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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도우심 (삼상 07: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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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가 돌아왔으며, 그런 사실이 곧 하나님의 복을 받을 것임을 암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큰 고통에 잠겨 있었습니다,약 "20년 동안! 사가는 `오래'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 사람들의 억압과 영적인 타락의 우울 속에서 고통을 당했습니다. 장막은 엘리의 후손들의 손아귀에서 가까스로 벗어났지만, 궤가 아비나답의 집에 안치된 채 몇 년이 지나도록 그대로 있었다는 사실은 하나님 백성의 타락상이 어느 정도인지를 강조해 줄뿐입니다. 저자는 20년간의 시련이 끝나고 마침내 큰 번화가 일어나서 낡은 방식이 무너지고, 그 민족의 영적인 각성이 일어났음을 매우 간결하게 개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은 민족적 수치의 과정이 끝났음을 암시합니다. 이스라엘은 매우 느리게 배웠던 것입니다. 그들은 고통을 당할 때까지 계속 하나님을 멀리했습니다(시 119:67. 그러나 고통이 그들의 중심을 강타하자, 그들은 하나님이 유일한 소망임을 점차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사무엘의 사역은 민족의 영적 위기를 부풀리는 누룩의 효력을 지녔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에더샤임(Edersheim) 이 말하듯이, 이것은 준비일 뿐 이미 시작된 변화를 행복한 결말로 이끈 것은 사무엘의 공적이었다. 그가 이스라엘에 주는 가장 진지한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다.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이 표현에는 회개가 기본적으로 마음에 속한 것이며, 히브리 동사의 형에 비추어 볼 때 돌아오는 일이 시작되어 계속되었다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이방 신들 바알들, 4절)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이전의 망설임과 우유 부단함에 반대됨) 그만 섬기라.' 전심으로 돌아와서 죄를 없애 버리고 산 신앙을 간직함으로써 회개한 이스라엘에게 여호와는 이전처럼, 이번에도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임을 입증했다.(7:l-3).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하고 여호와만 섬기는 때가 임했습니다(7:4). 하나님의 영이 그들에게 죄를 깨우쳐 주자 이런 일은 라 사람들 사이에서,그리고 이 마을 저 마 을에서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갱신하기 위해 모인 이 엄숙한 대집회 중의 하나가 무대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고든 이 말하듯이 그들은 이런 식으로 `사사 시대를 특징짓고(삿 2:11_23) 어느 정도 이 장에서 예증된,타락-억압-회개-구원의 도식에 들어 있는 세 번째 요소를 이룰 것이다.이제 구원이 임박했습니다!

미스바에서의 회개(7:5-6)
사무엘은 온 백성을 미스바로 소집했습니다. 그 곳은 현대의 예루살렘 서 북쪽으로 약 g마일 가량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예배를 드소 거나 전쟁을 하기 위해 자주 그 곳에 모이곤 했습니다(삿 20:1 ; 21:1 5, 8, 삼상 10:l7). 보통은 총회 소집 후 곧이어 전투를 치렀지만 이 경우에는 전쟁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무엘의 총회 소집 목적은 점진적인 영적인 각성을 확인하는 데 있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자손! (7:4)은 개별적으로 가나안 종교의 우상을 버렸으며,민족적으로는 시정 정치 제도의 조직체인 `이스라엘(7:5)이 합심하여 죄를 회개하고 여호와께 헌신하겠다고 서약했습니다. 이 때에 물을 붓는 일 금식 고백,그리고 이어서 이스라엘의 `사사'로 재직하던 사무엘의 중보 기도가 수반되었습니다.

1. 여호와 앞에 물을 부음
이스라엘의 죄 고백과 관련된 두 가지 행동 중에서 첫 번째 행동은 물을 길어서 쏟아 붙는 깃이었습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행등이였습니다. 이것은 내면의 영적인 경험에 대한 외적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부슨 의미를 지닐까요 다른 구절들이 이에 대한 단서 이상의 것을 제시 해 줍니다. 시편 22:l4절에서 시편 기자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언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예레미야애가 2:l9절에서는 하나님 백성의 간구가, 그들의 마음이 여호와가 계신 곳에서 “물처럼” 쏟아졌다는 말로 묘사핍니다. 사무엘하 l4:l4절에도 이와 비슷한 개념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모으지 못함 같을 것이오나.” 쏟아진 물은 마음의 고통에 대한 상징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이 민족의 세속적인 상태와 영적인 상태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땅에 쏟아진 물처럼 죄 때문에 유용한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고 우리가 물을 쏟아븟듯이, 깨끗이 씻음 받고 회복되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여 당신 곧 우리 하나님 앞에 우리 마음을 쏟아붓습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물은 농작물에 물을 댈 때처럼 생산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물은 무차별적으로 쏟아짐으로써 낭비되고 있었던 것입니다.이스라엘은 “오 하나님이여! 우리는 우리 자신과 당신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우리의 특귄을 허비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 능력에 힘입어 각성할 마음자세가 되어 있는 응징당한 심령들을 상징했습니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인의 경험에 관한 교훈의 내용들과는 거리가 먼 세상입니다. ‘적극적인 사고'와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법'을 강조하는 자기 이미지와 자아 개선의 사상 유파는 그런 자기 비하를 부정적이며 해로운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회개는 `외적인' 것이고 각성은 `내면의' 것입니다. 따라서 각성은 `믿음'을 통해서 계발된 자신의 내적인 잠재력을 깨닫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런 각성의 시작은 과거를 잊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므로 당신은 위대하다고 자신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패배감을 버리고, 실수에 대한 탄식을 증단하며,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작하십시오! 그런 가르침와 죄인등이 즐겨 든는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 그 자체는 외부로부터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의 최상의 잠재력을 깨닫지 못하도록 막는 세균과 랐은것으로 취급되기 때문입니다. 이 죄는 또 하나님의 능력이 가비된 긍정적인 사고력의 도움을 약간 받고 성경의 인용문과 고대와 현대의 선별된 발광체들이 뿌려지면, 우리가 치유할 수 있는 것으로 제시되기도 합니다. 극단적인 형태의 이런 사고 방식은 `네가 원한다면 너는 어떤 사람이든 될 수 빙다.그러니 너 자신을 믿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쏨은 도처에서 죄의 속성을 강조하며, 어느 곳에서도 죄인들에게 혼자 힘으로 죄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도움 없이 혼자의 노력으로 하나님께 칭찬을 들을 수 있다고 말하지 딴습니다.따라서-우리가 원하기만 하면,우리가 어떤 사람이든 될 수 있다.는 개념은 성경의 가르침과 모순되는 것입니다.성견은 `우리가 원하는' 것 자체가 문제임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본래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과 정반대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하 것은 성령에 의해 거듭난 새로운 심령과 그것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죄에대한 릎개와 죄인들의 유일한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 신앙으로 표현된 새 생명입니다. 그런 회개와 신앙은 거룩하신 하나님 효에서 먼저 자신이 죽었고 정죄받았음을 깊이 각성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은 자기 존중과 하나님이 받으실 자생적 선행능력에 대한 확대된 비전과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와서 그의 충만한 구원을 경험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생득적인 잠재력이 아니라 우귀의 약함을 주님의 강함으로 채워 주시는 그의 거룩한 능력올 깨달을 때까지 성령이 만들어 내신 무력감과 철저한 궁쐼감에서 시작됩니다. 문제의 핵심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돕기 위해 부슨 일을 하겠다는 것이나, 심지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죄에 찌든 자신의 어리석음의 결과들로부터 구원을 얻도록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자유롭고 은혜롭게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수단을 버리고 마음속 깊이 우리가 지금까지 하나넘의 콧구멍 속에 들어 있는 악취엿음을 인정하는 것은 굴욕적인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진정한 회개를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정죄를 당할 만큼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것처럼 행복하고 고고햐 심령으로 죄를 고백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죄를 본다는 것은 지옥을 들여다보는 것이요 율법을 어긴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을 욺다고 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쩐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자기 이미지'와 `자기 가치'를 강조하는 것은 순전히 자기 도취인 것입니다. 우리의 슬프고 절망적인 상태에 대한 해답은 우리가 얼마나 가치있는 존재이며, 우리가 얼마나 사랑받을 만한 존재인가를 우리 자신에게 일깨워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화목함으로써 구원과 새로운 구속적인 삶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랑을 실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이 말씀의 요지는 다음과 같숭니다.하나님 앞에서 정말 쏠모 있고 가치 있음을 경험하기 위해서는,즉,신앙 실천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딴은 참새보다 더 가치있는 존재마 lo:3l) 임을 알기위해서는 우리가 죄와 자아 를 철저하게 부인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서야 합니다. 모든 죄는 우리의 회개를 필요로 하며, 용서의 기쁨과 생명의 새로움이 심령으로 흘러 들어와서 영흔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은 진정한 회개가 있은 후에야 가능합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구원의 기쁨을 경험해야, 하나님의 사랑을 알며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자신이 구원에 이르는 신앙을 지니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행복에 젖어 `자기 가치'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 가운데에서 하나님 은혜의 역사를 즐거워하고 그리스도의 은혜의 역사를 즐시워하며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교제에 대해 기뻐하는 신자가 어느 정도나 `자기 (self) 라는 접두어가 붙은 말의 개념에 사로잡힐 것인지는 의문입니다. 눈을 구세주께 고정시키면, 당신은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고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정-띤자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가치'이며 그들의 `이미지'이고, 그들의 `평가 기준'이며 그들의 `영광'입니다. 주님을 압과 동시에 `자쏴'는 상실됩니다.그러나 `자아'는 참된 자기를 발견한 것입니다.

2, 금식
백성들은 이상하게도 매우 정교한 식사 차정 제도에 매여 있었으므로, 모세 율법에는 어느 곳에도 금식에 관한 규정이 나오지 않습니다. 율법체서 금식과 가장 가까, 운 것은 속죄의 날에 지켜야 할 다소 막연한 자기 따인에 대한 요구였습니다(레 l6:29. 그러나 훼어베이언( Fairbairn 쐬 언급하듯이,우리는 특별한 겸손과 슬픔이 요구될 때, 언약 백성o시시때때로 준수해 온 금식에 관한 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d금식에는 다윗의 경우(삼하 l2:2l나 심지어 라W 아한(왕상 2l:27 의 경우처럼 개인적이고 부정기적인 것과 집단적이고 정기적인 것(슥

8. l9) 이 있습니다.또한 이 금식에는 하루 종일 식사를 전혀 하지 않는것(삿 20:23, 26)이나 몇 주 동안 식사를 제한하는 것(단 lO:2) 등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경우에 금식은 임박한 위기에 마응을 집중 시키는 수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미스바에서 금식했습니다.이펀 챈동은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겸손해지는 마음과 완전히 부합되는 것이었습니다 고난의 상징 행위로서의 금식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데 실제적으로 방해가 되는 요소음식)를 제거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범한 죄에 마땅한 응징의 요소를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물을 쏟아븟는 것과 금식은 그들이 그 후에 `고백합으로써 설명하고 확증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나타내 주었습니나.그들은 솔직하게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다.'7:6)라고 고백했습니다.
에벤에셀의 구원(7:10-17)
블레셋 첩보원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 모인 것을 보고 선제 공격을 가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왔으며 이스라엘은 이 때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두려움을 확산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7:7).
전시에는 두려움과 전투 결정이 따라다니기 마련입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습격을 막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압제자들이 주님의 손에 넘겨졌음을 거의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무엘에게 원수의 손아귀에서 거의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무엘에게 원수의 손아귀에서 건져 줄 것을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7:8)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사무엘이 어린 양을 번제로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해 여호와께 외치자 “여호와께서 응답하”셨습니다(7:9).
사무엘의 간구는 어마어마한 우뢰로 응답되었습니다. “큰 우뢰를 발하여 그들(블레셋 사람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 한지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을 추격하며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그들을 쳐부수었습니다(7:10-11). 완전한 승리를 거둔 후, 사무엘은 그곳에 기념비를 세우고 그것을 “도움의 돌”(히브리어로 에벤에셀)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식으로 이 전쟁에 이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그 이후로 이 전쟁은 에벤에셀의 전투로 기억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이 눈부신 개입에 감사하여 사무엘은 승리의 의미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의 감사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7:12).

1. 팔일 된 어린 양
사무엘은 “젖 먹는 어린 양을 취하여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렸”습니다(7:9). 율법에 따르면, 이 어린 양은 최소한 팔 일은 되었을 것입니다(출22:30 ; 레22:27). 여기에서 두 가지 사항이 언급되어야 하겠습니다.
첫 번째 사항은 제사에 관한 것입니다. “희생 제사는 기도의 바탕이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66:18)고 말합니다. 먼저 죄가 제거되어야 했습니다. 번제는 죄인이 죄를 제거하고 주 안에서 새 생명으로 성화 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번제는 선지자의 중보 기도를 촉진시켰습니다.
두 번째 사항은 희생 양의 연령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태어난 지 팔일밖에 안된 어린 양이어야 했습니다. 성경에서 칠은 완성을 의미하고 팔은 새로운 시작을 상징했습니다. 이 양식은 서경 전체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며 모든 경우에 ‘새로움, 구속, 성화, 그리고 안식’을 포함한 구원의 한 측면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노아의 가족(8명)은 홍수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언약의 백성이 되었으며 영적으로 새로 태어남에 대한 구약의 표징인 할례는 태어난지 팔 일째 되는 남자 아기에게 실행되어야 했습니다. 구약의 많은 의식들과 사건들은 ‘팔 일’과 관련하여 준수되었으며 따라서 그 곳에는 갱신의 양식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주간의 팔 일째 되던 날에 부활하신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칠톤(Chilton)이 말하듯이, 그래서 이 날이 “새 피조물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을 대신하게 된”것입니다. 따라서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위해 드린 제사는 팔 일의 의미와 관련해서 고찰되어야 합니다. 그 제사는 여호와와 함께하는 새 생명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2. 에벤에셀
기념비를 세우는 목적은 후손들에게 과거의 유산에 대하여 말해 주는데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기념비적인 돌들을 발견한다면 아마 그 시대의 상항과 전투와 역사를 알게 될 것입니다. 잊어진 돌들의 의미를 알게 될 때, 역사도 살게 되며 잊혀진 모습도 상상하는 배경이 되기도 합니다.
주의 백성들이 세운 기념비들도 비슷하나 더 심오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 즉, 하나님의 강력한 행동들을 증거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벧엘에서 꾸었던 야곱의 꿈(창28:18-19), 요단강 횡단(수 4:20-24). 그리고 세겜에서의 언약 갱신(수24:26) 은 모두 “후일에 너희 자손이 물어 가로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뇨 하거든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었나니…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영한 기념이 되리라,”(수4:6-7)고 말해 주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표징이 되었습니다. 이 기념비들의 의미는 그것들이 하나님께서 과거에 그의 백성을 위해 행하신 것과 장차 때가 되면 행하시게 될 것의 항구적인 증거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세운 돌은 “도움의 돌”이라고 불렸으며,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신 곳에도 이 이름이 붙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수세기 후,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증언할 때에도 이와 비슷한 말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거하는 것은”(행26:22). 영적인 관점에서 바울은 인격적인 에벤에셀, 즉 그의 마음의 증거, 하나님께서 그 때까지 그와 함께 계셨다는 개인적인 증언의 증거를 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시대 하나님의 자녀의 증언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에벤에셀”은 우리의 순례 길에 이정표 석으로 서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나님의 평화(7:13-17)
평화와 국가적인 안전이 이스라엘에 임하여 사무엘이 사사로 있는 동안 대체로 계속 유지되었습니다. 사시 시대를 특징짓는 주기의 네번째 부분이 완성된 것입니다. 그 주기는 타락과 억압, 그 뒤의 회개와 구원의 순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스라엘은 아직 필요한 것이 많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실로가 아직 버림받은 채로 남아 있었고, 궤가 기럇여아림에 버려져 있었으며, 불운의 제사장 엘리 주재 하의 장막 예배조차 흐지부지되어 갔습니다. 이스라엘이 사사들이 다스리던 공화정에서 왕정(왕은 다윗의 인격 안에서 그들에게 메시야적인 왕에 관한 약속을 예시했습니다.)으로 변화될 길고도 고통스러운 전환과 부흥의 기간 문턱에 들어섰음을 알고 있던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사무엘은 자기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목적을 이루는 핵심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수년간 그는 백성들을 위해 일했으며 다윗 시대에 있을 더 심오한 부흥의 길을 닦았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얼마나 은혜로 우신지요! 그는 우리의 성향과 도발에도 불구하고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시고 보존해 주십니다. 주님은 구속의 사랑을 가지고 우리의 연약함에 이르시며 우리에게 자신을 따를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구주로 알고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여러분을 “도우셨음”을 끊임없이 증거하는 마음의 “에벤에셀”을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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