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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둘째 주일 (창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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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주제:창세기 12:1-8
11장과 12장은 온 인류의 이야기(창1-11장)에서부터 하나의 인간 가족에 대한 이야기(창12-50장)에로 다소 돌연한 변화를 보여준다--그리고 범세계적인 중요성을 지닌 약속을 받는 것은 이단일 가족이다(창12:3). 창세기 11:1-9은 바벧탑을 짓는 데서 발생한 파멸에 대해 말함으로써 온 인류의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뒤이어 나오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는 땅과 허다한 자손에 대한 두 가지 약속이 지배하고 있다(참조:창12:3,7, 13:14-16 15:3,7,18 등). 이 두 약속은 창세기 전편에걸쳐 이상하게도 남아 있다. 그러한 지체 때문에 생긴 경험으로인하여 초점이 모든 사람과 더불은 하나님의 행동으로부터 많은사소한 일들과 낭만적인 자세한 일들이 없지 않은 개인들의 문제로 바뀌고 있다. 아브라함 이야기에 있어서 일차적인 요인은 자손이 지체되는 것인데, 마침내 얻은 아들을 모든 기대를 거스리면서 희생하도록 요청받았을 때 절정에 도달한다(창 22:). 하나님의 행위가 극단적으로 시험하고 좌절시키는 것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 이야기의 중심적인 문제는 "믿음"이 되고 있다(참조:창 15:6). 아브라함의 믿음에 관한 문제는 어디에서도율법과 관련해서 해결되지 않는다(거기에는 제의적 율법도 없고제사장들도 없다). 바벧론 포로 이후에 비로소, 우선적으로 지혜문학에서 (참조:예수와 동시대 사람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도아브라함에 관한 두 개의 논문을 썼다.) 아브라함이 율법을 성취함으로서 종교적 덕을 이룬 주요한 예가 되며, 그래서 "하나님의친구"로 불리게 된다.

창세기 12:1-8은 아브라함에관한 이야기들이 오랜 세기 동안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온 후에 첫번째 편집자에 의해 쓰여졌다.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이 그렇게 형성되었기 때문에 전체의 문학적 문맥이 다 보여지고 있다. 즉, 세부적인 지리에 관한 지식은 저자가 학문과 지혜의 사람이었음을 밝혀준다. 거기에는 아브라함이 떠나야만 하는 안정된 사회환경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있지만(창 12:1), 아브라함이 처해 있던 종교적 환경에 대한 언급은 나타나 있지 않다.--그런데 이 요소는 아브라함의어떤 이야기에서도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현재적안정성에 대조적으로 미래의 땅에 대한 진술은 모호한 채 남아있으며, 그가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는 약속은 전혀 믿을 수 없는 것으로서 나타나고 있다(창 11:30은 사라가 잉태하지 못함을기술하였다). "축복"(12:2-3)은 삶의 전 영역에 있어서의 잘됨을포함하는 것이다. 즉, 12:3은 축복을 전 인류에게 확대시키고 있다. (창11:1-9과 대조하여 보라.) 단일 가족을 확실한 자손이 없이 불확실한 땅으로 사려깊게 보내는 것은 그것을 통하여 축복이온 민족에게 연장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포괄적인 행동이다.

하란은 아브라함이 떠난 장소이다(12:4). 그곳은 실제로 도시였으나 그렇게 나타나지 않는다--아마도 족장들의 유목민적 기원에 관한 내용이 여전히 여기에 보이고 있는 듯하다. 가나안(12:5)은 베니게 (phoenicia)를 포함하는, 좀더 분명하게는 팔레

스틴 (Palestine)을 포함하는 요단 서쪽의 모든 땅을 의미한다.
이 온 지경이 아브라함에게 그의 소유로 약속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창세기 12:6-9은 여전히 아브라함을 타국 유목민으로서 묘사한다. 그는 잠시 동안 중심부인 세겔과 베델 근처 (이 두 곳은후에 이스라엘 역사상 중요한 성소가 된다)에 정착하여, 다음에는 유다 남방인 네게브(Negeb)에 정착한다. 창세기 12:10-19에는아브라함이 애굽에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주전 2천년 전에 셈 민족이 비옥한 초생달 모양으로 생긴 땅으로이주했다는 전통 및 기록들을 포함하는 것인데, 이는 부분적으로는 발굴 작업에 의해서 또 다른 자료들에서부터 얻은 정보에 의해서 입증된 것이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셈족이 그들의 존엄성을 다른 기존의 문화로부터 이어받지 않은 이주 민족의 자의식을보여준다. 여기에서 보여지는 것은 모험의 참신성인데, 이것은신학적으로는 물론이고 사회학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참신한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아브라함을 그 길로 떠나게 하신분은 야웨 하나님'이라는 대 주제에 비해 이차적인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순종할 뿐만 아니라 그가 어디에 가든지 이하나님께 제단을 쌓는 것 이외에 다른 생각을 갖지 않는다. 이처럼 아브라함 이야기에 대한 이러한 서론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아브라함의 신앙으로 하여금 역사 발전의 현실과 잘 부합하게 하고, 그리고 그것은 약속의 성취에 대한 믿기 어려운 점을 믿는데어려움이 없도록 해 준다.

제 1 주제:우리가 여기에서 읽는 바 아브라함은 조상이다. 그는 히브리인, 즉 유대 민족의 조상이다. 그는 믿음의 조상 즉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조상이다. 그는 어디에서나 예배하는 사람들, 보편 교회의 조상이다.
우리가 그를 만날 때 그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예견적으로 잠재적으로 그리고 가능성 가운데서만 관계되는 것이지 즉각적인 사실에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부르시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확고한 신뢰는 궁극적으로 의심과 경멸과 위험과 시험에 대한 증거라고 하겠다. 때때로 그는 증거가 없음에도 믿도록 요청받는다.
때로는 마음대로 문제를 처리하려고 하며 심지어 하나님과도 거래를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 대한 기본적이고 논쟁의 여지가 없는 신뢰는 미래를 열려 있는 것으로 남겨 놓는다.

우리는 종종 믿음이 모든 문제를 즉석에서 해결하는 것처럼 설교한다. 또한 모든 순간에 있어 성자들(saints)는 완전한 듯이설교한다. 성서는 여기에 아무런 저지도 보내지 않는다. 삶은 아무도 저지할 수 없는 것이며, 성자들조차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사물들은 의미를 알 수 없으며 사람들(특히 사람들)도 표면적으로는 그러하다. 믿음의 변화가 뱝견되는 것은 보다깊은 차원에서, 그러나 보다 결정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장기적으로 볼 때 보다 궁극적인 종점에서다.
아브라함은 돌아서는 것에서부터, 즉 떠남과 여행으로부터 시작한다. 안전은 전혀 보장되어 있지 않으며, 지금 그의 손에는지도도 없으며 미리 알려짐 목표도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있다. 아브라함은 바로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시에 의존하며,이것은 매일매일의 모호한 것들을 설명하기에 충분해야 한다. 아무런 "비행 계획"도, 아무런 여행 경로도, 아무런 길 안내도 없고, 다만 그 대신에 하나님이 있다. 즉, 현존하시는 하나님, 자기 말씀을 반복하시는 하나님,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 하나님(다른 아브라함 이야기를 읽으면 거기에 다 나온다.)이 계신다. "떠나라", "가라", "내가 너에게 보여주겠다."
첫째로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바친다. 그는 자기 뒤에 있는 모든 다리를 불사른다. 그는 되돌아갈 수 없다(지난 주일의 내용을보라). 그는 오직 앞으로 나갈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앞에 있는 것은 "내가 너에게 보여 주겠다는 땅"과 함께 그의 하는 일을통하여 땅의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된다는 우주의 중요성이 있

다. 어떤 의미에서 처음 세 절의 말씀은 그 뒤에 나오는 성서 전체의 본문이 된다.

그러면 어떻게 이것이 실현되는가 처음에는 아브라함은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닌다. 그는 마치 "내일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내일은 그 때에 염려스럽게 될 것이니, 오늘에 필요한 괴로움만있도록 하라"는 말씀을 읽었었던 듯 하다. 때때로 병 중에서만이아니고 우리가 해야만 하는 것은 다음 시간, 즉 오늘 하루를 헤쳐 나가는 것인데, 그렇게 함으로써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 열려진 길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이 한 발자국(적어도) 앞에 계시며 우리가 그곳에 도달하면 우리를 만나주신다는 신뢰를 통해서.
그래서 그 다음에는 머무는 곳마다 아브라함은 자기 하나님께계단을 쌓는다. 그것은 자기 계약을 확증하는 수단이며 하나님이주위에 계신다는--심지어 낯설은 곳에 있어서도--인식을 의미한다. 그러나 제단은 또한 표시를 하는 의미, 즉 간증 혹은 증거로서 세워진다. 그의 노정은 뒤에 오는 사람들을 위한 이정표인 제단들로 점철되어 있어서, 올바른 길을 계속하여 따라오고있다는 확증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숲길을 통과해 나가려고 하면, "우리 뒤에" 하나 이상의 표시가 필요하다. 두 개의 표시는아직 최종 표시를 볼 수 없는 곳에서 숲을 가로지르는 방향을 잡게 해 줄 것이다. 때때로(7절) 하나님은 나타나셔서 그의 의도를확증해 주신다. 어떤 때는(8절) 그렇게 하시지 않는다. 그러나어떤 경우든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데 이 이름은 하나님의 계획과 이러한 연관관계에서 하나님의 계시된 본질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아브라함은 여행을 계속해 나갈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도 계속 전진할 수 있다. 기본적인 방향감각은 "하나님은 그의 말씀처럼 선하다"고 하는, 다시말해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과 같이 선하다고 하는 신뢰에 바탕을두고 있다. 믿음의 근거는 종점이 있다는 것과 우리가 한 발자국조차도 볼 수 없는 경우에도, 그래서 우리가 세운 신앙의 표시를위에 두고 거기에서 눈을 뗄 수 밖에 없을 때도 하나님은 그 지점을 아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은 진실로 "이름"을 가지고있다는, 즉 그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며, "본질"을 소유한 분이라는 근본적인 신뢰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의 본질은 모두 밝혀지게 될 때 무한히 풍부하고 복잡한 것이라해도 근본에 있어서다르지 않으며, 새롭지만 이상하지 않은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믿음", 즉 아브라함 식의 믿음, 성서의 믿음, (이렇게 말 할 수있다면) 예수의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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