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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말론적 삶2-기쁨 (행 02:4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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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가 가졌던 가장 큰 특징은 유무상통하는 일이었다. 초대교회를 형성한 신자들의 또 한 가지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기쁨, 감격 그리고 생명감, 활동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오늘은 이 기쁨을 우리의 신앙과 대조하면서 점검해 보자.
우리가 먼저 기억할 것은 예수를 믿으면 무조건 기쁘냐는 것이다. 사실 기쁘다. 그런데 그 기쁨은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이 세상의 상식적인 기쁨과는 다르다. 이 부분을 모르면 예수를 제대로 믿으면 슬픈 일이 있을 수 없고 절망이 있을 수 없고 아플 일이 있을 수 없다는 식으로 흐를 위험성이 있다. 이 점을 초대교회 신자들이 느꼈던 기쁨과 비교하여 보자.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23-31)”
이들이 가졌던 감격과 기쁨과 힘은 세상적인 일에서의 형통함과 성취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사도행전이 스스로 증언하고 있다. 그들의 기쁨과 감격, 그들이 증언하는 일에 대하여 그 사회와 주변에 있는 인물들이 반대하며 위협하며 협박하며 파괴하려 한다. 그러나 그들의 기쁨을 막을 길이 없다.
14장으로 가면 이 부분에 대한 분명한 설명이 나온다.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 여행을 떠나 성들을 다니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다가 어려움을 당한다.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는지라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행 14:1-7)”
여기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문제에 주님이 직접 간섭하시는 장면을 보게 된다. 저들로 하여금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대파를 진압하는 일에 그것이 쓰여지지 않는다. 그들을 반대하는 무리의 위협하고 협박하고 능욕하는 일이 이것으로 인하여 감소되거나 진압되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신자의 기쁨에 관한 이해이다. 신자가 갖는 기쁨은 결단코 세상적 차원에서의 난관이 없어지거나 환경이 개선되거나 누구나 우리를 환영하는 것으로서의 기쁨과 감사가 아니다. 그것과 전혀 다른 것이다. 성경은 오히려 신자의 신앙생활이 고달플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4-36)”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가정에 평화가 생기고 이웃 간에 행복한 결실들이 생기리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도 괄시받고 사회에서도 교회에서도 천대받는다.
성경에서는 이런 일로 인하여 세상이 살기가 편해지고 나에게 이제 더 이상 근심, 걱정, 고민거리가 없어진 것으로 신자의 기쁨을 설명한 예가 없다. 우리는 고린도후서 12장의 기록에서부터 신자의 기쁨에 대한 실마리를 풀어야 한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7-10)”
사도 바울의 기쁨이 무엇인가 주께서 어떻게 하면 내게 더 많이 머물며 나로 인하여 주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가를 아는 것이다. 그가 건강을 구하는 것은 주의 복음을 더 많이 전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주께서 대답하시기를 네가 약할 때 내가 너와 더 많이 함께 할 수 있고 너를 통하여 나를 더 많이 나타낼 수 있다고 하셨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기뻐한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 1:12-18)”
지금 사도 바울은 주를 전하는 일 때문에 붙잡혀서 로마로 압송되어 감옥에 갇혀 있다. 그러나 바울이 좋아하는 것은 이 일로 인하여 감옥에 있는 모든 간수들, 지키고 있는 군사들이 자기의 잡힘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울이 하나님에게 크게 쓰임받는 것을 시기하는 자들은 그의 잡힘을 보고 자신들만이 하나님이 인도하는 종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또 사도 바울을 사랑했던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갇힘으로 시기하는 사람들이 날뛰니까 ‘그렇지 않다. 우리 선생님이 하시던 일을 우리라도 마저 하자’고 해서 나서서 했다. 그래서 두 파로 나뉘어서 주의 복음을 전했다.
여기서 바울은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진다. 아무러면 어떠냐.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냐. 나는 이것을 기뻐한다고 했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우리에게도 있는 시험거리이다. 교회 안에서 열심히 봉사해 놓고도 아무 일도 안한 사람들에 의해 욕을 먹는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사람이 뭐라고 그러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셨느냐, 그가 하시고 싶은 일을 이루셨느냐로 기뻐해야 한다.
이것을 요약하면 기독교인의 신앙, 그리고 기독교인의 생활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충성심과 모든 일이 그리스도를 위하려는 관심과 열심에 지배받는 것이어야 한다. 기독교인의 기쁨, 기독교인의 신앙, 기독교인의 생활, 인생관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심으로 지배를 받는다.
그리고 그를 위해 일하려는 관심, 그를 향한 열심으로 지배받고 제어되며 그것이 그를 기쁘게 하는 것이다. 내가 무엇 하는 것을 그가 가장 기뻐하시는가만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사도 바울은 그가 어떻게 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가 지금 당하고 있는 일로 인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느냐, 또 하나님이 그가 하시고 싶어하는 일을 실제로 하고 계시는가에만 관심을 쏟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이다. 만일 이것을 놓친다면 우리의 기쁨은 사라진다. 우리가 곧 이렇게 묻게 되기 때문이다. 주께서 하라고 한 일을 했는데 돌아온 것이 뭡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이 늘 그렇지 않는가 우리가 세상살이를 하면서 가장 크게 당하는 신앙적 좌절이 무엇인가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는 살 수 없다고 느낄 때이다. 우리가 실제로 성경대로, 양심대로 살아서 이익을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녀에게 정당하게 살라고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가르친다고 해서 우리의 자녀가 이 세상의 자녀보다 더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일과 그의 생명을 이웃에게 전하는 일에 우리를 좋은 모습으로도 부르시고 나쁜 모습으로도 부른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이 얘기는 뒤에 이렇게 연결이 된다. 빌립보서 1장을 보자.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19-21)”
그러니까 우리의 삶의 이유, 지금 이 초대교회 신자들의 삶의 유일한 이유가 있다면 그들의 존재와 그들의 언행에 그리스도께서 존귀히 되는 일이 있다는 보람과 책임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 외에 신자가 살 이유는 없는 것이다.
우리 자신에게도 우리 이웃에게도 역사와 시대 앞에서도 우리가 하려는 일은 나와 내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존귀히 되는 일 외에는 관심이 없어야 한다. ‘내가 살아서 주를 영화롭게 하는 일로 부름을 받는다면 살 것이요 나를 죽여 그리스도께서 존귀히 되신다면 죽음을 불사하겠나이다’ 이것이 우리의 마땅한 기쁨이요 소원이어야 한다.
초대교회 모든 신자들이 이런 시각과 원리와 목표에서 그들의 기쁨을 소유하고 있었고 그들의 삶의 생명력을 활동력으로 확신으로 담대함으로 갖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사도행전 5장을 다시 보면 이 모든 것을 요약할 수 있는 사건이 하나 등장한다. 사도들이 다시 잡혀서 예수의 이름으로 전하지 말라는 공갈과 협박과 그리고 매를 맞고 풀려나는 장면이다.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행 5:40-42)”
그들은 지금 매를 맞고 협박과 공갈 속에 쫓겨났음에도 불구하고 사적으로 모이든 공개적으로 모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며 전도하는 것을 쉬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일을 행함에 있어서 세상에서 당하는 어려움과 아픔과 핍박과 환난을 저들이 기쁨으로 여겼다고 한다. 어떤 기쁨인가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 받은 것을 기쁘게 여겼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의 이름을 인하여 고난과 오해와 조롱을 받는 자리에 부름을 받는다는 것은 커다란 기쁨이다. 주께서 친히 십자가의 길을 걸으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법이 이 세상으로부터 오해요 외면이요 경멸이요 핍박이요 환난인 것을 몸소 보이셨으며 우리에게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5장에 명명백백하게 기록된 예언이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요 15:18-
20)”
오늘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이 자리에 왔는가 세상을 좀 더 안락하고 편안하게 살기 위하여 혹시 이 자리에 온 것은 아닌가 어떻게 왔어도 좋다. 그러나 답은 이것이다. 세상에서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안락을 위하여 기독교를 이용하려고 모인 사람들은 아니다. 기독교는 그런 답이 없다. 우리는 세상에서 오해와 비난과 핍박을 각오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우리가 믿는 예수를 핍박한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 신앙인의 모든 목표와 소망과 간절한 기대와 기쁨은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모든 것이 주님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주께서 나를 통하여 그의 일을 이루시고 그의 은혜와 사랑과 생명을 전하는 일을 기뻐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가 산다. 내가 약한 것으로 실망하지 않는 것은 약한 것을 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쓰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뻐하는 것은 그 좌절이 나의 게으름과 무지의 소산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낮추시고 좌절시키사 거기서 영원한 것을 증명하실 일이 있어 부른 부름 때문이다. 게으름을 방조하는 것이 아니요 연약함과 무지함을 격려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적인 싸움에서 질 이유가 없지만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세상 사람들과 함께 세상적인 것을 목표로 하여 싸우지 않기로 한 것이다. 영원한 것을 준비하며 증거하며 그것을 위하여 주 앞에 쓰인 바 되는 것을 인하여 오늘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름 앞에 늘 순종하여 그가 나를 통하여 나타내시는 일 때문에 기뻐하며 자랑하며 힘내며 뛰어다니는 것이다. 로마서 14장의 말씀을 우리의 결론으로 삼고자 한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7-8)”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초대교회의 분명한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영원한 것, 진리되는 것, 그것을 깨우치고 바라보고 달려가는 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과 충돌할 수밖에 없고 세상의 위협과 유혹에 타협하지 않았던 그들의 선명한 노선을 증거하는 것, 그것이 초대교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가진 자들의 기쁨, 그것이 모든 신자들의 기쁨이 되어야 한다.
초대교회 신자들을 기쁘게 하신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를 부르셨다. 우리도 기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세상의 싸움과 세상의 유혹에 말려들어 세상의 박수를 받는 것으로 여러분을 점검하니까 신앙생활이 귀찮고 괴로운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자. 우리가 부름받은 부름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우리가 얼마나 놀라운 존재인지.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생을 나누어 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직분인가 기억하라. 우리의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고 세상이 여러분을 어떻게 핍박하고 방해를 해도 이것이 방해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여러분의 매일의 삶과 생활의 현실 속에서 우리의 입술에 넘쳐나는 찬송을 막을 자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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