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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의 역사적 의미2 (행 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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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성령의 강림을 약속하시면서 사도들로 하여금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기까지는 사역을 시작하지 말 것을 당부하셨다. 왜 예수님은 성령강림을 약속하셨고 왜 성령을 보내시는 것일까 성경이 성령 강림에 대한 약속을 하는 것은 어떤 목적과 어떤 의미로 하고 있는 것인가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눅 24:49)”
이것은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누가복음 마지막 장에 기록한 말씀이다. 성령강림에 대한 약속이 누가에 의하면 능력을 입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가 생각하는 부분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우선 사도들에게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약속하시고 성령강림 이후에 능력을 받고 나가서 그들의 사역을 완수했다고 하면 쉬운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단 한 번도 하나님의 사역자들에게 그 사역을 우리가 생각하는 형태의 성공으로 약속한 예는 없다. 구약이나 신약을 통틀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뜻을 먼저 나가서 전파하고 깨우치는 사역자들의 사역이, ‘그것으로 인해 상대방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을 것이다’라고 약속되어 시행되는 적이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 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
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
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
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
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 6:8-10)”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전하기 위한 사역자로서의 일을 자청한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를 하나님의 사역자로 부르고 보내시지만 보낼 때의 약속이 ‘네가 가서 하는 것을 아무도 못 알아 들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왔을 때 세상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았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
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내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
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
를 따르라 하시니(요 21:18-19)”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누가 보아도 순교인 것이 분명하다. 그는 그가 원치 아니하는 죽음을 당해야 하고 그가 하고 싶은 일을 다 마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들에게 주께서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는 사뭇 다르다. 성령강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성령의 간섭은 지금도 있고 또 있어야 마땅하고 우리가 마땅히 구해야 할 약속 중의 하나이지만 그 뜻과 약속들을 우리 마음대로 오용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오순절 성령강림에 관한 약속은 구약 요엘서에 예언되었던 일의 성취라고 베드로는 말하고 있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일을 말할 것
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욜 2:28-29)”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
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요 16:13-14)”
요한복음 16장에서는 성령을 보내시는 가장 큰 목적을 진리에 대한 깨우침, 진리에로의 인도, 진리 가운데서의 보호라고 설명하고 있다. 요엘서 2장의 말씀과 요한복음 16장의 말씀 가운데 공통분모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의 오심과 성령을 약속하신 가장 큰 목적을 진리에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래 일이라는 공통된 단어가 등장한다. 우리는 위의 두 요절 가운데서 몇 가지 공통되는 내용을 추리해야 한다.
①장래 일을 말할 것이다.
②그것은 진리와 연관이 있다.
③이 진리는 주님에 관한 것이다.
누가복음 24장에서 성령강림을 약속하시며 제자들이 사역에 들어가기 이전에 성령이 오시는 것을 기다려야 하는 큰 이유 중의 하나를 능력에 두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 능력이라는 것은 신.구약 성경을 통해 추적해 보면 능력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고 장래 일과 진리에 대한 것으로 압축되었고,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라고 초점을 모으고 있는 것을 만나게 된다. 이것을 차례로 살펴 보기로 하자.
능력, 진리, 그리스도 이 셋은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밀접한 관계이며 같은 내용인지 모른다.
성경이 신자와 불신자를 나눌 때 이 진리라는 단어로 나눈다. 불신자는 진리에 의거해서 자신의 인생 목표와 방법을 삼지 않고 자신의 뜻으로 목표와 방법을 삼는 자이다. 신자는 우리가 생각하고 깨우치는 것을 벗어난 진리와 절대와 영원이라는 시각을 가지고 인생의 목표와 방법을 가지는 자라고 나눈다. 예를 들면 디모데후서 3장과 같은 말씀이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
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3-15)”
여기서 불신자와 신자를 갈라놓을 때 불신자의 생활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거짓이다. 그들은 진리를 모르고 신자는 진리를 안다. 에베소서 4장을 보면 자명하게 밝혀진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
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
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엡 4:17-19)”
인간은 원래 자기가 생각하고 경험하고 감각하는 테두리밖에는 생각할 줄 모른다. 거기서 목표를 정하고 방법을 정하고 어떤 성취가 있고 실패가 있다. 그러나 신자는 영원한 나라가 있는 것과 이 땅을 지으신 하나님이 있는 것과 그 하나님 앞에 우리가 범죄했다는 사실과 그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사실을 아는 자들이다. 그것을 담당하시는 이가 성령이시라는 것이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하시는 일이 바로 이 진리를 깨우치는 일이다. 그 모든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내용 속에 있다. 진리가 곧 예수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 우리가 앞에서 본 바와 같은 요엘서의 주장이나 요한복음 14장이나 16장에 나타난 성령에 관한 설명이 그렇게 나타나 있다. 요엘서에서 성령을 우리에게 약속하실 때 너희 자녀는 장래 일을 말할 것이다.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장래 일이라면 우리가 70-80년 살고 죽는 이후의 일, 우리의 인생이 경험할 수 있는 길이보다 더한 영원이라는 시간과 영원이라는 역사와 영원이라는 나라가 있음에 대한 깨우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늙은이가 꿈을 꾼다고 했다. 사람은 나이가 많아질수록 꿈을 버리게 된다. 그런데 요엘서에서는 분명히 성령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면 늙은이가 꿈을 갖는다고 했다.
늙으면 늙을수록 더 많은 꿈이 생기는 것이다. 젊은이는 이상을 본다. 그가 상상하지 못했고 그가 이해하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며 알지 못했던 세계가 있음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을 약속하신 이유이다.
인생이 뭐냐, 세계가 뭐냐,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이러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깨우침이 성경 말씀으로만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를 그쪽으로 인도하시며 간섭하시기 위하여 성령이 약속된 것이다.
진리를 아는 자가 그의 인생과 시간과 노력이 누적되어 갈 수 있는 목표와 방향과 방법을 알고 있는 자들을 능력있는 자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성령은 우리에게 보내지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깨우침과 그 사실에 대한 현실적인 준비와 실천을 할 수 있도록 성령님은 약속된 것이다.
성령을 받았다고 남과 비교하여 펄펄 뛰는 것은 내가 얼마나 남과 다른가를 증명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나타남을 허락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확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우리를 간섭하게 하시고 우리가 뜻한대로 잘못된 결정이나 실수를 하지 않도록 우리를 제어하시기도 한다. 때로는 그것이 우리에게 고달픔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겪는 아주 신비로운 경험은 성령이 우리 안에 계셔서 바로 우리의 계획과 뜻과 욕심대로 모든 것이 되지 않도록 간섭을 받는다는 것이다.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
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 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행 8:
8:26-29)
성령이 빌립을 직접 좌우한다. 빌립에게 있어서 이 사건은 아는 바도 없고 예지한 바도 없고 필요성에 대해서도 아무 것도 모른다. 성령께서 그를 강권하여 이 광야로 내보냈고 이 내시를 만나게 하신다. 그가 전혀 모르던 일에 그가 부르심을 받는다. 광야는 좋은 곳이 아니다. 성령은 그렇게도 역사하신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
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
내니라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행 13:1-4)”
초대교회에서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하는데 성령께서 간섭하셔서 바울과 바나바를 보낸다. 초대교회에서 만일 사람들끼리 뽑았다면 아마 베드로와 요한을 뽑았을 것이다. 사도행전 16장에서는 성령께서 더 강하게 간섭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
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행 16:6-7)”
이때 만일 성령께서 막지 아니하셨다면 구라파보다 아시아가 문명이 앞섰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성령께서 아시아로 못 가게 해서 결국 로마로 가서 유럽으로 복음이 먼저 전파되고 서쪽으로 돌아서 미국을 거쳐서 우리나라에 늦게 들어왔다.
성령께서 바울이 하고자 하는 일이 선한 일이고 필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막으셨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다. 이것이 성령을 보내는 가장 큰 이유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일단 없고 또 선한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하나님의 뜻과 방법으로 할 줄을 모르는 자들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들에 대하여 배워야 하며 거기에 있는 것을 습득해야 하며, 우리가 고쳐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나의 삶과 존재와 나의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데 부름을 받고 있다. 이 일을 우리의 힘으로는 감당치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시사 우리에게 이 일을 넉넉히 하도록 약속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일일 이루어졌다. 그렇게 기록된 성경이 사도행전이다.
우리가 가장 많이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에 대하여 민감할 준비를 하며 민감하게 반응할 연습을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보다 우리의 생각에 민감하고 우리의 욕심에 훨씬 많이 사로잡힌 자들이다. 내 욕심에 사로잡히면 종교적인 행위와 종교적인 열심을 부리면서도 하나님의 뜻에 합하지 못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께서 이제 우리 안에 계시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사 우리로 장래를 내다보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진리로서 우리에게 깨우치사 우리를 그리스도의 뒤를 좇는 자로 만들기를 원하신다는 말이다.
베드로와 요한에게, 바울에게 성령강림을 허락하시고 방언을 하게 하시며 기뻐 뛰게 하시며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게 하셨지만 그것이 그들의 개인적인 욕심을 위하여 쓰여질 수 없고 쓰여진 적도 없다. 모두가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그들의 뼈를 묻었고 소리없이 죽어갔던 기록이 사도행전이다.
오늘 우리의 신앙의 욕심은 무엇인가 우리가 주를 향하여 가진 모든 열심과 속에서부터 일어나는 정열이 무엇을 위해서인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우리에게 아직도 남아 있는 몇 십 년 간의 인생이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는가 성령의 인도로 바로 서야 한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우리를 말씀으로 인도하여 우리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것으로 간섭하는 것을 왜 물리치고 우리가 사회에서 이루어야 할 업적과 남보다 잘났다는 자기 집념을 위하여 자존심을 내세우는 일밖에는 신경을 쓰지 못하는가 왜 남에게 지지 못하며 악에게는 져서 시험에 드는가 왜 우리 마음 속에서 평온 빼앗기며 주님이 칭찬하시는 자리에서 떠나 사람들이 박수치는 자리에 가 있는가 돌이켜야 할 때이다.
우리가 혼자가 아닌 것과 그런 이유로 부름을 받지 않았던 것을 다시 한번 마음에 깨우치고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삶을 새삼스럽게 결심하는 이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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