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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찌하든지 (롬 0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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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산초원교회도 이제 창립한지 10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많은 희비가 교차되는 가운데서도 오늘날 이 지점에까지 오게 된 것을 하나님게 감사를 드립 니다. 물론 저는 이 초원교회라는 구원열차에 도중에 탑승을 했기에 그 많았던 희비를 직접 경험하지 못했지만 교회 창립부터 수많은 희비의 상황들을 몸으로 겪어면서 꾸준하게 끈기있게 교회를 지켜나온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축복이 여러분들에게 풍성하게 임하고 더 나아가서는 그런 여러분의 수고의 댓가가 하늘나라에 차곡 차곡 저축되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제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통하여서 지난 10년을 되돌아 보면서 앞으로 펼쳐질 11살로서의 우리의 다짐을 다시한번 더 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인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우 들에게 쓴 서신입니다. 그 당시 바울은 당시 세계의 중심인 로마에 가서 복음을 증거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바울이 로마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예 루살렘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그 예루살렘행은 순교까지도 각오해야 할 그런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다시는 자기가 로마에 갈수없다는 비장한 각오로 자신이 평생 전하 는 그 복음을 전반적으로 체계있게 종합해서 기록하여 저들 로마에 있는 기독교 인들에게 보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입니다. 따라서 로마서는 우리가 이 미 알고 있고 또 알아야만 하는 복음을 아주 집약적으로 표현한 귀중한 성경이 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귀중한 성경인 로마서를 두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 국의 대영 박물관의 관장이었던 필립은 다음과 같이 말을 했습니다.

"세계를 다 준다 해도 대영박물관은 바꾸지 않겠지만, 만일 사도 바울이 친필로 쓴 로마서가 한장만 있다면 이 박물관과 바꾸겠다" 로마서의 성경이 얼마나 귀중하고 소중했으면 이렇게 로마서를 격찬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 우리 이렇게 귀중하고 소중한 로마서를 1995년도를 시작하면서 설교 말씀을 통해 매 주일 상고하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 로마서를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서 저 나름대로 로마서의 별명을 붙여 보았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제가 붙인 로마서의 별명입니다.

"어찌라든지"입니다. 이 "어찌하든지"라는 말은 10절 말씀에 처음 나온 말입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했습니다만 사도 바울은 자기의 본의로는 로마에 가고 싶었지만 성령님의 지시하심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갑니다. 그 예루살렘을 향하는 것은 죽 음까지도 각오한 것이었습니다. 로마에 가고 싶지만 어쩌면은 죽기전에는 가지 못할찌도 모르는 그런 절박한 상황속에서 자기가 체험한 그 복음을 어찌하든지 전해주어야만 했던 것이 사도바울의 간절한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간절함과 열정이 풍성하게 담긴 성경이 바로 로마서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찌하든 지" 복음을 전해야만 하겠다는 이런 열정이 우리 모든 부산초원교회의 심정이 되 어야 되겠기에 오늘의 말씀을 "어찌하든지"라는 제목으로 잡아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인해 우리가 "어찌하든지"의 그 열정을 가져야만 합니까 그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으로 인해 우리는 열정을 가져야 만 합니다. 복음이란 기쁜소식입니다.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이미 죽은 우리가 그 죄악된 상태에서 완전히 해방될수 있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로마서 1:18-32의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우리 타락한 인간의 실상에 대해 상세 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특히 29-31의 말씀에서는 그 죄악됨의 구체적인 항목이 소개되어 있고 32절은 그런 죄악됨의 결과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잠시 이 말씀을 찾아서 정독을 하겠습니다.

29 곧 모든 불의,추악,탐욕,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살인,분쟁,사 기,악독이 가 득한 자요 수군수군 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 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저희가 이같은 일 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이 말씀중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어쩌면은 아주 지극히 당연한 말이 무엇입니까 32절에 나오는 말씀으로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 께서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형선고를 받음에서 완전히 사면을 받 아 자유를 누리는 것이 바로 복음 기쁨 소식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런 복음에 대해 친히 자신이 알고 체험을 했기에 자기 자신이 면죄부를 받고 해 방을 얻었기에 이런 기쁜 소식을 그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에 사는 사람 들에게 어찌하든지간에 알려주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에 대한 열정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복음에 대한 열정을 14절 말씀에서 스스로 빚진자라고 표현 을 하기도 했습니다. 복음에 빚을 졌다는 것입니다. 빚진자로서 해야할 일은 빚을 갚는 일입니다. 그래야만 진정한 자유함을 누릴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림 을 살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적으로 빚을 지면 그 빚에 매이게 됩니다. 그 빚 을 다 갚을때까지는 결코 자유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경제적인 문제뿐만 아닙 니다. 윤리적인 문제 경제적인 문제등 전 분야에 해당되어집니다. 아뭏던 우리는 그 어떤 종류의 빚이던지 간에 공통적인 것은 일단은 갚아야만 그 빚진 상태로 부터 자유함을 누릴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그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종류의 빚진 자로서 의무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당연한 일로 생각했습니다. 복음을 증거함으로 그 어떤 보상을 바라지 않고 그저 자기가 진 빚을 갚았다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복음을 증거함으로 상을 받고, 복음을 증거 함으로 의인이 되고, 복음을 증거함으로 복을 받는다는 차원이 아니라는 것입니 다. 그저 진 빚을 갚아야 되겠다는 그런 열정으로 어찌하든지 복음을 전하는 것 이 사도바울의 열정이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이 빚 갚음의 열정은 참으로 대 단했습니다.

고전 11:23-27의 말씀입니다.

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 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인 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 고 춥고 헐벗었노라

성도 여러분 ! 이 얼마나 놀라운 빚갚음의 열정입니까 그렇다면 왜 사도 바울이 이토록 열 심히 그 수많은 고통과 핍박을 감수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값없이 구원함 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데로 바울은 그가 회심하기전에 기독교 인들을 박해하는데 최 선봉에 섰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직전까지도 기독교인들을 잡기위해 다메섹으로 향하던 중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바울 이기에 그의 빚진자로서의 빚갚음의 열정은 참으로 대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진 고문과 매 맞음을 감수하면서 까지 복음을 증거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 이제 우리는 이런 바울됨의 모습을 통해 우리들의 모습을 조명해 보아야 합니 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고 천국백성이 되었다는 이 놀라운 사실앞에 우리들 이 한 일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내 세울수 없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우리는 진정 사도바울 처럼 빚진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뜨거운 열정으로 빚을 갚는 그런 행위들이 있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우리의 책임이 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빚을 갚아야만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기 에 꼭 가져야만 하는 신앙의 태도가 있어야만 합니다. 16절 말씀에 나오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이 자랑거리가 될지언정 부끄러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17절 말씀에 부끄 러워 하지 말아야할 구체적인 이유가 밝혀지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 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복음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요 그런 하나님의 뜻을 믿는가운데 진정한 해방과 자 유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 전하는 일을 특권으로 여겨야만 합 니다. 예수 믿는다는 사실 자체를 우리의 자랑거리중에서 최고의 자랑거리로 삼 아야만 합니다. 고후 12장에 보면 사도바울은 자기의 약함과 어리석음을 자랑한 다고 했습니다. 왜 자기의 약점이 자랑이 됩니까 그것은 내가 약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강함이 나타나고, 내가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더 크 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오직 자기를 구원해 주신 그리스도만이 나타나고 긍지 를 삼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초원의 성도 여러분 ! 우리 이제 대망의 1995년도를 시작하면서 어떠한 신앙의 마음가짐을 가져야만 합니까 이런 사도 바울의 신앙의 마음이 우리 초원의 마음이 되어야 되겠습니 다. 어찌하든지 복음을 증거해야 되겠다는 열정적인 마음 ! 부끄러움없이 담대하 게 복음을 증거해야 되겠다는 그 당당한 마음 ! 이 우리 모두의 마음이 되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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