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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마리아 성에 넘친 기쁨 (행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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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7장에는 초대 교회 일곱 집사의 한 사람이었던 스데반 집사의 장렬한 순교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그는 흥분한 군중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도 그들을 저주하지 않고 오히려 기도했습니다.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더우기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갚아야 한다는 율법 정신에 익숙한 유대인들로서는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한다는 사실이 있을 수 없는 일어었습니다.그러나 바클레이는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따르는 사람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고 말했습니
다.
스데반이 그토록 처참한 순교의 현장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은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이 내 생각으로는 어렵지만 성령이 내 마음에 계시면 가능한 것입니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나 공격하는 사람이나 악행하는 사람에 대하여 관용하고 포용하고 용서할 수 있는 힘의 근거는,성령의 능력이 나를 사로잡았을 때 일어나는 사랑에 있는 것입니다.예루살렘 교회에 박해가 일어나자 일단 박해를 피하여 교인들이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는 것이 본문의 줄거리이고 그리고 흩어진 그 사람들이 사마리아에서 열심으로 전도했다는 것이 사도행전 8장의 이야기입니다.
칼빈은 “이 사건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갈라놓았던 중간에 막힌 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사마리아 지방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함락되어 망하고 포로로 끌려 갔을 당시 남아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과 그 땅에 이민온 이방인이 결혼하여 혼혈종을 이룬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단일 혈통 자손임을 자랑하는 유대인들로서는 사마리아 지방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혼혈종이라는 이유 때문에 멸시하고 상종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박해를 피하여 교인들이 사마리아로 흩어졌다는 것은 사마리아와의 교통이 시작되었다는 것이기 때문에 선교적 처원에서는 물론 사회적 관계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본문 4절입니다.“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라는 말씀은 드디어 사마리아 선교가 구체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그리고 예루살렘 교회가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한 것은 주님의 명령이었고 섭리였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8에 의하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분부하신 말씀이 있었는데,그것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입니다.이미 주님은 사마리아에도 복음을 전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그러나 사마리아에 대한 민족적인 우월감과 편견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로서는 사마리아 전도는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그래서 그들은 사마리아는 선교 대상에서 제외시킨 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전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물론 그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그래서 주님은 예루살렘에 큰 박해를 일으켜 교회를 사마리아로 흩어지게 하시고 사마리아 전도를 시작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린 여기서 잠깐 우리의 사마리아가 어디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너만은 꼭 지옥을 가야 한다”면서 미워하는 사람이 사마리아일 것입니다.나에게 손해를 주고 괴롭히고 있는 그 사람이 사마리아일 수도 있습니다.또한 사회적으로 존경이나 인정을 받지 못하고 그늘진 응달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사마리아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회교권이나 불교권이 그리고 40여 년 동안 식민 정책으로 우리를 괴롭히고 착취해 갔던 일본이 사마리아일 수도 있습니다.하나님은 바로 그런 사람들과 그런 곳에도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누구는 좋으니까 전도하고 누구는 싫으니까 전도할 수 없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어느 나라는 우방이니까 전도해야 하고 어느 나라는 원수의 나라니까 전도할 수 없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그래서 우리의 선교 대상은 북한과 중공과 일본과 불교와 모슬렘국을 포함한 전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에서 전도한 사실을 기록한 내용입니다.놀라운 것은 빌립의 전도를 받은 사마리아 성에 큰 기쁨이 넘쳤다는 사실입니다.본문을 중심으로 사마리아 성이 어떤 자세로 빌립의 전도를 받았으며 그 결과는 어떠했는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합시다.

1.그들은 빌립의 말을 들었습니다.
8:6을 보면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들었다”고 했습니다.
듣는 것은 복음을 받는 기초이며 출발입니다.그러나 듣는 자세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즉 긍정적인 자세로 듣는 것과 부정적 자세로 듣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민수기 21장을 보면 모세의 인도로 광야를 횡단하던 이스라엘이 뱀에 물린 사건이 나옵니다.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한 죄로 뱀에 물려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그리고 계속 쓰러져 신음하며 죽어 가고 있을 때 모세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모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불뱀과 똑같은 놋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매달고 그 뱀을 바라보면 살려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듣는 사람도 있었고 듣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놋뱀을 바라보면 독기가 빠지고 죽지 않는다는 약속을 믿은 사람은 바라보았고 우스꽝스러운 농담으로 여긴 사람은 바라보지 않았습니다.그 결과 바라본 사람은 살았고 바라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습니다.그때 놋뱀을 바라보지 않은 사람들은 지혜롭고 현명하고 사리 판단이 냉철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그러나 그들은 구원받지 못하고 죽었습니다.바울은 로마서 10:17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스데반이 복음을 전할 때 두 귀를 막고 이를 갈며 소리지르며 손에 돌을 들고 덤비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그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지 않았습니다.지금 그들은 그 대가로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18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보낸 상담 편지 가운데 “어떻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바구니나 남을 수 있을까”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그는 비교적 솔직하게 자신의 의심을 털어놓는 사람이었습니다.
문제는 예수를 누구로 보느냐에 있습니다.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모든 것은 해결이 되고도 남습니다.그러나 예수를 단순한 인간이거나 성현 군자 정도로 여긴다면 모든 사건과 성경은 의문 투성이일 것이며 만화처럼 보일 것입니다.
마태복음 19:26에서 주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믿음이란,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신뢰하고 섬기는 것입니다.그리고 그 믿음은 말씀을 잘 듣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성에 기쁨이 넘친 것은 빌립이 전하는 말씀을 그들이 잘 들었기 때문입니다.오늘도 말씀을 잘 듣는 사람은 기쁨이 넘칩니다.그러나 듣는 귀가 닫히면 잡념이 지배하고 졸리게 될 것이며 말씀 듣는 것이 지루할 것입니다.잘 듣는다는 것은 순종한다는 것입니다.“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2:7).아멘.

2.그 행하는 표적을 보았습니다.
6절을 보면 “행하는 표적도 보고”라고 했습니다.그 표적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은 7절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 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그야말로 전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기적이 일어났고 그들은 직접 그 기적을 눈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귀신 들린 사람과 중풍 병자와 앉은뱅이는 치료를 포기한 사람들입니다.그 당시의 의학으로는 도저히 치료가 불가능한 것이 귀신이었고 중풍이나 앉은뱅이었습니다.그런데 그러한 병들이 빌립 집사의 말 한 마디로 쫓겨나고 치유되는 것은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기독교는 기적으로 출발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적으로 연속되고 있습니다.성경은 하나님의 기적으로 채워져 있습니다.누가 뭐래도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은 기쁨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그 수를 셀 수도 없고 그 크기를 잴 수도 없습니다.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나는 기적을 체험하는 사람들에게는 기쁨이 넘칩니다.나 같은 죄인이 죄사함받고 새 사람 된 것도 기적이고 고질병이 물러가고 고침받은 것도 기적이며,내 힘으로 해결하기 어렵던 그 문제가 해결된 것도 기적입니다.그리고 긴장과 반목과 갈등이 팽배한 현실 속에서 찬송 부르며 신앙 생활하고 있는 것도 기적입니다.
내가 직접 기적을 체험해도 더 말할 나위 없이 기쁘지만 다른 사람이 기적을 체험하는 것을 듣고 보는 것도 기쁜 일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때 큰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3.빌립의 말하는 것을 좇았습니다.
6절은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고 했습니다.여기서 말하는 “좇는다”는 말의 뜻은 따라간다,실천한다는 뜻을 갖습니다.사마리아 사람들은 빌립의 말을 듣고 그대로 따라갔습니다.즉 그대로 실천한 것입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최상의 기쁨은 말씀을 실천할 때 옵니다.무엇을 보고 체험하고 받았을 때 오는 기쁨보다 말씀을 하나하나 실천할 때 오는 기쁨이 더욱 크고 귀하고 가치있는 기쁨인 것입니다.
대개 하나님의 말씀은 나의 생각과 사상과 다를 때가 많습니다.그러니까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려면 나를 이기고 나를 억누르고 나를 복종시켜야 합니다.그러기 위해서는 고통과 아픔도 겪어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이기고 말씀대로 실천하고 나면 그 후에 오는 승리감과 기쁨은 그 무엇에도 비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주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119:54에서 시인은 “주의 율례가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자기를 이기고 주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있고 찬송이 떠나지 않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빌립의 말을 듣고 표적을 보고 실천한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8절을 보면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고 했습니다.원문의 뜻은 “그 도시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기뻐하였다”는 뜻입니다.영어 성경은 큰 기쁨,위대한 기쁨(great joy)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 도시에 들어가면 그 도시는 기쁨의 도시로 변합니다.그러나 죄악이 들어가면 그 도시는 썩고 타락하고 맙니다.복음이 가정에 들어가면 그 가정이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복음이 개인의 영혼 속에 들어가면 개인의 심령이 평화와 기쁨으로 넘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힘들고 괴롭고 짜증스러운 세상에서 충만한 기쁨을 원한다면 지금 주님을 내 마음에 모셔야 합니다.그리하면 사마리아성에 넘쳤던 기쁨이 내 심령 속에도 넘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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