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십자가와 그 의미 (고전 01:18-25)

첨부 1


오늘 저녁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풀 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십자가의 도'라고 하는 말씀은 원어대로 하면 '십자가의 말씀'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1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하는 구절가운데 '말씀'이라는 단어가 오늘 본문의 '도'라는 단어와 같은 뜻입니다. 원어로는 '로고스', 즉 '십자가의 도'는 '십자가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십자가이 말씀은 곧 복음입니다. 그리스도 부활에 있어서의 최고의 절정은 십자가입니 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수는 십자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4복음 서를 읽어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이야기 하면서 2/3를 예수의 죽 음에 촛점을 맞추어, 그리스도의 마지막 몇일 동안에 된 이야기를 기 록하고 있습니다. 즉, 복음서는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한 것입 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말씀은 곧 복음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복 음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상징은 십자가요, 십자가는 우리 기독교 복 음의 진수가 됩니다.

 먼저 이 십자가의 의미를 살펴보면, 첫째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경에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죄 를 범하면 그 죄에 대한 댓가로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 님의 공의입니다. 율법을 범하면 반드시 그 벌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데 하나님께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함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 를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은 죄를 벌하십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죄 에 대한 진노와 심판과 형벌을 우리에게 나타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에 불의가 있으 면 제일 먼저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심판이 내리십니다. 우리가 불 의한 길로 행하면 어떤 사람이 형벌을 내리기 전에, 누가 나를 책망하 기 전에 제일 먼저 우리의 마음에 불안이 생깁니다.

 이사야서 57장 20절에 보면 "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솟아내는 바다와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그 러므로 우리는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면 십자가 앞에 나와서 죄의 용서 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죤 번연의 천로역정이라는 책을 보면 폐허의 도시에서 하늘나라 까지 등에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순례자의 모습이 묘사되고 있습니 다. 결국 그는 갈보리라고 불리우는 언덕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언 덕을 향해 기어 올라가서 십자가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 가 무릎을 꿇었을 때 그의 등의 무거운 짐은 멀리 굴러갔습니다. 그 리고 땅 속에 묻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십자가는 공의를 실현했습니 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만이 나타난다고 하면 죄 가운데 묻힌 만민들은 멸망 을 받을 것 밖에는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고통을 안겨 주었으며, 실망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친히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이 받을 형벌을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우 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습니 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께 서는 독생자까지도 아낌 없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조롱 과 비웃음 속에 멀리 던져졌을 때 그것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의 육신은 산산조각이 났지만 그의 사랑은 계속됩니다. 십자가를 바라 볼 때 우리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의 마음 속에 영원히 존재하는 사랑을 보게됩니다. 성경 [롬] 5:8에 기록된 것과 같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을 때 그가 죽으셨습니까 로마서 5장에 보면 우리가 연약해서 나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자리에 있을 때 그리 고 우리가 죄를 짓고 경건하지 못할 때, 더구나 죄인 되었을 때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씀했 습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반대하는 원수 들을 위해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주시고, 그 사랑하는 아들을 원 수를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바침으로 주님의 사랑을 확증하여 주신 것 입니다. 이 얼마나 고귀하고 이 얼마나 거룩합니까

우리 사람의 생각으로는 그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길이를 다 측량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 랑입니다.

 셋째로, 십자가는 화해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 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 들이라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 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 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 으니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 인간들과 화목하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화목제물이 되 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해야 하겠고, 화목한 우리는 이웃간에 서로 화복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 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깊은 골짜기, 건널 수 없는 계곡 위에 다리 를 놓은 것입니다. 십자가의 다리를 통과하지 아니하고서는 하나님과 화해할 길이 도저히 없습니다.

 우리 인간 사이의 화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운 피조물이 된 우리가 다른 사람과 화목하는 일에도 십자가가 꼭 있 어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버린 나를 화목케 하기 위 해서 우리 주님은 십자가를 지셨는데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내가 용서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고린도후서 5장 17-18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 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 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케하는 직책을 주셨으니"라고 했습 니다. 우리 성도들은 어디를 가나, 무엇을 하든지 화해를 우해 일하 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9에도 "화평케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특징이 무엇입니까 화평을 우해서 일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네째로, 십자가는 지고서 따르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6:24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아무리 귀한 의미가 있다고 하더라도 나와 상관이 없을 때에는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 니다.

 사도바울을 보십시요. "내게 유익했던 이런 것들을 나는 그리스 도를 위하여 해로 여겼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 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한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겼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갈라디아서 5:24에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서야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자발적 인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으면 그만 둘 것입니다. 십자가는 고 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가난과 질병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십자가는 생의 번뇌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로 무거운 책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육신 안에 서 찌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네 십자가를 지 고 나를 따르라"말씀하실 때 그렇게 많이 따르던 사람들이 하나씩 둘 씩 물러가 나중에 예수님의 제자들만 남아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때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오늘의 기독교가 축복만을 강조하다 보니 십자가를 잃어가고 있습 니다. 십자가를 지라고 하면 다 도망가 버리고 맙니다. 이것은 기독 교가 아닙니다. 십자가가 없는 것은 진리도 복음도 아닙니다. 십자 가가 없는 교회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십자가의 진리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이 '십자가의 도'는 하나인데 이 '십자가의 도'를 받 는 사람들은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즉,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많지마는 이 모든 사람들을 간단하게 두 가지 종류로 분류하면 멸망 중에 있는 사람과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사람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인다고 했습니 다. 멸망으로 점점 내려가고 있는 사람에게는 십자가가 미련하게 보 입니다. 우선 십자가 자체가 미련하게 보입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본래 옛날 로마에서 노예나 식민지 백성을 극형 에 처할 때 쓰던 아주 처참한 형구였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천하고, 가장 더럽고, 가장 무서운 것이 십자가 사형대였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가장 천한 사람들만 못 박히는 처형대에서 처형 을 받은 어떤 사람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하니 미련하게 들 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처음에는 헬라 사람들이 나 로마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만 들렸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복음이 어떤 사람에게는 너 무나 단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 셨는데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하니 너 무 단순하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구원 얻는 것이 그렇게 단순 하다고 생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는 기독교에는 깊이가 없다고 말합니다. 기독교에는 무슨 철학이 없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기독교에는 무슨 맛 이 없어. 차라리 불교는 깊은 맛이 있는데. 그리고 엣날 노자가 가 르친 도덕경을 읽어 보면 거기에는 깊은 맛이 있지. 기독교야 깊은 맛이 있어야지. 그저 애들과 부인들이 믿기는 좋지". 자기 같이 학 식이 많은 사람은 믿을 것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옛날 철학을 많이 숭상하던 헬라 사람들에게도 당연히 미련하게 보였습니다. 자기가 무슨 선한 일을 해서 도가 높아지고 덕이 부해져 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타당하고 이해가 가지만, 믿음 하나로 구원 을 얻는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십자 가에 대한 것을 비웃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일 뿐입니다.

 더구나 대속한다고 하는 진리가 많은 사람들에게 미련하게 보입니 다. 누구든지 정직한 사람이나 정정당당한 사람이야 자기 책임을 자 기가 지는 것이지 남의 덕에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어리석게 생각됩니 다. 자기 덕에 구원을 얻어야 된다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사람들에게는 도리어 미련하게 보 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누구든지 십자가의 도가 이렇게 보이면 그것은 그 사람의 영혼이 멸망하고 있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영혼의 멸망의 상태가 중증에 걸린 상태라는 것입니다.

 사실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말씀, 십자가의 복음이 미련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단지 미련하게 보일 뿐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정말로 철학을 깊이 연구한 사람들, 많은 학문을 연구한 사람들은 십 자가의 도를 미련하게 보지를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맑은 대낮에 하늘의 해를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