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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 받은 자의 태도 (삼상 06:1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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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궤를 블레셋 사람에게 빼앗긴 지 7개월이 되던 어느날, 골짜기에서 밀을 베던 이스라엘인들은 뜻밖에 벧세메스로 들어오는 법궤를 보게 되었습니다. 실로 전혀 예기치 못했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임한 것이었습니다.
벧세메스 지역 주민들은 궤가 돌아온 것을 기뻐하면서 희생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궤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있는 큰 바위 곁에 안치되자마자 벧세메스 사람 몇 명이 궤를 들여다 보았습니다. 이런 행동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짓입니다(민4:5-6, 15-20).
(민4:5) 행진할 때에 아론과 그 아들들이 들어가서 간 막는 장을 걷어 증거궤를 덮고 (민4:6) 그 위에 해달의 가죽으로 덮고 그 위에 순청색 보자기를 덮은 후에 그 채를 꿰고(민4:15) 행진할 때에 아론과 그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기를 필하거든 고핫 자손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지니 죽을까 하노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민4:16) 제사장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의 맡을 것은 등유와 분향할 향품과 항상 드리는 소제물과 관유며 또 장막의 전체와 그 중에 있는 모든 것과 성소와 그 모든 기구니라(민4:17) 여호와께서 또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민4:18) 너희는 고핫 족속의 지파를 레위인 중에서 끊어지게 말지니(민4:19) 그들이 지성물에 접근할 때에 그 생명을 보존하고 죽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너희는 이같이 하여 아론과 그 아들들이 들어가서 각 사람에게 그 할 일과 그 멜 것을 지휘할지니라(민4:20) 그들은 잠시라도 들어가서 성소를 보지 말 것은 죽을까 함이니라

이 불법한 행동의 결과로 70명의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죄의 경계를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될 것이라는 점을 상기시켜 줍니다.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또다시 재앙을 당할까봐 두려움에 떨고 있던 벧세메스 사람들은 기럇여아림으로 사자를 보내어 궤를 모셔 가라고 요구했습니다.
이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궤를 다루는 방식에 때해 하나님께서 심판을 내리신 것이 원수들에 대한 그의 분노를 나타낸다면, 벧세메스에 있는 언약 백성을 다루시는 그의 방법은 그들에게 그가 단순히 제사가 아니라, 순종을 요구하는 하나님이심을 상기시켰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가 기계적으로 베풀어지는 것이 아님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궤가 돌아왔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마음 자세나 하나님의 뜻에 대한 그들의 실제적인 반응과는 상관없이 온 이스라엘이 즉각 복을 받을 것임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늘날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민족의 유산에 해당하는 흥미있고 역사적인 물품이 담긴 상자를 들어다보았다는 이유로 70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죽인 것은 가혹하고 전제적인 것(잔인하고 이례적인 형벌)이 아닌가”
경솔한 호기심을 공손함과 구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죽은 친척의 시체를 파내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만, 박물관에 가면 비록 미이라로 보관된 고대 애굽 사람이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시체를 관람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에 대한 모독이 다른 사람에게는 문화적 계몽이 됩니다!
궤의 경우에 문제가 되는 것은 상자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의 위엄이었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잘못 다룬 것은 아카시아 나무와 금으로 만든 단순한 유물이 아니었습니다(출37:1-16). 그들이 능욕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진리였으며, 그래서 의로우신 하나님은 그들을 징벌하지 않으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신약 시대의 고린도 교회에서도 그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 교회가 주의 만찬을 모욕했으며, 그 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병에 결리고 그 중 일부가 죽었던 것입니다(고전11:17-34).
골동품이라도 되듯이, 혹은 심지어 값을 매길 수 없는 국보라도 되듯이 궤를 들여다보는 것은 궤의 진정한 의미를 완전히 무시하고 하나님 자신을 능욕하는 일이었습니다. 궤는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였습니다. 그 궤는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언제 어디에서나 자신의 언약 백성과 만나고 그들에게 예배 받으시는 곳이었습니다. 광야의 불타는 떨기나무처럼, 궤도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이기 때문에 “거룩한 곳”으로 지칭되었습니다. 궤를 호기심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을 무시하는 행위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맞지 않는 행위였으며 하나님을 조롱하는 행위였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의 죽음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갈6:7)라는 말씀을 확실하게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궤가 박물관 시대까지 보존되도록 허락하지 않으신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의 영광을 선언하고 그의 언약적 구원을 상징하는 것이 과거의 기괴한 유물로서 만인의 구경거리가 되어서는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을 보고 벧세메스 사람들은 슬퍼하고 두려워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과는 달리 그들은 하나님의 위엄과 존엄을 인정하고 회개했습니다. (삼상6:20)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뉘게로 가시게 할꼬 하고”
그들은 궤가 자기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으며 궤가 떠날 때까지 안전하다는 느낌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즉시 궤를 떠나 보낼 조처를 취했습니다. 그들의 회개가 하나님과 화해하겠다는 마음을 불러일으켰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범에 따라 경외와 거룩한 확신을 가지고 그 궤를 다룰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런 확신이 부족했으며, 또 하나님의 법을 일단 어겼던 터라, 그들은 그 궤를 보관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납득이 가기는 하지만, 신자들이 진정으로 회개했을 경우에 얻게 되는 회복을 그들이 경험하지 못했음을 나타냅니다. 죄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회개하고 하나님과 화해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다시 자기에게 사명을 맡겨주시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매튜 헨리는 “우리가 실수로부터 보호받고 복음의 구원에 의해 유익을 얻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겸손한 두려움과 사랑, 그리고 하늘의 소망의 영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의 상징이며 임재의 표현이었던 궤를 단순히 호기심으로 여호와의 언약을 어기어서 화를 당한 벧세메스 사람들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때 법궤 귀환을 맞이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이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할 태도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참 성도의 진정한 모습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1. 기쁨에 넘치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본문에는 추수 때가 되어서 골짜기에서 밀을 베던 벧세메스의 이스라엘인들이 법궤를 보았을 때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13절). 아마도 그들은 여호와의 궤를 블레셋인들에게 빼앗긴 후에 마치 하나님께로부터 영원히 버림받은 사람들처럼 극한 절망감과 암담한 마음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도 뜻밖에 자신들이 그 법궤를 찾으려는 시도도 하기 전에 빼앗겼던 그 법궤가 마차에 실려 자기들 눈 앞에 되돌아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손길에 감격하여 기뻐 뛸 수 밖에 없엇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는 당신의 공로를 믿을 때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우리 마음이 기쁨으로 충만케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요 7:38). 따라서 이 기쁨은 인간의 수양(修養)이나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오직 중생한 자에게 성령의 열매로서 주어지는 것입니다(갈 5:22). 그렇기 때문에 이 기쁨은 세상적인 일시적 기쁨과는 달리 지속적인 기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조악한 환경과 불행한 처지에 있다손 치더라도 사도 바울처럼 범사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빌 4:4).

2. 아낌없는 헌신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본문에는 수레가 벧세메스에 들어와 멈추었을 때에 이스라엘인들이 즉시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소들을 잡아 여호와께 번제로 드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14,15절). 그뿐 아니라 그들은 그날, 이 번제 외에도 다른 많은 제물을 여호와께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참 은혜를 체험한 자에게는 자연스럽게 감사와 헌신의 삶이 나타납니다. 곧 '나에게 주신 은혜가 너무 고마와 무엇인가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데 드릴 것이 없어 이 몸 드립니다' 141장5절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줄알아 몸밖에 드릴것 없어 이몸 바칩니다 아멘” 라는 어떤 성도의 고백과 같이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헌신을 주께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한걸음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받은 자에게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권고합니다(롬 12:1). 진정 여러분은 하늘의 영적 복을 받은 자로서 기꺼이 자신의 생애를 주님께 전폭적으로 드리셨습니까

3. 은혜를 증거하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인들은 그 기쁨의 날에 여호와의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이 담긴 상자를 큰 돌위에 둠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였습니다(15절). 다시 말하면 그들은 자신들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림으로써 자신들과 동일한 기쁨과 복을 함께 나누고자 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18절에는 그 돌이 당시에 일어났던 사건의 증거물로서 오늘날까지 있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값없이 주어진 은혜를 일시적, 감정적 마음으로 한 두번 전했던 것이 아니라 지속적, 의지적으로 여호와의 큰 은혜를 증거했음을 시사해 준다 하겠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그 기쁨과 감사가 너무 크기 때문에 그 은혜를 지속적으로 전파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초대 교회 당시 사도들은 극심한 핍박과 위협으로 그들의 복음 전도를 방해했던 자들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기뻐했을 뿐 아니라 어느 때 어느 것에서나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행 5:41,42)하였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도 이 복음 전도 사역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았던 것입니다(행 20:24). 그렇다면 과연 여러분은 자신의 받은 그 은혜를 증거하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이는 실로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로서 이 은혜를 받은 자에게는 필연적으로 기쁨이 넘치게 되고, 더 나아가 자신을 아낌없이 헌신하게 되며, 그 은혜를 증거하는 삶이 따르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에 이러한 모습들이 없다면 그것은 구원받지 못했거나 아니면, 그분의 은혜를 망각했기 때문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무쪼록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삶에 이런 은혜받은 자의 모습이 현저하게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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