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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게 있는 것으로 (행 0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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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과거 어떤 때보다도 신랄하게 비판을 받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 세상 사람들의 비판 중에 상당한 부분이 타당한 내용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비판에 대해서 교회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사람들의 교회에 대한 비판 중에 어떤 것은 교회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교회를 미워하는 세상의 생리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상한 것은 세상이 교회를 싫어하고 비판하면서도 교회를 바라보고 교회에 대한 기대를 크게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떤 사람에 대해서 도움을 기대하고 있는데 그가 나에게 도움이 되지못할 때 그에 때해서 느끼는 배신감이나 미움 같은 감정에서라고 봅니다.
왜 세상이 교회에 대해서 기대를 합니까 세상은 자기들에게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한국 사회가 교회를 비판하는데 교회를 비판하고 있는 그 사람들은 그들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구제사업의 대부분이 기독교 기관이나 예수 믿는 사람에 의존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좁은 땅에 많은 사람이 살고 있으면서 이 세상은 더 많은 필요를 느끼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의 현실 앞에서 교회는 우리가 이 세상에 어떻게 무엇을 주어야 하는 것 때문에 갈등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한 문제를 오늘 주신 말씀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앉은뱅이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이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앉은뱅이로 태어난 사실만도 서러운데 이 사람이 아무 능력이 없으니까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거지였습니다. 어쩌면 이 앉은뱅이의 모습은 오늘 복음을 필요로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적어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원이나 능력으로 스스로를 구제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이 앉은뱅이가 필요한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물론 이 사람의 습선무는 일어나 걷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자신이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고 기대조차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기대는 이미 포기한 지 오래였습니다. 여기 기적을 포기한 사람의 모습을 보십시오. 이것은 어쩌면 기적을 포기한 세상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내 삶에 어떤 근본적인 변화 같은 것이 가능할까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오면서 끊임없이 느끼게 되는 삶에 대한 허무감과 절망을 근본적으로 그 밑바닥에서부터 변화시키는 일이 정말 가능할까”
이것은 기적을 포기한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기적을 포기한 이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했습니까
이 앉은뱅이는 지금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에 보면 이 사람이 믿음이나 소망이나 사랑 같은것을 구한 흔적이 없습니다. 그는 성전 안에 들어가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전 입구에 앉아 있으면서도 성전 안에서 하는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흥미도 없었습니다.
그는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배부르고 할 일 없는 사람들이나 저 성전 안에 들어가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예배하고, 믿음을 말하고, 소망을 말하고, 사랑을 말하는 것이지, 나처럼 하루 먹기에 바쁜사람에게 믿음이니 소망이니 사랑이니 하는 것이 무슨 소용 있어”
그래서 그는 이런 것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조차도 없이 포기해 버렸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나타난 이 앉은뱅이의 필요는 살아남는데 대한 필요뿐이었습니다. 오늘 하루 이 땅에서 목숨을 유지할 수 있는 돈 몇 푼이나 빵 한 조각이 필요한 것이지 믿음, 소망, 사랑 같은 것은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으로 보람되고 의미 있게 사는 것이냐 하는 데는 관심도 없고 살 집이나 먹을 양식에 대해서 계속 관심을 쏟아야 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런 사람에게 양식을 주어야 합니다.
초대교회에서도 이런 사람들의 양식문제에 대해서 무관심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을 계속 읽어보면 초대교회가 이 구제 사업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졌던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 구제 문제를 둘러싸고 교회 안에서 의견이 갈라져서 다툼까지 있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구제했으면 그 구제 문제를 둘러싸고 누구를 구제할 것인가, 어떻게 구제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다투기까지 했겠습니까 이 정도로 초대교회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에 민감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초대교회 성도들의 마음의 밑바탕에 있었던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지극한 얘정과 관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에 인색하지 말아야 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너무 너무 큰 사랑을 받은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이 큰 사람의 빚을 어떻게 갚을 수 있습니까 사도 요한 말씀대로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했는데 구체적인 방법 중에 하나가 이 사랑을 필요로하는 이웃을 구체적으로 돕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세상에 있는 사람,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필요한 사람에게 빵도 주고 사랑도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은 자기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비극입니다. 이것을 깨우쳐 주는 것이 교회의 중요한 책임중의 하나입니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다른 말로하면 우리가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참으로 주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주신 말씀 3절 이하를 보십시오.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했습니다.
보세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기들이 가진 것이 없다고 해서 없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내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을 줄 것인지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길 것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교회에서 전도나 봉사를 위해서 나서자고 하면 대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뭐 가진게 있어야지요, 제가 뭐 그럴만한 정신적 여유가 있어야지요, 제가 시간이 있어야지요, 제게 무슨 능력이 있어야지요.”합니다.
여러분, 과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사고방식을 가졌다면 복음이 전파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은 사랑이 증거되었을까요 예수님의 놀라운 사역이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해질 수 있을까요 물론 기독교가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지나온 역사를 아름답게 장식했던 기독교의 복음증거와 사랑의 실천이 그런 생각속에서 나올수 있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나타난 것처럼 지난날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없는 가운데서도 없는 것보다는 그들에게 있는 것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여기 베드로와 요한을 보십시오.
“내게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하나님은 내게 무엇을 주셨을까 베드로와 요한은 자기들에게 있는 것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께서 주신 무엇보다 소중한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그리스도의 이름, 이 보배로운 이름을 내게 주셨다는 사실을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고 사망의 공포에서 해방되어 삶에 대한 분명한 소망을 갖게된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의 이름은 정말 우리에게 보배로운 이름이 아닙니까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이것이 우리 모두의 간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드로와 요한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이 앉은뱅이를 치료한 기적의 사건 이후에 베드로와 요한은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에서 앉은뱅이가 체험한 최대의 기적은 그 자신이 걷게 되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보다도 성경이 말씀하려는 것은 그 앉은뱅이 거지가 자기를 치료한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내 건강보다도 소중합니다. 그리스도는 치료보다도 소중합니다. 그리스도는 물질보다도 소중합니다. 그리스도는 자식보다도 소중합니다. 그리스도는 내 목숨보다 소중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앉은뱅이에게 있어서 일어나 걷게 된 것은 생애 최대의 경험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알게 된 사건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만이 그리스도 없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세상 사람에게 주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돈 얼마나 구제품 몇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변화시켜 새 사람되게 하신 이 사랑의 주님, 이 구원의 주님, 이 생명의 주님을 그들에게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참으로 이 세상을 향해서 앉은뱅이가 돈 몇 푼 주기를 기대하고 잇는 것처럼 정말 자기가 바로 구할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정말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는 이 세상을 향해서 생명의 주님을 증거하기 원하십니까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오늘 주신 말씀 1절을 보세요.
“제 구시 기도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그들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주목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는 동기가 무엇입니까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에 대한 열기는 어디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까 이 추진력과 동기가 없으면 아무리 그런 일을 하라고 권해도 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 추진력이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기도에서부터 나옵니다. 왜 기도가 필요합니까 무엇때문에 예배가 필요합니까
여러분, 우리가 좋은 일을 위하여 조금 봉사하다가 좌절하고 멈추어 버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에 남을 돕는 것처럼 힘든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조금하다가 좌절해 버리기가 쉽습니다. 우리의 자비와 사랑의 실천이 그리고 우리의 봉사가 계속되지 못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 동기가 소멸되고 맙니다. 열심히 일하는데 칭찬은 고사하고 욕이 돌아오면 욕먹으면서 일할 것까지 있는가 하면서 그만두고 맙니다, 그러다가도 하나님 앞에 감격적인 예배를 한번 드려보세요. 설교자의 음성이 홀연히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옵니다.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그 시간, 내 마음을 어루만지며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는 그 순간, 내 마음을 어루만지며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는 그 순간, 우리는 일어나서 다시 해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기도와 예배를 통해서 홀연히 내게 임하신 성령을 힘입어 우리는 다시 일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 가야한다. 내 생애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을 위하여, 포기할 수 없는 자비의 사역을 위하여 일어서야 한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주님의사랑과 자비를 내가 힘입었다면 나는 일어나 가야 한다”
이렇게 해서 오늘까지 봉사의 생활을 계속하시는 분이 많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는 다른 교회와 달리 봉사회가 여럿이 있습니다. 회원들의 말씀을 들으면 정말 힘들다는 하소연을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 교회의 봉사회가 봉사활동을 계속할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를 동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힘들고 지쳤다가도 기도하고 나면 또 힘을 얻어 오늘까지 힘차게 봉사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없이 봉사할 마음만 가지고 시작하면 얼마 오래가지 못해서 식어버리고 지쳐버리고 포기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로 뒷받침하게 되면 이 생명 다하도록 봉사생활을 계속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하고, 예배가 필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의 생활이 바빠도 기도와 예배는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우선 순위입니다.
다니엘은 이방나라에 포로로 잡혀가서 노예생활을 하면서도 하루에 세 번씩 시간을 정하고 기도를 했습니다. 동트는 새벽에 창문을 열고 찬란한 햇빛을 바라보면서 기도했습니다.
서산에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민족을 위하여, 가족을 위하여,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는 사실 사자굴에 들어갈 각오를 하고 예루살렘을 향해 하루에 세번 기도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제 구시 기도시간에...”라고 했는데 유대인의 시간으로 제 구시면 우리 시간으로 오후 3시쯤 됩니다. 기도하기 제일 나쁜 시간입니다. 사막지대에서 오후 3시는 얼마나 기도하기 힘든 시간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작정한 기도시간에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시편 55편 17절에 이란 고백이 있습니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들으시리로다” 했습니다.
우리는 바쁜 하루의 일과 가운데서 자비와 은혜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원동력을 얻기 위해서 주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작정된 시간이 있습니까
혹 어떤 분은 이렇게 반문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기도하면 뭐합니까 기도하는 사람들의 삶을 봐도 별거 아니던데요. 예배만 열심히 드리면 뭐합니까 나보다 나은게 없던데요. 목사님, 그 사람들의 행실을 좀 보십시오.”
이런 사람들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의 사람들의 잘못된 신앙생활의 모습 때문에 기도나 예배나 성경공부를 경멸해서는 않됩니다. 그것은 그들이 바르게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정말 바르게 예배드리지 못했고, 바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목적을 망각하고 행위에 열중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목적을 망각하고 기도만 합니다. 예배의 목적을 망각하고 예배드립니다. 성경공부의 목적을 망각하고 성경공부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드리는 기도나 예배, 그리고 성경공부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요,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정말 예배를 바로 드리고, 기도를 바로 드리고, 성경공부를 바로하고 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결심을 가지고 일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바로 예배드렸는가, 내가 정말 바로 기도드렸는가, 내가 얼마나 성경공부를 제대로 했는가 하는 것은 끝나보아야 압니다.
바른 예배와 바른 기도와 바른 말씀공부에 대한 기준은 그 시간에 어떤 거룩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그 자리를 떠나는 순간 우리의 자세는 어떻습니까 예배가 끝나고 기도가 끝나고 말씀공부가 끝나고 예배당을 떠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서는 순간 내가 예배드렸기 때문에 내가 기도했기 때문에 내가 말씀을 공부했기 때문에 달라져야 할 모습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그리고 이웃을 향하여 사랑의 자세로 나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문제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예배하러 가면서 제사를 드리러 가면서 자기 곁에 있는 참으로 사랑해야 할 이웃을 그냥 지나쳐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기 위해 예배를 드립니까 무엇 때문에 성경공부를 합니까 성경공부의 결실은 내가 성경에 대한 지식을 얼마나 많이 알게 되었고 얼마나 변론을 잘하게 되었느냐 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내가 말씀을 듣고 기도한 후에 하나님을 향한 나의 자세와 구체적으로 사랑해야 할 이웃들을 향한 나의 자세에 얼마나 큰 변화가 있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 안에 있었습니다.
보다 위대한 사역을 위해서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함께 기도하기 위하여 성전에 함께 올라가고 있는 베드로와 요한의 모습을 보십시오. 삶의 변화를 기다리고 있는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전도와 기도의 동역자로 변신한 베드로와 요한의 모습을 보십시오.
오늘 주신 말씀 4절을 보십시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향하여 그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를 보라”
절망 속에 빠져 있던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의 눈동자에서 무엇을 보았을까요 그리스도를 보았을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그는 베드로와 요한의 손을 잡는 순간, 자기를 일으키기 위한 주님의 자비와 사랑의 손길을 느꼈을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네 손을 내게 다오, 네 눈을 내게 다오.”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몸을 주님 앞에 바치는 순간 우리의 손과 눈은 그리스도의 손과 눈이 되어 사람들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지고 그들의 궁핍함과 비참함을 보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가 가지지 않은 것을 주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네게 있는 것으로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린 소년의 손에 떡 다섯덩이, 생선 두마리는 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게 하고도 열 두 바구니가 남는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분명히 들으세요. ‘내게 있는 것으로’ 주면 반드시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오늘 내게 있는 것을 줌으로 기적이 일어나는 체험을 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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