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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재림2 (행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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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힐난 조의 말씀 속에는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유혹 받고 시험받는 문제들에 몇 가지 귀중한 판단 자료와 원칙들이 감춰져 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징조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거짓 예수 그리스도가 출현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해서 거짓 예수를 알 수 있는가

먼저 기억할 것은 초림과 재림에 관해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초림과 재림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주님께서 초림에서 맡으셨던 일과 재림하시면서 하려고 하는 일은 전혀 다르다. 그 이유 때문에 이 땅에 오시는 모습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 거짓 예수, 거짓 재림 예수들의 가장 틀린 점이 있다면 주님의 초림의 모습으로 자신의 모습을 감춘다.
즉 재림의 모습에서 꼭 나타내야 하는 일들을 저들이 흉내낼 수 없기에 초림과 재림의 차이를 분별하지 못하게 해 놓는다. 그래서 초림과 재림의 가장 큰 차이는 주님께서 초림은 숨어서 오시지만 재림 때에는 공적으로 모든 사람이 단번에 알 수 있도록 오신다.
우선 우리는 초림의 가장 중요한 목표와 그 사명 때문에 주님의 영광된 모습을 감추고서 오신 그 일들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초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주님의 맡으신 사명은 구원이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
초림의 주님은 심판하러 오시지 않고 구원하러 오셨다. 시험을 치를 때 시험지 나누어 주는 사람은 무섭지 않다. 지금 금방 끝장내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운명을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에게 가능성과 변화시킬 수 있는 여지를 주는 사람이다. 그러나 합격자 명단을 발표하는 사람은 이제 끝이다. 초림과 재림에는 그런 차이가 있다.
초림의 가장 큰 내용은 구원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주님은 시험지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러 오시는 선생님 같이 이제 우리에게 영원을 준비하게 하시며 그 문제에 대해서 우리에게 권고하시며 우리에게 시간을 주시고 기회를 주러 오신 것이다. 그래서 그때는 겁을 주러 오시지 않는다. 그러기에 감추어진 모습으로 오신다.
아무도 그를 몰라 보았다는 것은 주님께서 겁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판의 칼을 감추고 그가 오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몰라 보았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
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
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
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1-3)”
이것이 초림하셨을 때의 예수님의 두드러진 모습이고 그 모습의 특징이다. 그러나 재림 때는 다르다. 이제 다시 오실 때에는 우리에게 나누어 준 시험을 채점하러 오셨다. 초림 때에는 공부 잘하는 사람이나 못하는 사람에게 구별없이 똑같은 시험지를 주었지만 이제 채점을 해서 합격자와 불합격자를 나눌 때에는 똑같지 않다. 그 모습이 요한계시록 1장의 기록이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
1:7)”
성경에서 말하는 구름은 ‘영광 중에’라는 뜻이다. 영광 중에 예수님이 오신다. 초림은 영광 중에 오시지 않았다. 그의 태어난 곳에서는 그를 아무도 몰랐고 그가 태어난 나라에서는 오히려 생명의 위협을 받았고 먼 나라에서 동방박사들이 찾아왔다. 그가 있던 곳에서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밤에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찾아왔다. 주님을 찾아가는 것이 이익을 주는 것도 아니었고 복종해야만 되는 권세로써 굴복을 요구하지도 않으셨다.
그러나 이제 그가 다시 오실 때에는 그를 찌른 자도 그를 알아 본다고 했다. 초림 때에는 그를 찌를 수 있었다. 그가 영광 중에 계시지 않았고 권세를 나타내지 않았으며 심판하시지 않은 모습이었기 때문에 사람이 감히 찌를 수 있었다. 찌를 수 있었던 것은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를 알아보지 않았고 자기와 방불한 인간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전에 그가 관심을 갖고 볼 이유가 없고 무릎을 꿇을 이유가 없었던 분을 이제 그의 영광 때문에 놀라고 우는 일이 생길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재림의 특징이다. 그 때에는 오셔서 나를 믿으라 이렇게 하시지 않는다. 오시면 다 아는 것이다. 마태복음 24장의 말세의 징조에 대한 예언을 살펴보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마 24:4-5)”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
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번개가 동편에
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 24:23-27)”
이 때는 모두가 보는 것이다. 재림은 심판하러 오시고 역사를 마감하러 오시고 영광 중에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이단들은 예수께서 처음 오셔서 실패했기 때문에 자기가 왔으니 이제는 자기를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주님은 실패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이제 정답을 쓰는 일만 남아 있다. 시험지를 이미 채점하고 계신다. 이것이 우리가 걸어야 하는 신앙인으로서 지금 주어진 기회를 낭비하지 않아야 할 일이고 그리고 무섭고 떨림으로 긴장되게 주님이 다시 오심을 준비해야 되는 것이다.
이제 주님이 오시면 행한대로 갚아 주신다. 그 때에 가서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믿는 기독교적 신앙을 정신훈화 정도로, 마음의 교양으로 갖고 있으면 안된다. 우리가 실력 있는 자라면 시력을 시험지에 쓸 수 있듯이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이 우리의 생애를 변화시키고 주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것으로 우리는 바꿔놓지 않고 우리를 움직이게 하지 않는다면 여기 성경대로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는 말의 무서움을 모르는 것이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그리스도를 알고 모르는 것의 차이이다. 불신자들은 신자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착하게 살려는 사람 정도로만 본다. 예수 믿는 것은 착하게 사는 방법이 아니다. 그는 다시 오신다. 석가는 다시 오지 않는다. 모하멧도 다시 오지 않는다. 예수님만이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며 그는 다시 오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로 올라가는 예수님을 쳐다볼 틈이 없는 것이다.
시험지 나눠주고 돌아가는 선생님의 뒤통수를 쳐다보고 있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이름부터 써야 한다. 그리고 쉬운 문제부터 풀어야 한다. 그 다음부터는 조금 어려운 것을 한다. 쉬운 문제부터 풀어야 한다. 확실하게 먼저 할 것은 이름부터 써야 한다. 주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분명히 우리의 답안지에 써야 한다. 그러면 불합격은 안 시킨다.
주님은 다시 오신다. 그것부터 준비하여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의 정신위안으로 마음의 평안을 갖기 위하여 믿는 어떤 악세사리가 아닌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각인의 눈이 그를 볼 것이며 그를 찌른 자도 볼 것”이다. 그 때 그를 울며 만나지 말아야 한다. 기쁨과 찬송 속에 우리 주님을 만나기 위해 지금 준비해야 한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것이 걱정으로 있다면 사실은 심각한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생각할 때에 걱정이 앞서는지 기쁨이 앞서는지 가장 먼저 대차대조해서 결산 부터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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