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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눅 09:4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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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갈릴리를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도중에 일어난 몇 가지 사건들입니다.
① 먼저 제자들이 으뜸이 되고자 하면 겸손하여야 할 것에 대해 46-48절,
② 둘째, 예수님의 좋은 제자가 되려면 포용성이 있어야 됨을 49-56절,
③ 셋째,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굳은 각오를 가져야 됨을 57-62절에 말씀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는 여러 가지 사건이 나오고 이런 사건들을 통해서 제자들의 신앙 문제와 변화 받지 못한 내면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드러난 것을 예수님께서는 하나하나 진리로 깨우쳐 주셨습니다. 또,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세 사람을 통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함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제자의 내면성이 어떠해야 하며 예수님을 따를 성도들의 자세가 어떠함을 배워 훌륭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Ⅰ.제자들의 내면성(46-48)

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실 날이 가까우므로 갈릴리로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도중이었습니다. 이렇게 올라가는 도중에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있었습니다.(46)
제자들 사이에 서로 누가 크냐 하는 문제는 처음부터 있었던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앞에 두고 터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 당장에 로마를 뒤엎고 메시아 왕국이 건설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눅9:11) 그래서 그 날에 누가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아주 신경이 날카로워졌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서로 자주 다투었습니다.
① 특히, 9;1-6절에 보면 제자들은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선교 여행 보고회를 가졌습니다. 첫 전도 여행 결과는 서로 심히 차이가 났을 것입니다. 잘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못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② 또, 10-17절에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이신 사건이 나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빌립은 믿음 없는 것이 드러났고, 안드레는 보리떡 5덩어리와 물고기 2마리를 진중에서 찾아 이것이 비록 적은 것이나 주께서는 할 수 있다는 것으로 믿음의 큰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③ 또, 18-21절에 보면 베드로가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여 단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첫째 자리를 차지 할 것 같았습니다.
④ 그런데 또, 28-3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변화 산에 올라가실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명만을 대리고 가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변화 산에 갔다 내려오는 제자들에게는 우월감이 가득 차 있었고, 변화 산에 오르지 못한 산하의 제자들은 소외감과 비교 의식, 열등감에 시달렸습니다. 또, 이들 사이에도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한 사건을 통해서 서로 책임을 돌리고 비교 의식에 시달렸습니다.
⑤ 특히,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후계자로 세우실 것 같은 생각으로 마음이 심히 불안한 나머지 이런 연극을 벌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모이며, 자기들의 어머니를 동원하여 예수님의 좌우편 자리를 앉게 해 달라고 마태복음 20:21절에 부탁을 했습니다. 치마 바람을 날렸습니다. 또, 이 소식을 들은 다른 열 제자들은 모두 분히 여겼습니다.(막10;41)
이것을 보면 12제자 모두는 높은 자리를 탐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2사도로 세움을 받을 때만 이름이 한 번 나오는 다대오도 똑같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서로 누가 조금만 더 인정을 받은 것 같으면 배가 아프고, 소화가 안되고,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주 길에서고, 집에서고 다투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내면성을 가진 제자들을 예수님은 어떻게 도와주셨습니까
47,48절을 보십시오.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근본문제가 서로 영접하지 못하는 것임을 아셨습니다.
어린아이는 유대 사회에서 가장 무시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숫자를 셈 할 때도 넣어 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공중 집회나 중요한 자리에 오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어린아이가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신 적도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무시되고, 소외된 어린아이와 같은 이들을 맞이해 주고 영접하면 “큰 자니라” 하셨습니다. 어린아이는 도움의 대상입니다.
특히, “내 이름으로 영접하면”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떠들고, 무슨 일에 보탬이 되지 않으므로 귀찮게 여깁니다. 이런 내게 있어서 이득을 줄 수 없는 어린 아이 같은 이들이 갇혔거나, 병들었거나, 헐벗었거나, 나그네 된 자들에게 주의 이름으로 영접하는 것, 곧 주를 영접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자가 큰 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손님을 대접해도 꼭 되돌려 받을 수 있는가 없는가를 계산하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 이름으로 하잘것없고 무시되는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자가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48절 하번 절을 보십시오.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가장 큰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진정으로 위대한 자는 인간적으로 재주가 있고 똑똑하고 능력이 많은 자가 아닙니다.
참으로 위대한 자는 스스로 가장 작은 자임을 깨닫는 자입니다. 자기가 가장 작은 자임을 알 때, 겸손하게 되고, 많이 모른다는 것을 알 때, 겸손히 배우는 것입니다. 겸손하여 하나하나 배워 갈 때, 큰 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 제자들 스스로 누가 크냐 하기보다는 어린아이들처럼 겸손하여서 배우는 그자가 큰 자가 되고 으뜸이 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린아이는 자꾸 궁금해서 묻습니다. 묻고는 알고, 또 겸손히 배워 갑니다. 그리고 어린아이는 가르쳐 주면 순종을 잘 합니다. 이러하여서 큰 제자로 길리워 갑니다.

Ⅱ.제자들의 포용성이 없음을 꾸짖으심(49-56)

⑴ 포용성을 가질 것(49-50)
49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말하기를 주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나 초대 교회에 더러 예수를 믿고 권능을 받아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수가 있었습니다.(행3;6, 16:18)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다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지 말라고 사도의 권위로 금지를 시켰습니다. 이렇게 금지시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① 이는 자기들과 함께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들 그룹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금지시켰습니다. 누가 했던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더러운 귀신에 잡혀 고통 하던 사람이 낫고, 온전한 삶을 산다면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또 이를 통하여 예수님의 이름이 높이 드러나게 되었으면 기뻐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것이 배가 아프고 못마땅하고 오히려 불쾌하게 생각 되었습니다. 그래서 금했다고 예수님께 칭찬을 들을까 하고 말했습니다.
② 둘째, 금한 이유는 산하의 제자들은 조금 전에 귀신을 내어쫓지 못한 우사를 당하고, 쩔쩔매었는데(40절) 예수님의 제자도 아닌 어떤 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일을 해 내는 것이 그들에게는 불쾌한 일이었고, 상당히 기분 나쁜, 자존심을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대게 사람들은 실력이 없으면 폐쇄적이 되고 아무것도 아닌 권위를 가지고 권위를 부리게 됩니다. 자기들이 못했으니, 자기들이 못 먹는 밥에 재를 뿌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사람들에게 자신들과 함께 하기를 요구했는데 그들은 그 요구를 받아 드리지 않자 그래서 그만 자기들은 사도라는 권위를 가지고 못하게 막았습니다. 자기가 못하면 가만이나 있지 못하도록 했다고 하니까 예수님의 대답이 어떠하십니까
50절을 보십시오. “금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금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사도단’의 일원으로서 분명한 소속감과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소속된 교회나 교단의 소속감과 자부심을 가지는 일은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정통 보수요, 장자 교단입니다. 어디를 가나 자랑스럽고 긍지를 가집니다, 이것이 지나쳐 배타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을 통해서만 역사 하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그 다음에는 70인 제자들을 통해서 역사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한 교파나, 교단이나 단체만을 들어서 역사 하시지는 않습니다. 어느 기관만을 통해서 일하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경우 여러 사람이나 개인 단체들을 쓰십니다. 예수님의 좋은 제자 훌륭한 제자가 되려면 포용성이 있어야 함을 가르쳐 준 말씀입니다.
영적인 지도자가 되려면 편협한 이기주의를 버리고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자기 중심적인 것도 버리고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품고 섬길 수 있는 관용과 포용성을 가질 것을 본문을 통해 가르쳐 줍니다. 내가 안하고, 우리가 안하면 안되고 하는 그런 비좁은 마음이나 편협한 것을 버릴 것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래야 장차 큰 양 떼를 품을 수 있는 제자들이 됩니다.

⑵ 제자들이 의와 교만을 버릴 것(51-56)
5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 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했습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 가매 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시어 하늘로 올리워 가실 날이 가까워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일은 예루살렘에서 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올라가셔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올라가시기에 앞서 어느 제자를 보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심부름꾼을 앞서 보내서 숙소도 예비하고 식사와 전도할 새로운 방향 등을 잡기 위해서 사마리아인의 한 촌(村)으로 들여보냈는데 이 사마리아인의 한 촌 사람들이 예수님의 일행을 받아 드리지 않겠다는 겁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면 사마리아를 통해야 합니다.(요4:4-9) 갈릴리에서 유대로 가기에는 사마리아를 통하는 것이 가장 빠른 지름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이 서로 반감을 갖고 있어서 이 길을 지나가지 못하게 할 뿐더러 경건한 유대인들은 뵈뢰아로 돌아갔으면 갔지 이 사마리아 땅을 밟지 않으려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인의 한 촌을 지나시고자 심부름꾼을 앞서 보냈는데 이들이 영접치 않았습니다. 왜요
①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한 세기 동안 다툼이 있었습니다.(요4:9)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 예배만 고집하고 자기들을 무시하는 유대인들을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못 올라가고 그리심 산에 성전을 짓고 거기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죄 많은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서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그리심 산) 예배를 드렸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한 것을 보면 사마리아인들의 마음속에는 무시당하는 것과 소외감이 있어서 유대인에 대한 반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② 또,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것을 아는 고로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영접치 않았습니다.(53)
이렇게 예수님께서 이 사마리아 땅을 통과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못하게 막았더니 야고보와 요한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54절을 보십시오.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쫓아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합니다.
저 구약 열왕기 하 1;10-12절에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이스라엘 왕 아하시아의 명을 받은 오십 부장과 그 오십 인의 수하들이 엘리야를 모욕하고 경멸했을 때,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서 멸하였던 것을 상기하며 지금이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영접치 않고 받아 드리지 않으니까 몹시 화가 나서 이 마을에 하늘로서 불을 내려 태워 버리고자 했습니다. 여기서 야고보와 요한의 성질이 급함을 인하여 보아너게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마음속에 왜 이토록 화가 났겠습니까
이는 야고보와 요한의 마음속에 사마리아 사람들을 무시하는 교만한 마음이 있었기 대문입니다. 아마 갈릴리 사람들이나 유대사람들이 영접해 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화를 내겠습니까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시하고 개로 취급을 하며 상종치도 않았습니다. 모르고 그 땅을 밟게 되면 돌아 나와 먼지도 떨어버립니다.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제자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무시하고 상종치도 않았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유대인 프라이드를 버리고 찾아가며 전도를 했습니다. 그러면 황송한 마음으로 예수님과 자기들을 영접하고 대접을 잘 해줘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무시하고 욕하니까 자존심이 대단히 상했습니다. 속으로 ‘이방인의 피가 썩인 혼혈족 주제에 우리를 영접치 않다니!’ 하는 생각으로 야고보와 요한은 씩씩거리며 이 놈의 동네 당장 하늘로 불을 내려 태워 버리자는 분노가 치밀어 벌벌 떨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야고보와 요한을 돌아보시며 꾸짖으셨습니다.(55)
아직도 영적이지 못하고 인간적인 제자들을 심히 책망하셨습니다. 아직도 인간적인 눈으로 보고 판단하고 무시하는 제자들을 보시고 마음 아파하시며 심히 책망을 하셨습니다.

우리도 교회 일을 할 때나 전도의 일을 할 대, 야고보와 요한과 같은 심정이 될 때가 많습니다. 나이도 어리고 별로 신통치 않은 사람이 완악한 말로 대적하며 말썽을 부리면 자존심이 심히 상할 때가 있습니다.
자존심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닮겠다고 하지만 순간 순간 ‘저거 채찍을 좀 맞았으면, 좀 망해 버렸으면’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본문을 보면서 부끄러운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좁고 작아서 뭐하겠나, 하면서 우월감과 자존심을 부인하고 남을 무시하는 맘을 회개하고 남을 섬겨 가야 참으로 큰 자가 되는 길이요, 제자의 길이 아닐까 생각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① 아무런 보탬도 되지 않고 도움만 필요로 하고,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는 어린 아이 같은 자를 영접하는 자가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요, ② 어린아이처럼 될 때, 큰 제자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또, 제자가 되려면 ① 내 팀이 아니고 내 그룹이 아니라고 무조건 무시하고 금하지 말고, ② 또 우리가 좋은 뜻으로 했는데 받아 드리지 않는다고 반감을 가지거나 저주를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품고 포용성 있는 제자가 되도록 말씀을 주셨습니다.

Ⅲ.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57-62)

57-62절을 보면 제자가 되고자 하는 세 지망생이 있습니다. 이런 이 제자가 되고자 하는 세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잘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머리 둘 곳이 없는 삶을 각오해야 합니다.(57,58)
57절을 보십시오.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쫓으리이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소원이 간절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큰 은혜를 받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디든지 예수님을 따라가며, 예수님을 쫓으며 살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수천 수만 사람들로부터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으셨습니다. 제자가 되면 자기도 예수님과 같은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또, 제자의 삶이 아주 고상하고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또, 메시아 왕국이 건설되면 한 자리 할 뿐만 아니라 장래가 보장 될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과 같은 훌륭한 지도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쫓을 것이라고, 제자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무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셨습니다.
산에 사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새도 집이 있습니다. 굴은 여우에게 피난처가 됩니다. 새의 집은 새의 보금자리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으셨습니다. 비가와도 피할 피난처도 없고 아무리 피곤해도 쉴 만한 그늘진 곳도 없습니다. 연속되는 일과 속에서 매일매일 피곤하시고 지친 삶을 사셨습니다. 너무 피곤하고 잠이 부족하여 풍랑 속에서도 주무셨습니다. 밤늦도록 양 때들을 섬기시고 이른 새벽에 일어나 새벽 기도회를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사생활이 없으셨습니다. 24시간 긴장을 풀고 살 수 없습니다. 양들이 병들거나, 아프거나 위험에 처하면 자다가도, 기도하다가도 가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더러 바다를 건너가라 하시고 기도하시다 바람이 부니까 제자들이 걱정되어서 바다 위로 걸어오셔서 풍랑 이는 바다를 잔잔케 해 주셨습니다. 쉬어야 할 때 쉬지 못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힘듭니까
또,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식사할 겨를도 없이 일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잃은 양을 찾고자 하는 간절한 목자의 심정 때문에 밤이 되어도 편히 쉴 수 없었습니다. 이 양 떼를 어떻게 도우며, 어떻게 방향을 잡아 줄까 하는 것으로 밤새 기도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예수님과 같은 고난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막연한 꿈과 이상만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했습니다. 그 이상을 이루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과 아픔이 따르는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의 삶이 얼마나 어렵고 고달픈 삶인가를 깨우쳐 주심으로 분명한 각오를 하고 따르도록 일러 주셨습니다.
① 목사는 자기 색이 없습니다. 양들이 해 주는 것을 싫어도 입어야 하고, 메어야 하고, 먹어야 하고, 이슥한 밤이라도 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② 제가 어릴 때, 나도 커서 신사가 되어 매일 넥타이를 메고 다녔으면 했는데 그대로 되긴 되었는데 올해처럼 39°-40°를 오르내리는데 새벽 4시부터 밤 12시까지 졸라 메면 목에 땀띠가 나고 무좀도 생깁니다. 목사가 되면 이 넥타이가 얼마나 귀찮은지 요사이는 교단 마크가 든 목걸이를 넥타이로 대신하고 다니니 얼마나 편한지, 한마디로 참 제자의 삶은 힘이 듭니다.
우리 중에도 막연한 꿈과 이상만으로 제자가 되고자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자 생활이 겉보기에는 아름답고 고상해 보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이화 여대생들이 목사 후보생들에게 결혼 신청을 많이 했습니다. 사실 목사 생활이 세상에 어떤 일보다 더 보람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보실 때 가장 귀한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태어나도 목사를 또 하겠습니다만, 머리 둘 곳이 없이 사시는 예수님처럼 남몰래 많은 고난을 짊어져야 합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한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복음 전파의 사명을 최우선 적으로 감당해야 합니다.(59,60)
5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쫓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제자로 부르시고 복음 역사에 쓰시고자 하셨습니다. 이 부르심은 참으로 큰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소서” 그리고 주님을 따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부친 장사하는 일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윤리적으로 볼 때, 부친을 장사하는 일보다 더 우선적으로 감당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60절을 보십시오. “가라사대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셨습니다.
여기 이 사람, 십중팔구 그 부친이 죽지도 않았거니와 거의 죽어 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핑계를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부친을 장사하는 일은 죽은 자들에게 맡기고 최우선 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① 대게 주께서 명령하시는데 핑계를 대는 사람은 참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본문이 주는 교훈은 내 개인적인 이기심으로 핑계 대지 말고 주의 명령을 우선해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②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앞에 이미 죽은 아버지가 계시고, 그 앞에 한 젊은 형제가 죽어 가고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죽어 가는 형제를 내버려두고 장사를 먼저 지내겠습니까 아닙니다. 죽은 자는 이미 죽었으니까 장사를 미루더라도 생명이 붙어 있는 형제를 먼저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죽은 자를 장사하는 일보다 죽어 가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입니다.
이처럼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죄로 죽어 가는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당연히 장례를 지내는 일보다 우선적으로 감당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죽어 가는 생명을 살리는 복음 전파의 사명을 최우선으로 감당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언제나 주의 주신 사명을 언제나 핑계되지 말고 최우선으로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먼저 핑계되어 죽은 자를 장례 지내고 산 자까지 죽이는 오류를 범하지 맙시다. 주의 주신 사명을 뒤로 미루거나 차선으로 두어 “다음에 하지요”라고 하지 맙시다. 이것도 잃고 산 자까지 잃는 것처럼 주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또 참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셋째,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정과 미련을 버려야 합니다.
61절을 보십시오.
또, 다른 사람이 말했습니다. “주여 내가 주를 쫓겠나이다만은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이 사람은 예수님을 따를 마음의 각오가 된 사람입니다. 앞으로 다가올 고달픈 삶과 복음 전파의 중요성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버릴 각오로 주를 쫓겠다고 결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가족과 작별 인사를 하고 오겠다고 했습니다.
구약 열왕기상 19;19-21절 엘리야는 엘리사를 자기 제자로 불렀습니다. 그랬을 때, 엘리사가 집에 돌아가 부모와 작별 인사를 하고 따르겠다고 했을 때, 엘리야는 그것을 허락하였으나, 예수님은 허락하시지를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집에 돌아가 가족과 작별하고 따르겠다는 이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셨습니다.(62)
예수님께서 보실 때 이 사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 마음속에 남은 한 가닥의 정과 인연을 부인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쟁기를 잡고 밭을 가는 자가 뒤를 돌아보면 밭을 똑바로 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쟁기가 넘어져 부러지거나 쟁기가 넘어져 몸을 다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손에 쟁기를 잡았으면 앞만 보고 열심히 밭을 갈아야 합니다. 이처럼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는 마음속에 남은 한 가닥의 미련과 끈끈한 정을 부인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은 사랑이 없고 인정이 메마른 분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쫓기로 결단한 사람은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사명의 길을 가야 합니다.

롯의 처는 뒤로 돌아보지 말라는 천사의 분부를 거역하고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람은 부르심을 받아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했을 때, 아브람은 순종하여 인연, 지연, 혈연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이 인연, 지연은 떠났으나 하나 있는 조카 롯을 두고 떠나야 했는데 혈연을 끊지 못하고 데리고 다니다가 아브람은 숱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제가 아주 잘 아는 우리 집안에서 예수 믿는 장립집사님인데 제가 볼 때, 이 사람이 머리가 좋고 똑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분을 그 마을에 예수님을 믿는 이가 없고, 초창기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니까 믿음의 조상으로 키우시고자 하는가 생각을 했는데, 이 분이 인정이 많아서 그 인정을 끊지 못하여 신앙이 자라질 못하고 늘 채찍을 맞는 것을 봅니다.
교회서는 재정 부장을 맡아서 열심히 하고, 교회 살림을 잘 삽니다만, 집안에 돌아오면 제사를 지내는데 참석을 합니다. 물론 절은 하지 않습니다만, 집안 사람들이 욕을 한다며 참석하여 뒷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또, 제사를 지내고 나서 마을에 결혼식이 있으면 참석을 하고 곁에서 술을 한잔 권하면 권하는 그 사람 체면을 봐서 한잔씩 합니다. 상대방 생각을 늘 하다가 술도 먹고, 제사를 지내는데 참석을 합니다. 그런데, 그 자녀들과 몇몇 집안 사람들이 그 사람 신앙을 본받아 또 그렇게 합니다. 교인들도 그렇게 닮습니다.
이렇게 정에 매여 놓으니 신앙생활을 바로하지 못합니다. 쟁기를 붙잡고 뒤를 돌아보면 밭이랑이 바르질 못합니다. 꾸불꾸불합니다. 이 분 신앙도 꾸불꾸불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이런 이는 합당치 않다고 하십니다.
이처럼 부름 받은 성도는 마음속에 남은 한 가닥의 미련과 정을 부인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잔인하고 무자비 한 것 같습니다. 또 어떻게 보면 인정이 손톱만큼도 없는 냉혈 인간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또 사단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고 가족과 마지막 인사하는 것이 뭐가 나쁜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하여 언제나 메어 두고자 함으로 확실한 신앙을 위해 뒤돌아보지 않고 정리해야 합니다.

이러므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주님의 올바른 성도가 되려면, 이 끈끈한 정도, 혈연도, 지연도 떠나고 주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살아야겠습니다.
신앙을 위해 떠나야 할 것은 떠나고 버려야 할 것은 버리고 끊어야 할 것은 끊어야 신앙이 자랍니다. 이런 자가 제자에 합당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진정으로 위대한 신자는 인간적으로 높고자 교만함도 아니라, 사람의 종이 되어 겸손히 섬기는 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내 마음의 의와 교만을 버리고 모든 사람들을 포용하고 품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머리 둘 곳 없이 사신 예수님을 본받아 구체적인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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