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오순절 성령강림3 (행 02:1-4)

첨부 1


사도행전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오순절 성령강림이다. 이 성령강림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한 신자의 신앙의 색깔과 모습이 상당한 차이를 가져온다. 이 사건을 성경이 요구하고 있는 방향으로 이해하는 문제는 참으로 중요하다.
드디어 오순절 날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바 성령이 마가 다락방에 모였던 120명의 신도들에게 강림하셨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
라(행 2:1-4)”
이 사건, 이 장면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성령강림의 모습, 성령충만의 모습은 모든 신앙인이 필수적으로 경험해야 하는 것일까 즉 신자라면 누구나 이러한 성령충만의 확인과 분명한 경험, 그리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하는 방언과 성령의 어떤 나타남이 그들에게 있어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여기에 대한 성경은 답은 그렇지 않다.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이는 곧 선
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
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
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
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
14-21)”
지금은 말세이다. 시간적으로 끝이기 이전에 순서적으로 끝이 된다. 이제 재림만이 남았다. 그러므로 말세이다. 한국 교회는 그동안 ‘이제부터는 누구든지 주께 구하면 성령을 받는다’라고 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예수를 믿는 모든 신자가 경험해야 되는 신앙 경험의 전형이 되느냐 아니면 오순절 성령 사건으로 인하여 이제부터는 ‘새 시대’라고 개막을 선언하는 것이냐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 2:17)”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
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
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
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
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29-33)”
이 대목을 보면 오순절 성령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사역이 완성되었기에 이제 성령이 오실 수 있었다는 쪽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 두 가지 사건을 보면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거든 이제부터는 새 시대가 시작된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일의 결과로 이 일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 17:21)”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니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
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줄 알았삽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3-26)”
결국 구원을 얻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일에 방해가 되는 것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한 선결 문제는 우리를 죄에서 꺼내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동거하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속하러 십자가를 지시려고 오신 것이다. 그리고 이제 승천하셨다. 가시면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
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처음 오신 것은 우리와 함께 있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없애고, 죄에서 구원하려고 오신 것이다. 그러나 이제 다시 오실 때는 같이 살려고 오실 것이다. 궁극적인 구원의 목표라는 것은 아버지께서 내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죄를 없이 하며 우리를 죄인의 자리에서부터 구원해 내야 한다. 죄를 씻어낸 것은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서이다. 그 일을 이루었기 때문에 드디어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완성되어 있지 않다. 성경은 성령이 우리에게 오신 것에 궁극적인 목표와 이유를 에베소서 2장에서 밝히고 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
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0-22)”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우리가 지어져 가는데 그 일을 위하여 먼저 성령이 오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지금 예수 안에서 지어져 가고 있다. 그리고 그 일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 오순절 성령강림이다.
이제 신자란 존재론적으로 운명적으로 전혀 다른 존재이다. 예수를 믿는 개인이 어떤 경험을 했느냐 하는 것은 부수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다. 이 때는 역사적이고 새로운 장을 여는 공식적인 개막을 선언하는 행위였기 때문에 성령이 오신 것이 공개되고 객관화되고 외적인 표현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일에 있어서는 공개적으로 오시는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성령이 와 계시는 것이 공개적일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
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성령이 우리에게 오신 가장 확실한 증거는 우리가 여기에 앉아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성령이 오시면 오순절 성령 때와 같은 어떤 외적인 표징들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식으로 오도되어 오지 않았는가 싶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사도행전의 기록을 살펴보자.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
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
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
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
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37-
2:37-42)”
분명 베드로 사도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성령을 받는다’라고 약속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구원의 대열에 참여했는데 방언했다든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는 기록은 거기에 없다.
사도 베드로의 ‘너희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죄 사함을 얻고 성령을 받는다라는 얘기는 체험적인 사건에 성령받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새 사람이 되는 새로운 존재가 되는 의미의 성령을 받는다’는 약속이다.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즉 그 신앙고백을 갖고 있는 자에게 성령이 와 계신다. 창세기 6장을 보자.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
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
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
라(창 6:1-3)”
성령을 완전히 거두어 가버리신다. 우리가 타락하고 나서 하나님과 분리되고 하나님과 인간은 함께 거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악에서 벗어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자 하나님께서 맨 먼저 하신 일은 존재론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 안에 성령이 와 계시는 신인 합동의 존재론적으로 어디까지가 성령 하나님이고 어디까지가 인간인지 모르게 하나가 되는 것이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
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
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9-11)”
이것이 신자의 존재론이다. 신자의 존재는 이제 인간적인 측면에서만 평가받지 않는다. 우리는 성령 하나님과 합작이 된 것이다. 그런 존재로의 부름에 대한 첫 선언의 개막 테이프를 끊은 사건이 성령강림이라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강림이 갖는 의미는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겪는 것은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같은 역사적 사건의 반복은 아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인간에게서 떠나셨던 하나님이 이제 다시 찾아오사 하나 되는 일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시고 시작하신 사건이고, 그 일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하며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완성되는 목표까지 가는 시작인 것이다. 각자에게는 시작의 모습으로서 성령강림이 체험될 수 있고 중간의 여러 과정으로 성령이 와 계시며 간섭하시는 체험이 될 수는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꼭 방언일 필요도 없고 그래서 눈물 흘리면서 회개하는 모습일 수만은 없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부부가 결혼식을 하는 것과 같다. 결혼식 날이야말로 모든 사람 앞에 이 사람들이 부부가 된 것을 선언하는 날이다. 공식적으로 모든 것이 허락된 날이므로 그날이 가장 행복한 날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이지 부부가 기억하는 가장 행복한 날이 그 날이라면 불행한 것이다. 살면 살수록 더 행복해야 한다.
물론 연애할 때보다 결혼해서의 생활은 더 어렵다. 왜냐하면 연애할 때는 생활이 없기 때문이다. 살면 살수록 잘했다, 더 사랑한다 하는 것이 부부생활의 의도된 축복이다.
이제 성령은 우리 안에서 다르게 역사하신다. 우리를 죄로부터 멀어지게 하며 거룩을 사모하게 하며 하나님의 뜻을 더 아는 일에 나를 몰아가며 인격의 모든 부분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모습으로 몰고가는 역사를 일으키신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시면 주를 내가 사모하는 것들에서 어떤 식으로 될지 모르는 것이다.
방언이나 병을 고치는 것으로만이 아니고 회개와 눈물로만이 아니고 어떤 산을 옮기는 능력과 기도하는 역사로만이 아니라 나를 아버지께서 처소가 되게 하고 거룩한 성전으로 완성되어 가는 일에 조그만 진전과 보충과 나아감으로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과 여기서부터 더 발전적이고 지속적이고 완성적인 차원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 감격 속에 묻혀 있어서는 안된다. 이 시간이 갖는 목표와 방향성을 향하여 우리의 발걸음을 떼어 놓는 자가 되어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룰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 나의 감격과 행복을 구하지 말고 완성을 구해야 한다. 신앙이 할 말이 있고 꺼내 놓을 것이 있는 자가 되지 말고 만들어져 가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