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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순절 성령강림1 (행 01: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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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의 사건 가운데 가장 기억할 만한 사건은 오순절 성경강림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결론으로 넣지 않고 서두로 넣고 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 무엇이고 그 기록의 목적과 의의가 무엇이냐고 할 때에 성령강림이라고 만은 말할 수가 없게 되었다.
결국 사도행전의 내용은 성령이 오셔서 무엇을 하셨는가로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교회의 설립, 교회의 확장,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명령하신 것같이 땅 끝까지 주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종종 성령행전이라고도 불리워진다.
사도행전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외형적으로 나타난 것은 사도들이지만 결국 성령께서 그 안에서 역사하셔서 일을 이루었으니 성령이 주인공이라는 것이 그동안 기독교계에서 사도행전을 이해한 흐름이었다.
오늘 우리가 이해하려 하는 것은 성령께서는 왜 오셨는가. 사도행전은 왜 성령강림이 그 서두에 있고서야 일이 진행이 되는가. 성령이 오시기까지는 일을 시작하지 못하도록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분명하게 못박고 있는 것이 우리에게는 커다란 의문거리이다.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
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
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성령강림은 꼭 기다려야 하고 사도행전에 나타난 모든 사건들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성령강림이 필연적인 전제조건이어야만 된다. 그러나 여기 성령강림은 이것과는 구별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초림하신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주님의 초림은 주님 홀로 하신 일이었다. 주님의 초림에 대한 묘사들을 보면 그 분의 오심, 그 분이 하실 일에 대하여 인간들이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는 것을 본다. 주님의 오심에 대해서도 우리가 모르고 있고 오신 그 사역에 대해서도 우리가 외면하고 있고 그가 하시는 일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그의 일을 의탁하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된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
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
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
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
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 53:1-4)”
주님이 우리의 구원을 이루심에 있어서도 우리는 그 분께 부탁을 한 적도 없고 그 분의 하는 일이 우리의 일이라는 생각도 갖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성령강림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성령의 강림은 성령께서 독자적으로 홀로 사역할 일이 있어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불가분의 관계성 때문에 오신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래서 초림이 주님께서만이 하실 수 있었던 사역인 것과는 아주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강림이다.
사도행전에서 성령강림이 서두에 있는 이유가 주님이 마치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대속사역을 하심에 있어 독자적인 방식으로 행한 것같은 일을 하시기 위해서 성령님께서 오신 것이라면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라고 해야 맞고 사도행전의 주인공은 성령님이 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펴본 바와같이 사도행전에서 성령의 강림은 성령의 사역과 성령의 일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고 있다. 성령을 받을 것을 얘기하고 있고 그 후에야 우리가 일할 것으로 얘기함으로써 원래 초점은 비록 성령이 하나님이시고 창조주이시지만 초점은 우리에게 있고 우리가 주인공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땅 끝까지 이르는 것은 성령과 함께지만 우리를 보내기 위함이고 우리가 가서 그 사역을 감당하며 그런 일을 할 존재로서의 어떤 필요 조건으로 성령강림이 언급되고 있다고 해야 맞는다. 이것은 구분되어야 한다.
우리가 누구이길래 성령과 우리가 함께 일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인가 결국 사도행전에서 성령강림이 일어나는 것은 2:1-4까지 사건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주님께서 승천하시는 일이 있고 승천하시고 나자 제자들이 모두 모여 어디로 달려가느냐 하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1:14에 있는 바와 같이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에 전혀 힘썼다.
성경이 말하는 신자란 성령과 기도로 빚어낸 사람이다. 성령의 사람이라고 할 때에 성령이 그에게 오셔서 그에게 어떤 기적과 힘을 창출해 내는 자라는 뜻에서 성령의 사람이 아니라 그의 존재와 기반과 존재의 조건이 영적인 자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이 오시는 가장 큰 이유이다. 신자와 불신자를 나누는 선은 성령이 계시냐 하는 것이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
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
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
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5-9)"
성경이 신자가 누구냐고 얘기할 때는 바깥으로 우리가 인식하고 확인하는 방법으로는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믿는 자이지만 존재론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자이다. 그것이 신자의 유일한 조건이고 근거이다. 신자는 성령과 기도의 사람이다. 여기서 기도의 사람이라는 것은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의 존재가 육신적인 것이 근원이 되어 결과된 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
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
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9-13)”
기도의 사람이라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세상에서 만들어 낼 수 없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즉 기도해야 한다는 말은 이 세상이 말씀으로 창조된 것 같이 혈통으로나 육적으로나 사람의 뜻과 사람의 실력으로 산출해 낼 수 없다는 것 우리의 존재가 신적 기원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이다.
변화된 사람들, 세상이 그들을 할퀴고 핍박하고 반대한 것으로 그들을 무릎꿇리거나 중단시킬 수 없는 사람으로 다른 종자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종자들이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
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
심이니라(엡 2:10)”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
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
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
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그는 우
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 2:11
-16)”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이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말과 같이 쓰여졌다. 이스라엘 백성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민족적 차원으로 하나님의 백성과 아닌 자들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실 하나의 모형으로서 민족을 택하사 그 민족의 한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하심을 예표하셨고 그 예표하신 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어내셨다.
구약이 신약의 구원 얻는 백성들의 모습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한 민족을, 민족적인 구별로 한 나라를 선택한 그것이 구원의 원래 모습은 아니다. 모형이다. 지금에 와서 그것을 예수를 믿는 자들이라는 이름으로 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테두리를 친다. 그것을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라고 명명한 것같이 신약에서는 교회라고 명명한다. 새 사람이다.
교회라는 명칭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뜻에는 집합적인 뜻이 있고 개인적인 뜻도 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
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 2:16)”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이것
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
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
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
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 모든 성도 중에 지
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
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
려 하심이니(엡 3:3-10)”
교회란 새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 우리 신자들 쪽에서 보면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 속으로 들어간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러나 하나님 쪽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고 성령이 그 안에 거하시는 자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우리 쪽 측면에서만 생각하니까 신앙 고백을 했다, 예수를 믿는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가 무슨 일을 한다 하는 행위적인 차원에서 신앙고백도 성령강림도 너무 강조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구하시고 그들이 모여 성령이 임하시기까지 전혀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제 저들이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 새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성경이 분명히 해놓고 이제 그 첫발을 내딛게 하고 싶기 때문인 것이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모든 사건들은 성령이 임하시자 신자들이 얼마나 강력해졌는가에 관한 시사이기 이전에 우리가 어떻게 이제는 영적인 사람이며 하나님과 동역하는 존재로 격상되었으며 우리라는 존재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 하는 것에 성경이 초점을 맞추고 싶어하는 사건들인 것이다.
복음서가 주님이 혼자서 일하실 수밖에 없었던 시기였다면 사도행전은 달라진 것이다. 여기서부터 교회가 서는데 그것은 조직과 기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우리가 주님이 하신 일을 뒤좇을 수 있는 자요, 성령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자로서 대접을 받고 부름을 받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권면하고 있는 책이다.
이 이유 때문에 사도들은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며 기도를 한다. 새로운 사람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새로운 사람의 구성 요건은 성령과 기도이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것이고 그래서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을 기억한다면 오늘 여러분이 남과 다른 것을 갖고 있는 세상적인 것으로 교만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을 내가 갖고 있지 않다고 좌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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