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복음서 주제 (막 09:30-37)

첨부 1


본문에서 마가는 예수님의 둘째 "수난 선포"(30-32절)를 기록 하고, 이어서 누가 "가장 크냐" 하는 문제에 대한 제자들의 토 론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다(34-37절).

"(그들이) 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30절). 이 제, 예수님이 나아가시는 방향은 대체로 요단 건너편을 지나 예 루살렘 쪽이다(10:1, 32, 46). "예수께서는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30절)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자신의 예루살렘 행 (行)이 지체되지 않도록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 셨음을 암시하고 있다. 예루살렘이야말로 그의 죽음과 부활이 성 취되어야 할 장소였던 것이다(참조:10:33-34). "삼 일 만에 살 아나리라"(31절). 여기서 "삼 일 만에"란 말은 아마 마태복음 17:23의 내용을 따랐을 것으로 생각되나, 사본에 따라서는 "사흘 후에"로 나와 있는 것도 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 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더라"(32절). 마가는 종종 제자들의 몰이해(沒理解)를 지적하고 있다. 본문의 경우는 그들이 다가올 예수님의 고난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참조:8:32). 그들은 후에 마치 그들이 여태껏 일어난 일에 아무런 준 비가 되어 있지 않은 양 행동하였다.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을 예 상하셨을진대, 또한 새로운 세대가 시작될 때 부활하실 것도 내 다보시지 않았겠는가(시바이쩌, 판넨베르그).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고향이었다(막 2:1). 그는 제자들에게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 그들이 아무 말도 안한 걸로 보아 아마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추측컨대,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 그들 중 누가 가장 큰 자가 될까 하는 문제를 궁구(窮究)하고 있었을 것이다. 마가 복음 10:35이하에도 이와 비슷한 기록이 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께서 왕으로 등극하시면, 예수님 바로 옆에 있는 가장 영광 스러운 자리를 자기들에게 주십사고 바라고 있을 정도니 말이다.

예수님은 두 군데서 모두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 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대답하 신다(9:35, 10:43-44, 참조:10:31).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36-37절). 아마 예수님은 심 지어 어린 아이조차도 받아들이고 영접해 주심으로써,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예시(例示) 하시려고 하셨 던 것 같다. 그 당시에는 어린 아이들이 이상화되기는커녕 여자 와 세리와 소위 "죄인들"과 함께 기껏해야 이류(二流)계층의 인 간들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자 하나를 영 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아가 하나님 자신을 영접 하는 것이라 말씀하신다. 그리고, 특히 일반적으로 하찮은 존재 로 여겨지는 이웃이나 나그네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말 씀하고 계신다(참조:마 25:31-46. 눅 10:25-37). 그러나, 복음서 에 보면 아이들에 관한 말씀들이 많이 있는데, 오늘 본문의 말씀 (36-37절)도 이러한 말씀들과 연관시켜 읽혀져야 하리라 본다.

마가복음 9:41-42는 새로운 제자상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며, 마태복음 18:2-4에서는 겸손에 있어 어린 아이처럼 되 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 요건으로 언급되어 있다(참조:요 3:3). 마태복음 20:26-27(=막 10:43-44=눅 22:24-27, 마 23:11-12)은 섬기는 자가 되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마가복음 10:13-16은 어린 아이가 하듯이 하나님의 나라 를 받아들이는 것(어린 아이는 이미 하나님나라를 받아들였는 가), 혹은 우리가 어린 아이를 받아들이듯이 그 나라를 받아들 여야 할 것에 관해 말하고 있다("hos paidion, 호스 파이디온"이 란 말이 단순히 "어린 아이처럼"으로 번역됨으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함).

 설교를 위한 해석

복음서 주제:마가복음 9:30-37 이 둘째 수난 예고에서 새로운 요소는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어 죽임을 당하리라."(31절)는 사실이다. 그것은 냉엄한 말 씀이다.

처음으로 십자가 처형의 그림 앞에 다가선 한 어린 아이가 기 겁을 했다. 왜, 저런 일이 일어났지 그리고, 왜 하필이면 그 분 에게 저런 일이 일어났을까 여기서 우리는 완악하고 가공할 만 한 죄의 실상(實相)에 접하게 된다. 인간의 수중에는 죽이는 권 세가 있다(참조:가인과 아벧). 갓난 아기가 부모님과 가족들의 손에, 세례받은 영아가 회중의 손에, 어린 아이가 교사의 손에, 피고용자가 회사의 손에 넘겨질 때, 언제나 이 "넘기움"은 위안 과 공포, 희망과 두려움, 성장과 파멸, 그리고 삶과 죽음을 내포 한다. 많은 이익과 많은 손해를 경험할 수 있으며 또 그것들이 영구화될 수도 있다. 많은 생명이 창조될 수 있고 많은 죽임이 행해질 수도 있다. 인간의 최대의 위협은-인자나 모든 인간에게 있어-인간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비교:"구약" 본문).

 글자 그대로의 어린 아이든 아니면 어떤 취약성을 지니고 있는 약자든, 어린 아이(36절)는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지는 것"의 완 벽한 본보기이다. 그 아이는 "영접될" 것인가 아니면 버림받을 것인가 요한복음 저자는 예수님에 관해 신랄한 기사를 기록한바 있다. "(그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다" (1:11). 그러므로,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 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37절)고 말씀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영접하는 것"은 "죽이는 것"의 반대요, 그것은 목숨을 빼앗는 대신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접"은 종의 자세가 요구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 은 참된 "영접"이 아니라 다만 선심을 쓰고 돌보는 척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가장 큰 자"가 되고자 하는 열망(34절)은, 가장 큰 자가 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 누군가가 보다 작게 되어야 하고, 또 다른 누군가가 가장 작아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파괴적인 잠재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희한한 파라독스(역설)가 있다. "뭇사람의 끝 이 되매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는 길은 약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취약성에 악의 현실이 가미될 때 그것은 인간의 파괴 적인 손길에로 초청, 곧 "그들이 그를 죽이리라."는 결과에로의 초청이 된다. 그렇지만, 궁극적인 종이신 예수님(참조:막 10:45) 은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확고한 소망을 표현하신다. 교회 의 머리이신 주님을 본받아 교회도 섬기는 자가 될 것과(지난 주 일의 "구약" 본문) 또한 부활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섬기는 자로 서의 나약성의 고난을 겪도록 부름 받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영광의 환상을 즐겨서는 안 된다(34절). 오히려 사람들의 어린 아이들을 "영접"함으로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는 것"도 구원 에 참여하는 것임을 세상에 증거해야 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