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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홀로 그려보는 가을날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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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한국문인협회 회원인 라전호는 이렇게 가을을 말하였다. “나는 유독 가을을 좋아한다. 아니, 가을이 조금씩 좋아진다는 표현이 솔직하겠다. 나이가 더 할수록 가을이 두루 거느리고 있는 상식적인 의미들이 한꺼번에 좋아진다. 꽃이 지고 새들이 둥지를 트는 텅 빈 숲에 단풍이 들면 저 혼자 골짜기를 적시는 물소리와 같은, 그러나 다소 진부한 국면들. 이 모든 설레는 출발과 가을하늘의 비움이 좋다. 가을이 좋기는 하나 그 까닭에 대해서는 딱 꼬집어 말하기란 어렵다. 높은 하늘빛이 그냥 피부에 닿고 스며든다. 나는 그것이 좋은 것이다. 가을은 불면의 밤처럼 자못 초조하고 드라마틱하다. 누구라도 절기상으로 감탄하는 봄보다 더 빨리 가을을 느껴 버린다. 아니면 음미하거나 눈치 채 버린다. 마치 감수성 예민한 시인처럼, 가을을 앞당겨 느껴버린 언젠가부터 나는 은근한 조바심 속에 살아간다. 봄부터 축적되어 온 묵은 감정들은 마치 산문에 비치는 달빛처럼 부유하며 한사코 나를 졸라댄다. 높은 하늘빛의 숨소리가 마치 내 것으로 다가오는 기미들. 빈숲에서 음미되어지는 자연, 늦은 잠을 깨우고 나면 냉기가 더해진 바람이 불어오고, 뜨락엔 꽃들이 낙화를 준비한다. 노란 물이 찬 나뭇잎보다 먼저 여물어 가는 꽃들의 씨방들. 그것들은 일순 우리를 절정으로 사로잡는다. 낙화가 시작되면서 가을의 리듬은 빨라진다. 가을이 중간에 들어서면 나는 일련의 홍몽감에 빠져든다. 특히 꽃들이 낙화하는 모습이란 미묘하게 떨리는 전율감을 어떤 표현으로도 감당하기 어렵다. 어쩌면 나도 건달 같은 유미주의자가 아닐는지 모르겠다. 먼 곳의 사람에게 편지를 쓰고 혼자서 술이라도 따라야 할 것 같은 가을 밤. 가을은 외로움이란 낯선 적으로부터 병탄당하는 일련의 정서적 과정이 아닐까? 어쩌면 약속되어진 소식이 되겠지만 속수무책으로 수납해야 하는 감정의 물결. 달래기 어려운 마음의 파장들. 끝내 치유되지 않는 쓸쓸한 상처들. 그래서 가을을 좋아한다는 표현의 내용은 ‘가을을 탄다.’라는 의미에 더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이만한 나이에 가을을 탄다는 것은 아무래도 쑥스럽고 촌스러움을 면키 어렵겠다. 그래서 인지 가을이면 나는 많이 달라진다. 입맛이 줄고 말수도 줄고 맥이 풀린다. 종일 기웃거리다가 쓰러져 눕기가 일쑤다. 문법과 같은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거나 어딘가로 증발하고 싶어진다. 권태로운 감상과 객기에 시달리다 못해 어딘가를 훌쩍 떠나곤 한다. 이젠 가을의 문턱이다. 조금만이라도 유예되기를 바랐던 순간들이 한꺼번에 출발선에 모여 있다. 올 가을엔 빈둥대지 말아야지. 책도 읽고 미뤄 두었던 장문을 열심히 적어나가야겠다고 다짐한다. 어쩌면 가장 평범한 다짐인데도 늘 지켜지지 않고 가을의 그늘 빛처럼 은근히 자취를 감춘다. 그러나 되도록 가을을 너그럽게 받아들이자. 빈 들녁에 나가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어보자. 어깨에 걸려있던 여름날의 무더운 일상들을 덜어내고 가을이 주는 새로운 의미와 다정해 지자. 그렇다. 세상을 아름답게 내다 볼 수 있는 연습만으로도 이 가을은 족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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