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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뛰어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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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흘렀다.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을 보고 뇌리에 남은 것은 피였다. 예수의 선홍색 피. 로마 병정의 채찍과 고문으로 인해 흘린 피. 그 피를 닦는 마리아. 예수의 피 뿐 아니라 예수의 양쪽 강도들의 피도 보인다.
수난절 기간에 개봉된 이 영화는 예수의 피를 관객들에게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영상의 힘은 강했다. 문자적으로만 알았던 예수의 고난이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졌다. 신화는 현실이 되었다. 가톨릭 신자인 멜 깁슨의 영향을 받아 가톨릭의 전승이 곳곳에 가미된 이 영화는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2시간7분 전편이 예수님의 피로 물들여 있다. 피를 흘리는 예수와 피에 굶주린 유대인들이 날카롭게 대조된다. 2000년 동안 ‘예수를 죽인 자들’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유대인들로서는 보고 싶지 않은 영화일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크리스천 관객들은 자연스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는 이사야서 53장 5절 말씀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으리라. 비록 타임지의 칼럼니스트 스캇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실패는 예수가 낭자하게 흘린 피의 의미가 무엇인지 결론 내리지 않은 것”이라고 질타했지만 명시적인 결론을 보여주기 이전에 이미 크리스천이라면 그 피의 의미를 충분히 알 수 있다.
기자는 영화를 보면서 예수의 수난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수난이란 점에서 일반인들의 고난과는 비교된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사실 과도할 정도로 묘사된 예수의 수난과 같은 종류의 고통이 이 지구상에서는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다.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고난,굶주림 속에 사라져간 사람들의 고난,학대받는 소수자들….
예수의 피를 보고 우는 우리 모두는 동일하게 이 땅의 고통에 대해서도 울어야 할 것이다. 예수는 저항하지 않았다. 무참하게 피를 흘리면서도 불평하지 않았다. 자신의 고난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상업적이다. 영화를 배급한 한국직배사의 상업성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영화의 약점도 적지 않다. 고난 후에 찾아오는 부활의 승리를 너무나 상징적으로 간단하게 처리했다. 그러나 이 영화를 통해 크리스천들은 질문할 수 있다. “예수님이 저렇게 수난을 당하셨는데 과연 나는…”이라는 질문 말이다.
사도 바울은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우리가 참예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 고난’이 ‘내 고난’이 될 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뜻이 우리에게 전이될 수 있다. 오늘 우리가 기쁘게 고난을 바라보고 그 고난에 동참할 때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뛰어넘어 예수의 제자로서 부활의 아침에 참예할 수 있을 것이다.
/국민일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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