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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배 (요 04: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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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귀절들은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요 4:1-42)에서 뽑은 부분인데, 복음서의 저자가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기독교 선교를정당화하기 위하여 쓰여진 전통에 근거해 편집하고 있는 곳이다.
초대 교회에는 이러한 선교활동에 대해 저항이 있었지만(마10:5)이러한 선교는 사도행전 8:1,5에 보면 매우 일찌기 시작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 4장에 쓰여진 이야기(대강 4:5-9,16-19과 20-26의 부분들 및 31-42로 되어 있는)는 기독교의 메시지가 사마리아 고을에서 받아들여지고 그 교회의 시작은 한 여인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 복음서 기자는 두가지 분제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 이 전통적인 이야기를 사용하였는데, 두 문제란 기독교 신앙과 전통적이고 종교적인 신앙과의관계와 전도자들과 예수의 인격에 대한 그들의 메시지의 관계였다. 첫번째 문제에 대한 논의는 5-26절에 담겨 있다. 그 본문은세 부분으로 잘 구분된다:(1)상황에 대한 설명, 4:5-9, (2)제시에 대한 준비, 4:10-20, (3)예수의 자기 제시, 4:21-26.
이야기에 대한 설명 부분은 장소에 대한 지식을 보여준다(수가라는 동네는 구약에 언급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피곤하셨다(4:6)-이것은 이같은 종류의 이야기에 자주 나오는 요소(motif)다. 제 육시( 오정)에 대한 언급은 시원한 물을 요구하는 다음의 장면과 잘 연결된다. 4:9의 질문과 대답은 사마리아인의 분리때문에 그와 같은 교제가 가능하지 않다는 문제를 설명해 준다.
또는 전통적 이야기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는 말로서, '(유대교및) 기독교가 복음을 분리론자인 사마리아인들에게 전하는 것이합법적인가' 하는 문제를 설명해 주는 것일 수도 있다.

요한 4:10은 요한복음에 매우 전형적인 오해를 유발시키는 예수의 말씀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그것은 문제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생수"라고 하는 다른 차원의 논의로이끌어 간다. 기독교적 계시에 대한 질문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과의 사이에 있던 중요한 논쟁을 부적합한 것으로 만든다. 한편으로 "생수"(living water)는 보통 "신선한 물"을 말하는 동방의용어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생명의 물"(water of life)은 (참조:생명의 떡, 요 6장)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늘로부터 나오는물을 뜻한다. 이러한 이중적인 의미가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4:11-12). 예수께서 그가 주실 수 있는 물과 동일시 하는 것(4:13-14)은 여자로 하여금 계속해서 새롭게 되는 마술적인 물로생각케 4:15) 하는 또 다른 오해를 야기시킨다. 오직 그녀 자신에 대한 진실을 밝힘으로써 예수가 보봉 사람이거나 마술장이가아니라 "선지자"로서 그녀 자신의 개인적 생활의 혼란을 해결해주는(4:19) 분임을 인식하게 된다.

예수께서 선지자라면, 그는 또한 이스라엘의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혼란, 즉 다른 두 장소에서 예배하는 것에서 상정되고 있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분렬(4:20)에 대해 말씀하실 수 있어야 한다. 예수의 대답은 이러한 제의에 대해, 제의와 기도에 합법성을 부여할 수 있는 어떤 특정한 거룩한 장소를 알지 못하는"영과 진리로" 종말론적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상대하시는 것이

다(참조:제 21:22도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음을 말한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 종망론적 시간은 도래했고 이미 현존하고 있다(4:21-22), 22절은 계시에 대한 이러한 종말론적 진실을 혼동케 한다. 즉,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온다는 말은 후대의 주석이거나 풍자적인 말이라고 본다. "영"(spirit)과 "진리"(truth)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임재를 규정짓는 용어이다. 즉, "영"은 새로운생명을 창조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참조:3:5-8). 또한 거기에는 기도와 예배에 대한 신령화(spiritualized)된 개념에 대한 사고가 없다. 또 "진리"란 새 존재의 실재이다(참조:3:21, 16:13).
여인은 예수께서 "메시야가 오시면"(4:25) 모든 것을 종말론적으로 갱신시킨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now)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예수의 자기 계시(4:26)는 기대에 대한 "지금"의 성취를 밝혀 줄 뿐만 아니라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어떤 초연함을 유지하는 논쟁이 아니라, 응답과 행동을 요구하는 사건이다. 지금문제가 되는 유일한 것은 새로운 메시지이다 (4:29).

설교를 위한 해석

복음서 주제: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선교하는 일이 정당화되고 설명할 필요가 있던 때가 있었다는 것은 이상하다고 생각이된다. 그러나 사정은 그러했던 것이다. 어떻한 권리로 사마리아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는가 유대교의 회당은 틀림없이 이러한 자유 성향에 대해 교회를 공격했고, 아브라함의 불법한 자녀로서 유대교 말뚝 밖에 위치시켰다(아마도 어떤그리스도인들도 같은 일을 했을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종류의보편성에 대하여 암시를 얻게 되는데, 민족과 종족과 문화와 마찬가지로 성(sex)의 구별도 없는 그런 보편성을 말하는 것이다(갈 3:28을보라. 이것은 오랫동안 교회와 "기독교적" 단체들에의해 사실상 무시되어 왔다).

여기에 또 다시 지방 성소(shrines)에 대한 우리의 주제가 등장한다. 지방적 분리, 문화(심지어는 사투리까지)의 분리, 그리고 지역, 피부 색깔, 계급, "순수한 가치" 등에 의한 분리는 지금까지도 기독교에 널리 알려진 것들이다. 그렇게 됨으로써 온전한 교제는 배제되고, 성만찬이 여전히 "[은혜]의 성만찬"이라고규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만찬에까지 연장되고 있는 실정인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차원에서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들을" 수 없다. 우리는 예수의 말씀을 결정하지 못하며, 그를"보지"는 더욱 못한다. 요한복음의 저자는(주석을 보라) 한 차원에서 이해되어진 예수의 말씀이 다른 차원의 문제에 대한 단서를제공하는 표현 방법을 사용한다. 이 장에서 말라 버리는, 그래서제거되거나 다시 파야 하는 우물에 대한 언급은 이 땅의 어느 장소에도 원천을 갖지 않는 언제나 흘러 넘치는 샘물에 대한 문제를 야기시킨다. 오로지 신적인 초월만(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자랑함을 초월하듯이)이 사람들로 하여금 물려 받거나 획득한 전제들을 뛰어 넘게 할 수 있다. 그 여자만이 예수를 자기의 범주에 끼어 맞추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렇게 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를 "스승"(guru) 혹은 "슈퍼스타"로 성공의 보증인으로 만드는데, 각각은 자기 자신의 범주를 이름하는 것일 수 있다. 한 영역에 국한된 예수, 포로가 된 예수, 꼬리표가 달리고고소당한 예수는 생수에 가까이 계신 것으로 암시된 그런 종류의해방을 가져다 줄 수 없다.
우리는 예수로 하여금 우리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바로 그와 같은 "한쪽에 제한시키는" (localiaing)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논쟁 거리"(offense)가 되고있다(요7:43, 9:16, 10:19을 보라). 방해하지 않는 (nondis-turbing) 예수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와 혹은 심지어는 예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 여인이 예수 앞에서 그녀 자신의 상황을직시할 수 있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말하게까지 되었을때 (아마 처음으로). 그녀는 새로운 종류의 자유, 즉 우리가 변덕스럽게 권태나 포만(satiation) 으로도 지치지 않는 가유를 발견했던 것이다.

예배를 정당화시키는 문제(예배의 "합법성")가 교인들의 너무많은 시간과 주의를 앗아가 버렸다. 예배는 그것이 항상 "끝이개방되어"(open-ended)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 마지막 결과

에 의해 합법화(만일 이 용어가 타당하다고 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대망할 (anticipating) 뿐인데, 성찬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하늘 나라의 "새 포도주"를 대망하고, 일용할 양식을 통해 메시아의 빵을 대망하고, "중간 역"(way-stations)에 도착함으로 종착역을 대망할 따름인 것이다. 우리는 매 정거장 마다"이제 종착역에 다 왔다"고 생각하면서 여행을 마치려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모든 여행의 비유는 이런(이 세상의) 제한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종착역을 향해 움직인다. 하나님이우리를 위해 계획한 종착역은 "우리를" 향해 움직여 온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은 니곳이나 저곳이 아니며 이 예배 의식이나 저 예배 의식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인 것이다. 그리고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만나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예배의 진정한 모습일 뿐만 아니라 예배의 목적이며 출발이며 과정이며 목표가 된다.

우리는 그 여인과 같이 "메시아"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근거에서 그러한 질문들을 포기할 수 없다. 우리는 완전하게 행할 수없다는 이유 때문에 행동을 거부할 수 없다. 모든 문제는 반드시해답이 있다는 것은 아마 특이한 미국인(또는 서양 사람)의 망상일지 모른다.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풀 수 있는가 여자는 "나는 지금 모든 것을 안다. "나의" 계시를 받은 곳은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 대답은 "이곳에서도 말고예루살렘에서도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조상들은 이러한방법으로 이곳에서 물(믿음)을 얻었다"고 말할 수조차 없다. 왜냐하면 모든 믿음의 예배자의 조상은 성소를 세우고--그것을 뒤로 하고 떠난 아브라함이기 때문이다. 주석에서 말한대로 이것은순수한 "영적" 예배의 추상 개념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가 중요하며, 우리는 우리의 "기억"(anamnesis)을 되살려야 함을 의미한다. 즉, 그것은 빵과 포도주와 물과 말씀과 행위가 필수벅인 도구가 됨을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말씀은 단순한 말씀이상을 의미할 수 있으며 교인석과 강단이 하늘문이 될 수 있는것은, 그것들은 "단지"중간 정거장이고, 하나님은 움직이고 계시며 우리를 향하시면서 우리를 새로운 영역으로 항상 전진하게 하시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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