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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대변자 (삼상 03: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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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네번째로 사무엘을 부르셨을 때, 그 소년은 엘리가 알려 준 대답으로 준비를 했습니다. 이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더 독특한 방식으로 사무엘에게 다가오신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3:10). 이 말씀은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엘리도 알았고 하나님께서 네번째로 부르실 때에는 ‘하나님의 환상’도 수반되었습니다.
이에 사무엘은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3:10).
그 다음에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예언의 내용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예언은 수년 전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고지하였던 것입니다.
(삼상3:1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삼상3:12)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말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날에 그에게 다 이루리라 (삼상3:13)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삼상3:14)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이나 예물로나 영영히 속함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삼상2:27)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 조상의 집이 애굽에서 바로의 집에 속하였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나타나지 아니하였느냐 (삼상2:28)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내가 그를 택하여 나의 제사장을 삼아 그로 내 단에 올라 분향하며 내 앞에서 에봇을 입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스라엘 자손의 드리는 모든 화제를 내가 네 조상의 집에 주지 아니하였느냐 (삼상2:29)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지게 하느냐 (삼상2:30)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이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삼상2:31) 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
물론 이것은 사무엘에게는 새로운 소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그는 큰 충격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것이 그가 하나님의 대변자가 된 후 받은 첫 번째 예언이었다는 암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무엘은 자기 침대로 돌아갔으며 아침에 일어나서 평상시처럼 하나님의 전에 있는 문들을 열고 허드렛일을 했습니다(3:15).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을 엘리에게 고하기를 두려워했습니다(3:15). 그러나 엘리는 사무엘에게 모든 것을 고하라고 명하면서 히브리인 특유의 말로 맹세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이 네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3:17:참조, 왕상22:16). (왕상22:16) 왕이 저에게 이르되 내가 몇 번이나 너로 맹세케 하여야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진실한 것으로만 내게 고하겠느냐
그가 진실을 말하자 (그것은 사실상 무명의 ‘하나님의 사람’이 한 예언의 확인이었습니다) 엘리는 슬픈 어조로 하나님의 징계를 깨달은 신자들이 하는 것과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3:18). 엘리는 하나님의 판결에 순복했습니다. 이렇게 사무엘은 그의 첫 번째 예언적인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이러한 사건은 오늘날 우리 각 사람에게, 특히 교회에서 주님을 섬기기 위한 방법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1. 영적인 은사가 직무에 앞섬
하나님은 사역자들에게 직무를 맡기기에 앞서 그 일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은사들을 부여해 주십니다. 사무엘도 예언적인 임무와 직책을 수행하기 위한 은사를 받았으며 그것들을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에 그는 공식적으로 선지자로 인정되었습니다. 구약 시대의 제사장과 선지자의 직무에 적용된 것은 신약 시대의 직무들에도 적용됩니다.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히5:4). 하나님은 필요한 은사들을 주시지 않은 상태에서는 인간을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

섬김보다 영향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름 받은 종의 직책보다는 오히려 지위나 강단으로서의 성직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들은 순수한 목회적 은사의 증거가 부족한 사람을 목회자로 청빙하곤 합니다. 우리는 설교 단상에 목사가 서 있으면 교회 내의 문제들이 효과적으로 해결될 수 있기라도 하듯이, 성도들이 ‘목회자를 모시고’ 싶어한다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듣곤 합니다. 교회 내에 장로들과 집사들이 많은 것도 이와 같은 원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은사들에 대한 통찰을 강조하는 성경 구절로부터(딤전 3장과 딛1장) 우리의 눈길을 돌릴 때에는 언제나 순서가 뒤바뀌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사람들은 먼저 임무를 맡고 그 다음에 영적 은사들을 찾아내어 활용하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선지자’가 아니라 ‘교회를 지키는 사람’이요, ‘장로’가 아니라 ‘교회 위원’일 것입니다(참조, 딤전5:22)
(딤전5:22)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치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

2. 하나님을 온유하게 섬김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엘리에게 가서 말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흥미 있는 일입니다. 그 계시를 보면 엘리도 이 메시지를 들어야 마땅한 것 같습니다. 그 계시는 사무엘만을 가르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예언을 전달하는 일은 얼마간 사무엘의 판단에 맡겨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들으라고 엘리는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은9 엘리에게로 즉시 달려가서 그 메시지를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룻밤을 자면서 그것을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정상적인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물론 사무엘은 매우 어렸으며 엘리와의 대면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 주제에 대해 그와 상이할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그가 주저한 것은 그의 겸손에서 나온 것입니다.
멘투헨리도 “사무엘은 잘난 척하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고하지 않고, 엘리가 요구할 때까지 기다림으로써 엘리의 기분을 고려했을 것이므로 그에게 더 유익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무엘이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은 조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겸손해졌으며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예언에 의해 매우 엄숙하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파멸에 관한 메시지에 열중하여 불을 지피는 몽상가로서의 선지자 이미지와 큰 대조를 이룹니다. 진정한 선지자는 자기 메시지가 이행하기 힘든 것일 때, 눈물로 호소합니다. 신실한 말씀의 설교자는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죽어 가는 사람으로서 설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그의 동기를 이루며, 인간의 곤궁에 대한 동정적인 지식은 자기 죄를 덮어 주신 하나님의 자비를 앎으로써 억제된 자신의 인격과 경험의 일부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지 않는 타락한 예루살렘을 위해 애통해 하셨듯이. 하나님의 진정한 종들은 두려운 율법을 선포하면서 착잡한 심정이 됩니다. 그런 만큼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주권적이고 값없는 구원의 은혜인 복음과,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께로 나오는 사람들을 더욱 즐거워할 것입니다.

3.곤란한 메시지를 선포함
사무엘이 맨 처음 받은 예언은 그 이후에 그가 받은 그 어떤 메시지보다도 전하기 곤란한 것이었습니다. 그 메시지는 주님을 위한 사역에 상존하는 요소, 즉 죄에 대한 질책이 구속의 메시지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복음의 메시지는 전하기도, 듣기도 힘든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죄인들에게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을 시인하고 대속 적인 죽음을 통해서 구원하시는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라는 부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유익이 아무리 매력적이고 긍정적으로 제시된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 신실하게 선포되었을 때에는 “십자가의 거치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갈5;11).
(갈5: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물론 자생적 선행과 선한 사고를 통해 덜 굴욕적인 구속을 제공하는 “다른” 복음들도 많이 있습니다. (갈1:6).
(갈1: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선포될 때, 우리는 반역적인 마음 깊은 곳에서 그의 뜻에 무조건 순종하고 그의 은혜에 무조건 의존할 필요성이 직면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든 선한 사고와 노력들을 버리고 우리의 “의”를 “더러운 옷”으로 고백해야 합니다(사64:6).
(사64:6)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들을 공격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십자가의 거치는 것에 직면하도록 율법의 공포에 관하여 끝없는 논란을 계속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약 시대의 선지자는 신문 만화가들이 즐겨 묘사하는 인물처럼 섬뜩한 주홍색으로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라. 마지막이 임박했다.”는 메시지를 새긴 광고판을 목에 걸고 햇빛 찬란한 큰 길에서 왔다 갔다 하는 부정적인 “파멸의 선지자”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자신은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는 돌이요. 사람들을 쓰러뜨리는 반석입니다(사8:14, 벧전2:8).
(사8:14)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올무가 되시리니
(벧전2:8)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예수를 구세주로 선포하는 것은 십자가를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죄 안에서 영적으로 죽은 사람에게는 가장 혹독한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긍정적인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모든 영적인 요구를 관통하고 그리스도를 포용하며 그 안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촉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청중뿐만 아니라 설교자에게도 어려운 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시듯이, 그의 종들도 하나님 앞에서 계산하도록 사람들을 부르기를 즐거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비록 구원을 받았다 하더라도 아직 믿음이 어린 죄인에게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죄인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죄를 비난할 수 있습니까 불의한 자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의를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보는 사람이라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세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에 힘입고 있음을 알아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백성에게 인정받음(3:19-21)
그 후 수년이 흘렸습니다. 엘리 가문에 고지된 무서운 심판이 유예되고 사무엘은 엘리의 지도 아래 실로에서 계속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사무엘의 출현을 알리고 그를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성숙시킨 세 가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1.하나님이 사무엘과 함께 계심(3:19)
사무엘은 신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성장했습니다. 그의 어머니 한나가 이전에 갖고 있던 모든 염원과 처음부터 아들을 바치겠다는 약속은 이 젊은이 안에서 놀랍게 성취되었습니다. 그는 계속 선지자의 직무을 수행했으며 이런 사실은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라는 말씀에서 입증됩니다. 그의 예언은 성취되었습니다. 그의 사역은 ‘진실 되게 울려 펴졌습니다.’ 종으로서의 그의 사역 전체에 걸쳐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된 것으로 입증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제자들의 증언과 사역을 통해 영원히 지속되는 원리입니다. 개인적인 경건과 말씀의 진리는 참된 신자들의 삶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며 복음주의의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마5:16, 요17:23).

2.사무엘이 선지자로서 공식 인정됨(3:20)
주의 백성들은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 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에는 하나님의 백성은 주의 사자들을 알아본다는 보편적인 원리도 들어 있습니다. 더 기본적인 수준에서 볼 때, 이 말의 요지는 신자들이 서로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신자들을 끌어당기는 일종의 영적 본능, 즉 믿음을 함께 나눈다는 동질 감이 깔려 있습니다. 우리는 비록 서로 만날 기회가 없었다 하더라도 서로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3.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백성을 축복하심(3:21).
말씀의 기근, 즉 하나님께서 자기를 드러내시지 않던 일은 “여호와께서 실로 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심”으로 해결되었습니다. 사무엘의 사역을 통해 일어난 부흥 때문에 흡니와 비느하스의 악한 행동은 더욱 부각되었습니다. 실로는 또다시 이스라엘의 등불이 되었고,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전에서 봉사하면서 하나님의 진리와 거룩하심을 드높이고 즐거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성령의 숨결을 경험할 때마다 공동체의 삶도 고양됩니다. 황량한 겨울 뒤에 봄이 오듯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다는 느낌은 가슴을 채우며 삶의 일상적인 과정을 변화시킵니다.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의 대변자를 세워 달라고 기도합시다. 모든 신자들이 성령 충만케; 되기를 기도합시다. 매일매일 복받기 위해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사무엘의 생애와 사역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를 배웁시다. 하나님께서 성경 안에서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귀를 기울이고, 사랑 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마음으로 영원한 언약의 약속에 기쁘게 순종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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