀을 하실 수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구하러 오신 분입니 다. 그렇다고 죄를 그냥 덮어 놓는 것은 아닙니다. 죄값은 마땅히 치러야 하므로 예수님이 대신 치르려고 오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근거로 행야만 요한복음 8장 은 우리에게 완성적인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입니까 예수님이십니까 예수님의 제자입 니까 아니면 이 여인을 고소한 바리새인입니까 우리는 현장에서 잡힌 여인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언제나 바리새인처럼 행세를 합니다.

복음의 가장 큰 적은 은혜가 설 자리를 없애는 것입니다. 구원을 마치 자기가 갖 고 있는 어떤 조건으로 인해 당연히 받을 권리인 양 자랑을 합니다. 원하는 그것만 주면 무었이든지 된다는 생각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렇 게 확장되는 싸움이 있다는 것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4:1-5절을 보시겠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일 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 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 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 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어디 말씀을 인용힌 것입니까 조금 전에 읽었던 신명기 8장 말씀을 인 용한 것입니다.

여기서 기독교에 대해서 분명히 이야기할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떡을 주기 위한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으면 모든 것이 잘 되어 밤 이고 낮이고 할렐루야 찬송을 부르는 이상한 감정과 감격 속에 있는 종교가 아니라 는 얘기입니다. 여기서도 주님께서는 친히 떡을 만들러 오시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떡을 만들어 먹임으로써 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었다면 예수님은 그렇 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는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죄값을 치르시는 방법 외에 는 다른 방법이 없으므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얼마나 많이 우리의 생애 속에서 '이 문제가 해결되면...'이라는 조건을 붙여 신앙을 감히 가능성있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만 해결되면 내가 할 것 같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차라리 어떤 조건을 걸지 말고 '하나님 저는 이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이렇게 간구하십시오.

어떤 장로님이 계셨는데 아주 단순하신 분이시며 또한 부자였습니다. 그 장로님이 한번은 간증을 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하나님, 저는 돈이 없으면 못 살아요!'그렇 게 기도했더니 어느날 하나님께서 돈을 잔뜩 주셨어요'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들도 이와같이 하나님께 솔찍하게 기도하시면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그냥 달라고 하기가 멋적어서 그런지도 몰라도 대개 '이것만 주시면 .....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조건을 붙이고 있습니 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할 것은 내가 요구하는 어떤 조건을 하나님께서 내게 만족시켜 주시면 내가 하나님 앞에서 힘을 내어 잘 할 수 있는 가 능성이 있다는 생각만은 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렇게 한다고 해서 절대로 가능성이 있는 존재가 못 되기 때문입니다.

 <결론>

'하나님이 먹을 것을 주시면 우리가 믿겠습니다.'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예수 믿는 것을 은혜로써가 아니라 예수를 믿는 것마저 내가 하나님께 바치고 받는 조건 으로 따지는 습성이 이미 우리 속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은연중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향하여 괄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왜 안믿느냐고 하면서 자기의 믿음을 과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이 안 계셨더라면 큰일날 뻔했 구나 하고 느기는 것입니다. 언제 자랑할 틈이 있습니까 거기에는 감사와 놀랄 만 한 확인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일차적으로 우리에게 무었을 가르치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무었을 느끼게 하시려고 오시지도 않 았습니다. 우리는 죄악 중에 있으면서도 죄가 무었인지 그 결과가 무었인지도 모릅 니다. 아무 감각없이 그저 잘 먹고 잘 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오셔서 법궤 위에 속죄소를 놓고 그 위에 피를 흘려 감싸 버리시 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우리가 옛날에는 어떤 자들이었으며 무 었을 하던 자들이었는가를 돌이키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회개케 하시고 헌신케 하시면서 하나님 앞에 마음을 갖다 바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이 사건이 지시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 여인이었습니다. 그러 나 이제 우리는 정죄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말미암아 , 예수 그리스 도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정확한지 확인해 보십시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래서 이제 우리는 두 번째 있는 명령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 아서 죄가 무었인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된 이후에야 죄를 짓지 말라는 명령 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전에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덮는 피와 그 때에는 우리가 다만 저주 외에는 받을 것이 없었던 사실을 혼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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