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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큰 은혜가 충만한 교회 (행 04:3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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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교회는 하늘을 치솟는 웅장한 건물이 없었고, 조직이 완비되지 못했지만, 2천년 기독교 역사를 통해 가장 빛나는 이상적인 교회였습니다. 비록 건물이나 조직과 같은 외적 조건은 화려하지 못했지만, 그 내용은 실로 풍성하고 알찬 교회였습니다.
초대 교회는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 기도에 힘쓰는 교회, 성령 충만한 교회, 말씀 중심의 교회, 사랑이 충만한 교회, 핍절한 것이나 부족한 것이 없는 교회, 신령한 일군이 충만한 교회, 날마다 부흥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면 이런 이상적인 교회가 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본문 사도행전 4장 33절에서 그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무리가 큰 은혜를 얻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란 헬라어의 "카리스 테 메가레 엔 에피판타스 아우투스"로서, 그 정확한 번역은, "모든 사람들에게 계속적으로 큰 은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상적인 교회의 숨은 비결이었던 것입니다.

Ⅰ. 그러면 큰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계속적으로 충만케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 큰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되는 곳에 임하게 되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은혜의 말씀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모인 자리에서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이 더 옳음을 증거했습니다. 성도들도 어떤 위험 속에서도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 전하게 하여 주옵소서"(4:29)라고 기도했습니다.이 기도의 결과,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4:31)고 했습니다. 결국,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큰 은혜가 계속적으로 임할 수 있었던 것은 교회 전체가 말씀 중심의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도 말씀 제일주의의 사람이었습니다. 온 교회 성도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듣고, 바로 실천하고, 바로 전하기 위해 전심전력 했으므로 큰 은혜가 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주시려 할 때, 먼저 말씀을 주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 성도들이 듣고, 읽고, 깨닫고, 실천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시려고 주신 것"(신6:24,10:31)입니다. 뿐만 아니라, 말씀을 주심은 영생을 얻게 하시고(요12:50), 또 바르게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신 8:3)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축복의 씨앗(눅8:11)이요, 악을 소멸하는 성령의 화염검(엡6:17)이요, 영혼을 살찌게 하는 신령한 도의 젖(벧전2:2) 이며, 영혼의 비타민입니다. 이 말씀이 있는 자에겐, 이 세상에서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눅1:37)
3) 그러므로 은혜 충만한 성도, 은혜 충만한 교회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말씀 충만해야 합니다.
놀만 빈센트 필 박사는, "그 날의 성패는 아침 10시까지 우리들의 준비한 삶의 태도에 좌우된다. 즉, 그 하루를 말씀을 채움으로 시작하고, 기도함으로 시작할 때 승리하게 되고,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실패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영국의 대법관을 지낸 "얼 카이르즈"는 한때 가장 악명 높은 사람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하루 2시간씩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며, 기도함으로 헌신했습니다. 아무리 피곤하고, 아무리 바쁜 때라도 이 시간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후일 그는 고백했습니다. "만일 내가 조금이나마 성공했다면 이것은 성경공부와 기도를 위하여 매일 나의 첫 시간을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크게 성공한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행20:32) 으로 충만했던 분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말씀을 읽는 운동, 말씀을 듣는 운동, 말씀을 연구하는 운동을 일으켜야 하겠습니다. 공허한 우리의 삶을 말씀으로 가득히 채워, 은혜와 성공의 생활로 충만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이 큰 권능으로 증거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 본문 33절에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라 했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된다 할지라도, 큰 권능으로 증거되지 못하면 큰 은혜를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뉴스를 보도하는 아나운서가 발생한 사건의 보도를 흐리멍텅하게, 불확실하게, 애매모호하게 전한다면, 어떻게 그 사실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큰 은혜는 증거자의 권능과 정비례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우리 복음의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살1:5)"라 했습니다.
2) 그러나 큰 권능은 전하는 자 뿐 아니라, 듣는 자들에게도 필요한 것입니다. 하기 명창이 아니라, 듣기 명창이란 말이 있습니다. 전하는 자가 아무리 큰 권능으로 증거했다 할지라도 듣는 자의 마음에 성령의 역사가 없다면 이는 곧 "소귀에 경 읽기"가 될 뿐 입니다.
그러므로 전하는 자뿐 아니라, 말씀을 듣는 자에게도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고넬료의 가정에서 말씀을 증거할 때 "성령이 말씀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 오시니"(행10:44)라 했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루디아가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들을 때에도,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케 하신지라(행16:14)"고 했습니다.
3) 그러므로 큰 은혜가 계속적으로 임하게 되었던 이유는 말씀을 전하는 자나 받는 자가 다 함께 충만한 상태에서 전하고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말씀을 전하는 자나, 받는 자가 다함께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점층적으로 더욱 충만한 상태가 계속 유지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하는 자는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깊이 연구하여 큰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땀과 눈물과 피를 섞어 반죽한 후, 먹기 좋은 크기로 빚고, 다듬고, 정돈하고, 다시 기도의 불, 성령의 불에 구워야 합니다. 굽되, 양쪽을 천천히 잘 구워 배탈이 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듣는 자에게도 말씀을 사모하는 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영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하소서"(시119:18)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기도하며 말씀을 청종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 대로 실천할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말씀을 사모하며, 기도하여 성령의 충만을 받고, 피차 더욱 큰 은혜로 충만해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그리스도의 부활이 증거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 본문 33절에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다 큰 은혜를 얻어"라 했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십자가의 부활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들의 수많은 설교의 중심은 바로 십자가의 부활이었 습니다.(행2:23-24;3:15;4:10;5:30-31;23:6)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전하기로 결심했던 사람입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했습니다. 그는 이 십자가의 도가 "구원받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고전1:18)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 십자가는 죄인들을 위하여 이 아들도 아끼지 아니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증거요,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의 죄를 진노하신 공의의 표이며, 용서의 근거요, 모든 죄가 청산되었음을 보증하는 증거입니다.
2) 그러나 부활 없는 십자가는 미완성이며, 십자가 없는 부활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십자가의 죽음을 전제하고, 십자가의 죽으심을 부활을 필연케 한 것입니다. 이는 구원의 필연적 과정이며, 동전의 양면입니다. 특히 부활은 십자가 구원의 완성임을 확증해 준 사건입니다. 즉, 십자가의 사랑은 부활의 권능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죄의 비참한 종말을 봅니다. 그러나 부활을 통해 믿음의 결국, 곧 영원한 생명을 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처절한 고통과 수모를 봅니다. 그러나 부활을 통해 영원한 승리를 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나의 죽음을 봅니다. 그러나 부활을 통해 내게 주실 새 생명을 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허무와 절망을 봅니다. 그러나 부활을 통해 그 절망 중에서 7전 9기하는 찬란한 소망과 용기를 봅니다.
3) 그러므로 이 그리스도의 부활이 증거되는 곳에는 반드시 큰 은혜가 계속 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총신대학 역사신학 교수였던 김의환 박사는, 고등학교 재학 당시 불교에 입문키 위해 불경을 깊이 읽었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경을 통해 허무를 느낄 뿐, 전혀 기쁨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도 성경을 읽는 중에 불교의 경전에서 일찌기 읽어보지 못했던 부활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한국의 자랑하는 역사신학자가 된 것입니다.
오늘도 그리스도는 생명의 주로, 부활의 첫열매로 우리 가운데 살아 역사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삶의 현장을 찾아오셔서 도와 주십니다. 죽은자를 살리시고, 실패한 자를 붙들어 주시며, 넘어진 자를 기쁨으로 채워 주십니다. 불가능의 벽에 부딪힌 자에겐, 불가능의 벽을 쳐 부숴뜨려 앞길을 형통케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부활의 주님을 모시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면서 부활의 권능으로 전진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은혜가 충만했던 초대교회의 비밀을 보았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만 전했습니다. 전하는 자나 받는 자가 다 하나님의 성령에 사로 잡혀 큰 권능으로 전하며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는 십자가의 사랑과 함께 부활의 권능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부활의 권능이 있는 곳에 은혜 충만의 역사가 계속되게 됩니다. 우리 모두 이 진리를 터득하고 실천하여 은혜 충만한 교회로 세워져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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