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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 아이와 같이 (눅 18: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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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학생들과 함께 소그룹으로 일주일에 한 번 경건의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그 시간에는 <다락방>을 읽고 기도하며 일주일간 지내 온 생활을 나누는 것으로 보냅니다. 지난 주에 읽은 다락방 내용 중에 너무 좋은 것이 있어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젊은 크리스챤 부부가 노모를 모시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비니우스(Vinieus)란 4살된 어린이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노모가(할머니) 중병으로 누었습니다. 병환은 날마다 악화되어 갔습니다. 할머니는 몹시 슬퍼했고 집안 분위기는 무거워 모두 침울해졌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느낀 어린 꼬마는 할머니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머니 슬프세요 할머니가 지금 죽어가고 있으니까, 슬프세요" 죽어가고 있는 할머니에게 이런 실례가 어디 있습니까 아기 엄마는 그 이상 말을 못하게 막았습니다. "그런 말 하는 것 아니야."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이 어린이는 할머니 곁에 가서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할머니, 하나님은 위대하고 위대하셔서 우리가 죽을 때 이렇게 할머니를 껴 안으셔서... 꼭 껴안아 주십니다."
할머니의 얼굴에는 웃음이 생겼습니다. 무거웠던 집안 분위기도 사라지고 좋은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꾸밈이 없는 순수한 어린이의 말에서 할머니는 소망을 얻었습니다. 그 가정의 분위기를 좋게 바꿨습니다.

이 내용을 읽은 우리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어린이의 말이 단순하면서도 거기에서 사람들의 심금을 흔들어 놓는 힘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린이를 좋아하는데, 그 좋아하는 이유중에 하나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싯귀절이 떠올랐습니다. 이 말은 워즈워드(William Wordworth)의 자연시 `무지개(The Rainbow)'에서 나오는 귀절입니다. 그 시를 제가 낭송해 보겠습니다.

하늘에 있는 무지개를 바라 볼 때,
내 가슴은 뛰고 있습니다;
내 생명이 시작될 때도 그렇게 뛰었고
지금 어른이 되어서도 그렇게 뛰고 있습니다.
늙어서도 그렇게 뛰게 하소서.
그렇지 않으면 나를 죽게 하소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그리고 내 남은 날이
자연의 경건에 의하여 하나 하나 붙잡힌 바 되게 하소서.

우리말로 낭송했는데 원문으로 감상하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My heart leaps up I behold
A rainbow in the sky;
So was it when my life began
So is it now I am a man
So be it when I shall grow old
Or let me die!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And I could wish my days to be
Bound each to each by natural piety.

이 시가 너무 유명하게 때문에 아마 원문으로 낭송해도 여러분들은 다 이해하리라 생각됩니다.
워즈워드가 위에 6행을 쓰고 난 뒤 그 다음 행을 잇지 못하고 얼마 후에야 다음 3행을 써서 결국 이 시를 완성하는데 2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사실 위의 6행의 내용과 밑에 3행의 내용은 상당한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윗 내용은 무지개를 바라 볼 때, 즉 자연의 아름다움에 深醉했을 때에 가슴이 뛴다는(감동된다) 내용입니다. 철이 들기 시작할 때부터(삶에 대한 意識이 싹틀 때) 그가 성숙한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그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동으로 가슴이 뛰는데, 늙어서도 그렇게 감동을 느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이것이 전반부에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후반부에 와서 갑자기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하고 전혀 엉뚱하다싶은 내용이 나옵니다. 그래서 두 내용을 일관성 있게 하나로 감상하기 어렵다 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해 보면 이 시의 전체 구조는 지금 어른이 된 워즈워드가 위의 두 글은 어린이를 소재로 하여 지은 글입니다. <다락방>에 수록된 글을 쓴 사람은 남미 브라질에 사는 쉴러<William Schisler, Jr)입니다. 그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작가로 알려진 유명인도 아니고 또 그 글이 작품으로 알려진 것도 아닙니다. 그의 가정에서 어린이로 인하여 일어난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쓴 내용입니다. 그러나 두번째 글(무지개)라는 시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명작입니다. 이 시를 쓴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 1770-1850)는 영국의 유명한 낭만파 詩人입니다. 1798년 그가 콜리지와 공동으로 출판한 <서정민요집>은 영문학사상 낭만주의 부활의 한 시기를 결정짓는 시집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좋은 작품을 냈고, 그의 명성은 1820년대부터 점차 높아져 1843년에는 시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시의 특성은 소박하고 친근한 시어를 구사해서 사람들에게 심오한 감동을 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은 18세기 기교적 시어를 배격하고 새로운 낭만의 장을 여는 중요한 실례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과학과 철학의 발달로 지식인들이 종교적으로 갈등을 겪고 있을 때 그의 자연신론은 그들에게 새로운 세계관을 이해하게 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작가의 위치와 작품의 명성에는 많은 차이가 있지만 그러나 공통적으로 우선 `어린이는 순수하다'는 점을 부각시켰다는 점입니다. 비니우스는 순수했습니다. 죽어 가는 할머니에게 "할머니 슬프세요 할머니가 지금 죽어 가고 있으니까, 슬프세요"라고 한 이 말은 그 어린이의 마음에 있는 그대로 표현된 것입니다. 어떤 격식에 맞게 `인사차림'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생각과 느낌에 전혀 가감하지 않은 느낀 그대로의 순수한 마음이었습니다 그 순수한 마음의 표현이 할머니를 감동시켰습니다. 그 이유는 아이의 말 속에 진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에게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 가는 것인데, 슬퍼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하고 아무리 설득하고 위로하려고 해도, 그것이 이성적으로는 수긍이 갈른지는 몰라도 감성으로까지 받아 들이기는 어렵습니다. 죽음에 임박해 있는 할머니에게는 죽음에 관한 설교나 설득력 있는 논리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나는 깨우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진실을 전하는 데는 설득력 있는 논리보다는 순수한 마음을 전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순수한 마음에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설득하려는 논리는 한계가 있습니다. 논리란 진실을 입증하는 하나의 방법이지 진실 그 자체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어린이의 生氣를 지적합니다. 워즈워드가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 표현한 것은 어린이에게 생기가 있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분명히 자연의 아름다운 무지개를 보고 그의 가슴이 뛴 것은 어릴 때부터입니다. 그 때부터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해 삶의 생기를 얻었고, 지금도 그러한 감격으로 삶에 생기가 있고, 장래에도 생기가 있기를 기원했습니다. 그에게 생기가 있다는 것은 바로 살아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생기는 과학이나 철학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아름다움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성을 중요시하고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해석하려는 현대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과학과 기술의 발달과 합리적 사고가 우리에게 무엇을 줍니까 삶에 편리함과 효율성을 주고 있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 편리함과 효율성이 삶의 변화를 가져 온 것은 분명하지만 그 편리함을 얻기 위해 우리는 엄청난 것을 잃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자연들이 파괴되고 있고, 얼마나 많은 우리의 아름다운 정서들이 훼손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자연이 파괴되고 사람의 정서가 훼손된다는 것은 삶의 아름다운 장이 소멸된다는 것이며, 결국 우리는 죽고 만다는 것을 예고해 주고 있습니다. 워즈워드는 그의 시를 통하여 삶의 생기는 자연으로부터 와야 한다는 지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진실' (혹은 진리)를 위해서는 마음의 '순수함'과 자연에서의 신비함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감격을 느낄 수 있는 '생기'가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순수할 때 진실을 보고 진실은 삶의 생기(혹은 보람)가 됩니다.

이 두 글을 통해서 떠올릴 수 있는 우리의 신앙적인 고백은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 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 가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이와 같이' 될 때만이 받아 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것이 어린 아이와 같이 되는 것이겠는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앞의 두 글을 통해서 생각해 볼 때 그 맘에 '순수함'과 '생기'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 들이려고 하는 사람은 마음이 순수해야 하고 생기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학생들에게 다음 두 가지를 권면합니다.

첫째로, 학생은 학생다운 순수한 점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요즈음 학생들 중의 일부는 정치 문제, 노동 문제 기타 여러 가지 사회 현상들에서 부각되는 문제를 학교 안으로 끌어들려 어떤 물리적인 힘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물론 사회의 현상들에서 부각되는 문제들에 대해서 그 원인을 분석하고 연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논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잘못된 문제들은 자기들이 아니면 해결 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것도 물리적인 힘을 동원하는 모습들을 보이는데, 이것이 학생들에게 어울리는 일인가 생각해 보면 회의적일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어린 아이가 아빠의 신을 신고 가는 것과 같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귀엽게 보이지만 그렇다고 계속 그대로 놓아 둘 수는 없습니다. 그 아이에 맞는 신을 신겨 주어야 합니다. 학생은 그의 몸에 맞는 옷을 입고 발에 맞는 신을 신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연스럽고 또 보기에도 좋습니다.

과거 학생 활동은 순수했습니다. 실제로 不義와 不正에 항거하여 열매를 거두었던 적도 있습니다 불의와 부정에 항거하는 순수한 학생 활동이었습니다 '理想的 학생 운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순수함' 여기에 학생 활동의 참가치가 있습니다. 이 순수함 이외의 그 어떤 불순한 것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지식인의 이상과 젊은이의 정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생명을 존중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인간 본연의 순수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젊은 대학인들이 지켜야 할 참가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이 지켜지지 않을 때 대학은 시정 잡배들을 키우는 온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면 너무 지나친 말은 아닐른지요
"대학은 진리의 전당이라."했습니다. 쾌쾌 묵은 말 같지만 사실입니다. 대학을 진리의 전당으로 가꾸어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순수해야 합니다. 순수함이 있는 사람에게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마음에 생기가 있어야겠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생기'는 마음으로 복 몸으로 느끼는(가슴에서 뛰는) 힘을 말합니다. 이 생기는 자연으로부터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 학교 교문을 들어서면 먼저 상징탑을 지나게 되고, 성지관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길 양편에 하늘 높이 솟을 가로수들을 보게 됩니다. 지금은 파란 잎이 막 돋아나고 있습니다. 지난 겨울 앙상했던 그 가지 끝에서 파란 잎들이 막 솟아 오르고 있습니다 어떤 시도 어떤 그림도 이 신비한 아름다움을 나타낼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름다움'이요, `신비'입니다. 볼 줄 아는 사람만이 즐기고 기뻐할 수 있는 秘密(神秘)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의 마음의 생기요, 삶의 보람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을 통하여 그의 속성을 워즈워드가 말하는 자연의 경건을 느끼고 그 비밀에 들어 갈 때 하나님의 나라에 입문하는 것이라 나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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