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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에 종 (롬 06: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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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디 멜로이라고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젊었을 때에 나는 혁명가였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항상 이런 것이었다. '주여, 세상을 뒤엎을 힘을 주옵소서. 세상을 한번 바꾸어 놓아야겠습니다. 그럴 수 있는 힘을 주세요.' 시간이 흘러, 중년에 이른 나는 내 인생의 절반이 덧없이 흘러갔음을 깨닫고 기도를 바꾸었다.

'주여, 나와 만나는 모든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 세상이 아니라 다만 나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주세요.' 그 후, 좀더 나이가 들자 이렇게 기도를 했다. '나의 가족들과 친구들과 내가 만족해야 되겠나이다. 그럴 수 있는 힘을 주세요.' 그러나 나 자신이 늙고 '앞으로 얼마 안남았다'라며 남은 여생을 헤아리는 지금에 와서야 나는 나의 우둔함을 깨달았다.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하고 내 자신을 꾸짖는 지금의 기도는 이것이다. '주여,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나의 기도가 진작에 이러했더라면 나의 일생은 헛되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과 같은 이런 생을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 여러분은 지금 어느 시점에 있습니까 이 여러 기도 중에 어느 시점에 있습니까 여러분, 참된 행복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참된 성공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누구든 후회라고 하는 고통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 합니다.

 후회라고 하는 고통-'그렇지 않았어야 하는데'하는 바로 거기에 머물러서 헤어나지 못하고 꼼짝 못하는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자유를 추구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좀더 넉넉한 경제적 자유를 얻기 위하여 흔히들 말하는대로 배고프지 않게, 춥지 않게, 넉넉하게, 그리고 웃기는 얘기지만 남부끄럽지 않게 살아보겠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얻은 것이 없습니다. 혹은 정치적 자유를 얻어보려고 합니다.

누구의 속박도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조그마한 간섭도 싫어합니다.

심지어는 차도 타고 가면서 교통신호 바뀌는 것도 꼭 속박 같아서 싫어합니다.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참 많습니다.

파란 신호로 바뀐 다음에 출발해도 좋으련만, 신호가 바뀌기도 전에 달려가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급하기도 하지, 저렇게 빨리 죽고 싶은가'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도 속박이요, 매이는 것 같아서 싫어합니다. 그냥 자유하고 싶은 것입니다. 또, 사회적 자유를 얻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아보려고 합니다. 인정 못받는 것 같아서 괴로워합니다. 인정 받아보려고 안간힘을 다해봅니다. 그러나 별것 아닙니다. 교육적으로 자유를 얻어보려고 끝없이 공부도 해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끝도 없는 것입니다. 점점 더 내가 무식하다는 것만 깨닫게 됩니다.

공부해서 자유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도덕성입니다. 도덕성을 떠나서는 자유할 수 없습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로버트 월트 제임스라는 경제학자가 쓴 소설인데 그는 이 책으로 일약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나이 40이 넘은 한 여자가 나옵니다. 그녀는 아이 둘과 남편과 함께 편안한 가정을 이루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52세 되는 사진작가가 이 마을을 방문하게 되고, 그녀와 만나 이야기하게 되고, 급기야 서로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긴 시간도 아닌 단 나흘 동안에 그들은 뜨거운 사랑을 합니다. 일생이 오직 이 시간을 위해 있었던 것 같고, 만약 이 시간이 없었다면 일생은 헛되었을 것이라고 할 만큼 요셋말로 아주 화끈한 사랑을 합니다. 너무너무 행복한 그 때에 남자가 여자에게 말합니다. "같이 이 집을 떠납시다." 여자도 따라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사진작가에게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합니다. "나도 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을 따라가게 된다면 언젠가는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것으 내가 사랑하는 자녀와 남편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나는 당신을 따라가지 않겠습니다. 비록 당신을 사랑하고 있지만..." 이것이 이 소설의 주제입니다.

사랑하면 그만이고, 내게 좋으면 그만이고, 네가 좋으면 그만이다-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유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해서 행복할 수도 없어요. 도덕적 욕구를 떠난 행복은 없습니다. 그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특별히 중요한 것은 신앙의 자유입니다. 신앙의 자유-이 무서운 율법과 심판으로부터, 이 무거운 죄책으로부터 자유하기 전에는 누구도 자유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은혜, 오직 은총의 세계에서만이 비로소 참 자유함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심령 안에 죄와 사망과 사탄과 진노가 있습니다. 이로부터 온전한 자유를 얻기 전에는 누구도 자유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고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의 자유를 얻고 양심을 버렸어요-그래서 자유가 없습니다. 정신적인 자유는 얻었는데 죄의 종이 되어버렸어요-그런고로 자유가 없습니다. 지식의 자유는 얻었는데 자기 교만에 빠져버렸어요, 혹은 자기 절제에 실패하고 방종의 사람이 되어버렸어요-여기에는 아무 자유도 없습니다. 스스로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자신을 놓고 볼 때에 자유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이 사람 마음대로 돈을 주어도 되고, 이 사람 마음 대로 높여주어야 되고, 이 사람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다 해주어도 될 만한 그런 존재입니까 자유를 얻을 자유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나는 나를 쳐서 복종케 하노라'-그 말씀의 깊은 의미는 이렇습니다. 자신에게 자유를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돈도 적당히 있어야지, 어쩌다가 몇 억짜리 복권에 당첨되면 그런 사람은 영 망치고 맙니다. 아무나 돈 가지는 게 아니예요.

아무나 지위를 가지는 게 아니예요. 도대체 여러분은 어느 정도의 자유를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사람입니까 바울은 생각했습니다. 나는 안된다, 그래서 자신을 쳐서 복종케 하고, 노예를 길들이듯이 쇠사슬에 묶고 매질을 해야 정신을 차리고 살지, 놓아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정도 자신을 인정하고 있습니까 놓아주어도 되는 사람입니까 하고 싶은 대로 다하면 되는 것입니까 자유란 그 구를 위해 주어지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참 자유의 길은 주어진 자유를 반납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자유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종되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이 가르쳐주는 대로 오직 은혜 안에 있습니다. 율법에서 벗어나 은혜 안에 있음으로써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뭔가 거역하고 반항하는 기질이 있습니다. 그저 벗어나려고 버둥거립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순종의 종(16절)"-여기에 참 깊은 뜻이 있습니다. 특별히 선택적으로 순종의 종이 됨으로써 비로소 자유할 수 있습니다.

 흔히들 세상에서 말하는 대로 아주 못된 남편이 있었습니다. 남편으로서 아내에게 정말 못된 짓을 다합니다. 그런데 그 남편으로 말미암아 시달리고 시달리던 아내가 견디다 못해서 그만 병이 들었습니다. 남편은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아내를 찾아왔습니다. 옆에서 울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보면 있는 대로 욕을 퍼부을 줄 알았던 아내가 뜻밖에도 엉뚱한 말을 합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기가 막힌 남편이 이렇게 물어봅니다.

"나같은 못된 남편을 말이오" 아내는 다시 말합니다. "당신은 나 없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나는 아닙니다. 나는 당신 없이는 살지 못합니다. 또한 나 없이 당신도 살지 못합니다." 남편은 이 말을 듣고 정말로 회개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내는 그토록 남편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남편과 나는 하나라고 생각을 합니다. 나 없이 저 사람은 못산다고 생각을 합니다. 나 역시 저 사람을 떠나면 내가 나 될 수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비록 남편은 자기보고 밤낮 죽으라고 발길짓을 했는데도 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선택된 것입니다. 순종의 종이 된 것입니다. 순종의 종이 되는 순간, 그것만이 자유할 수 있고 남을 자유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은 말씀합니다. '의에게 종이 되라'-의에게 종이 됨으로써 비로소 불의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의를 행하고, 의를 지켜 행한 바로 거기에 참된 자유의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죄와 불의, 시기, 증오, 근심, 걱정, 허무... 이 많은 것에 우리가 붙들려 있고 이같은 일에 우리가 끌려가고 있을 때, 양심과 영혼과 이성이 다같이 깊은 노예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불의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 양심이 속박당하고 가책에 매여 있는 사람에게는 항상 높은 억압이 있는 것입니다. 이 이성적 억압은 무서운 것입니다. 정말 내가 죽일 놈이지, 그러니 나는 안된다, 하는 그 무서운 중압감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잊어버리겠다고 발광을 해도 여기서 절대로 벗어나지 못합니다. 쇠사슬에 매인 것도 아닙니다.

누가 목을 끄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이 억압에서, 노예 상태에서, 감금 상황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면 자유할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여기에 있습니다. 진리와 의와 사랑을 선택하고, 선과 은혜의 길, 순종의 노예가 되는 데에 있습니다. 양심이 지시하는 길로 갈 때에 비로소 내가 자유할 수 있고, 내 영이 자유할 때에 내 몸도, 내 정신도, 내 밝은 이성도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국 춘추전국 시대에 봉무제라고 하는 노나라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신부라는 고을의 원님으로 있었는데 어느날 불현듯 이웃 제나라에서 군사들을 이끌고 쳐들어왔습니다. 봉무제는 모든 고을 백성들을 서둘러 성 안으로 모이게 하여 성문을 닫드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마침 보리를 추수할 때인지라, 성 밖 들판에는 보리가 노랗게 익어 있었습니다. 만일에 성 안으로 피해 들어간다면 제나라 사람들이 이것을 다 약탈해갈 것입니다. 사람들은 봉무제에게 말했습니다. "무조건 성 안으로 피할 것이 아니라, 고을 백성들로 하여금 내 것 남의 것 가릴 것 없이 보리를 추수해서 각각 가지라고 해버리십시다. 그러면 너도 나도 달려 들어서 재빨리 추수할 것입니다. 1년 동안 수고한 것이 아깝지 않습니까 적에게 내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봉무제는 안된다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결국은 그냥 성 안으로 들어가 굳게 성문을 닫았고, 제나라 군사들이 그 많은 곡식을 거두어 가버렸습니다. 이 사실이 온 나라에 알려져서 봉무제는 급기야 재판정에 서게 됩니다. 임금님은 봉무제에게 묻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적에게 이로운 일을 하였느냐 차라리 그 곡식을 불질러버리든지 할 것이지!" 그는 정중하게 말합니다. "제가 한순간 적에게 이롭게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상황이 어렵다고 해서 백성들로 하여금 마음대로 거두어 먹으라고 한다면, 그들이 앞으로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아마도 피땀흘려 살 생각은 안하고, 남으니 것은 공짜로 아무 것이나 가져도 된다, 남의 것이라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못된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10년이 걸려도 고칠 수가 없습니다."

임금님은 봉무제의 그 깊은 뜻을 헤아리고는 그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고 합니다. 더욱이 우리는 전쟁이라고 하는 비상시국을 지내오면서 횡재하는 사람도 많이 보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도 많이 보았습니다. 정치적 혼란을 치르는 동안에 엉뚱한 사람이 부자 되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무너진 도덕성은 수십 년이 가도 고칠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렇습니다. 나가서 머리에 띠두르고, 소리지르고, 데모다 파업이다 하면 당장에 뭐가 되거든요. 이것처럼 쉽게 되는 것도 없습니다.

이런 버릇을 들여놓으니까 안되는 것입니다. 폭력을 통해서 이익을 얻는 이런 사회제도안에서는 이 세대가 참으로 자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의에게 종으로 드리라'-스스로 의의 노예가 되고, 의의 종이 될 때에 비로소 불의에서 자유할 수 있고, 죄에서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일본사람의 손에서 벗어나서 이제껏 49년 동안 자유를 배웠습니다. 일본의 식민지 정치하에서의 자유, 공산당과의 관계에서의 자유, 가난과 독재와 군사정치로부터의 자유... 다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되었다, 이제는 자유되었다, 이제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민간정부, 문민정부를 세웠으니까 이제는 다 되었다, 했습니다. 무엇이 되었다는 것입니까 그실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저 위에서 몇 사람 왔다갔다 바뀐 것 뿐입니다. 결국은 다시 시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의 말씀대로,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한사람 한사람이 거룩함에 이르고, 의의 종이 될 때에 진정으로 이 땅에 자유함이 정착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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