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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충만을 받으라 (엡 05: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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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중 제 2위 이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천지와 만물을 친히 창조하셨습니다. 인간 의 생사화복을 주관 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이십니다. 무소부재 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만민의 죄짐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지 삼일만에 다시 부활 하셨습니다. 승천 하셔서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셔서 만민을 다스리십니다. 하늘 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만왕의 왕으로 계십니다. 예수님은 머지 않아 쟤림주로 다시 이 세상에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간 세상에 오셔서 속죄 사역을 하실 때에 자의로 하신 것은 없습니다. 철저하게도 성령님을 힘입어 모든 일을 하셨습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아무 것도 아니 하셨습니다. 아니 주님이시라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성 령님에게 이끌리어 광야에서 금식 하셨습니다. 마귀에게 시험 받으셨 습니다. 시험을 이기신 후 천사들이 와서 수종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권능으로 전도 길에 나섰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물리 쳤습니다. 각종 병을 고치셨습니다. 주님은 부활 하고 승천하신 후에 성결의 영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받으셨 습니다. 누가복음 4장 1절 말씀은 한마디로 예수님은 성령 충만 받으 신 분이라고 하십니다.

이 땅에서의 주님의 모든 사역은 성령님에 의하여 시작 되고 진행되 고 성취 되었습니다. 주님은 자신 뿐만 아니라 당신의 제자들에 의한, 종들에 의한 모든 사역은 성령 충만으로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의 영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의 사 람들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 니다.

 예수님은 많은 제자들 중에서도 12사도를 특별히 훈련 시키셨습니 다. 사도중에 요한은 가장 젊었습니다. 철이 덜 든 젊은이답게 성격이 아주 급했습니다. 급할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무정 했습니다. 독살스 러웠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동네를 군대를 불러다가 짓밟아 서 쑥대 밭을 만들어 버리자고도 했습니다. 요한은 이런 사람이었습 니다.

욕심이 많았습니다. 오직 자신만 알았습니다. 주님의 나라가 임하실 때에 제 형은 주님의 오른편에 자신은 왼편에 앉게해 달라고도 했습니 다. 오죽하면 주님이 보아너게 즉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부쳐 주 셨겠습니까.

그런 요한도 오순절 이후 완전히 변화 되었습니다. 급하고 독살스러 웠던 마음이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포근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입 에서 흘러 나오는 말은 부드럽게 속살거리는 봄바람 같아졌습니다. 그 가 어루만지는 손길은 따뜻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드디어 요한은 사랑의 사도라는 별명을 얻기에 이르렀습니다. 모든 사도보다 가장 오래 생존했습니다. 구순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에베소 교회의 장로로서 에베소 교회가 첫사랑을 경험하게 하였던 바로 그 분 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어떻했습니까 열두 제자중에 맏형이었습니다. 아마 나이 가 많아서 맏형이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무뚝뚝한 그의 성격처 럼 한다하면 하고 마는 뚝심이 있는 제자였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제자들 중에 먼저 선택을 받았습니다. 주님을 위하 여 그의 모든 것을 희생 했습니다. 죽기까지 주님을 따를 각오를 했습 니다. 사실 주님의 일이라면 가장 설쳐댔던 사람입니다.

그런 베드로가 주님이 제사장의 뜰에서 불법의 제판을 받을 때 무려 세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 했습니다. 그것도 사내 대장부가 어 린 소녀 앞에서 저지른 부끄러운 일입니다. 어쩌면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겠다고 맹약하고서도 면전에서 부인하는 것은 차라리 은 30에 선 생을 팔아 먹은 가룟 유다보다 더 악한지도 모릅니다.

이 베드로가 오순절 이후 어떻게 변화 되었습니까 불로 연단하여 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한 믿음을 위한 믿음의 시련, 믿음의 연단을 주장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끝까지 참아 주님만을 바 라 보도록 권면하였 습니다.

그는 소망의 사도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이 소망 때문에 순교를 해도 괴짜 같이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못박힐때 꺼꾸로 매 달기를 청원 했습니다. 차마 주님처럼 바로 매달릴 수 없다는 것이었 습니다.

 바울을 보십시요. 그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으 로는 완전하다고 자랑할만치 자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유대교에 대한 열정이 너무도 강했기 때문에 신생 예수교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습 니다. 예수쟁이들을 철천지 원수로 여겼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을 죽이도록 선동한 사람입니다.

이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구원 받은 후 성령 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생애는 완전히 변해 버렸습니다. 바울은 믿음의 사도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는 믿음에 관한 일이라면 물 불을 가리지 않고 주님께 충성을 다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성령님이 아니시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열왕기 하 2장 9절과 10절 을 보실까요. 우리의 열망이 무엇이어야 할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 니다.

엘리야 선지자의 때입니다. 가장 악랄한 독재자 아합의 정권이었습 니다. 선지자는 독재정권과 대항하여 투쟁 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위대한 승리를 연출해 내었습니다. 갈멜산의 승리는 우상종교의 제거 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증거를 역역히 들어낸 것입니다. 독재자의 간장을 싸늘하게 만들어 버린 통쾌한 사건 이었습 니다.

 드디어 엘리야의 지상 사명이 끝날 기약이 가까워 집니다. 후계자로 어린 엘리사를 지목 했습니다. 그는 영특 했습니다. 스승이신 엘리야 를 흠모 했습니다. 존경 했습니다. 지금은 보기 어려운 스승과 제자 사이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엘리사는 꼭 스승과 같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림자와 같이 따라 다니면서 그 능력의 비결을 알아 냈습니다. 그 원동력의 출처는 무엇 이었을까요.

엘리야 승천의 날이 다가왔습니다. 제자를 길갈에 머물게 하고 싶었 습니다. 그곳에는 엘리야의 후광이 있는 곳입니다. 엘리사는 부스러기 보다는 개척의 의지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스승의 뒤를 밟아 벧엘로 내려 갔습니다. 선지자 학교가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신학훈련 보다 더 중요한 것을 기다렸습니다.

엘리야는 여리고로 내려 갔습니다. 세계의 가장 오래된 도시는 문물 의 발달과 풍요가 손짓 합니다. 한 사람의 목회자로 성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입지를 선생은 지적해 주고 있는듯 합니다.

지금은 여건이 문제가 아닙니다. 스승을 따라 요단강 가에 섯습니 다. 엘리야는 겉옷을 벗어서 요단강물을 첫습니다. 물이 두쪽으로 갈 라지고 육지가 되었습니다. 옛날 선조들의 발자욱이 아직 그 물속의 길에 생생한듯 합니다.하나님의 능력이 약속된 곳입니다.

엘리야가 건넜습니다. 요단강은 피안과 차안의 경계입니다. 생사의 갈림길 입니다.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건널 수 없는 길입니다. 엘리 사는 담대하게 따라 나섯습니다.

비로서 선생의 입이 열렸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 라느냐"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제자는 스 승의 정곡을 찌렀습니다.

 엘리야가 떠나고 엘리사 홀로 남게 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섬찡한 일입니다. 당시의 현실은 참혹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종교와 도덕의 부패는 말할것 없고 독재와 야합한 매판 재벌의 행포는 극에 달해 있 었습니다.

조상의 아름다운 유업을 방종과 타락으로 바꾸어 버린 백성들의 가 슴 속은 텅비어 있었습니다. 사치와 소비 탐욕과 무질서로 가득찬 거 리 거리는 살벌한 야기가 서려 있었습니다.

엘리사는 스승을 대신하여 그 진구렁텅이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아수라장은 능숙한 구변이나 논리가 통할것 같지 않습니 다. 믿을 수 없는 정치적 배경이나 퇴색한 종교의 힘은 혼탁해진 물줄 기를 바로 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광란하는 백성 앞에서 의로운 하나님의 신탁을 증거하는 것은 광풍 노도 앞에 서있는 어린애 같습니다. 층암절벽을 깨뜨려 보겠다고 망치 를 들고 서있는 젖먹이 같습니다.

엘리사는 성령의 영감을 구했습니다. 인간의 힘을 능가하는 초월적 인 간청입니다. 내심의 기쁨을 감춘 스승은 말했습니다." 네가 내게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제자는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는 영감의 갑절을 받고야 말았습니다. 그가 살아 생전 에 스승의 길을 온전히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성령님의 능력이었습니 다.

 하나님의 백성은 성령님의 통치를 받습니다. 성령의 인도에 의하여 살아 갑니다. 성삼위 하나님을 고백하는 믿음은 입술이 아닙니다. 말 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습니다.

당시 엘리사가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힘입지 않았다면 그는 선지자 의 사명을 충분히 감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시대에는 모든 사람 에게 성령의 임재가 약속되지 않았던 때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들 은 성령님의 권능에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이 시대는 사람들이 마치 최후의 순간인양 영적 혼란의 시기로 만들 어 가고 있습니다. 자멸의 백척간두에 서서 서로가 모순과 야수적 태 도로 맞섭니다. 이상한 영의 힘으로 십자로를 만들어 놓고 대치하고 있습니다. 마치 갈멜산에서 어느 신의 힘이 더 세냐 내기하던 엘리야 의 시대와 방불 합니다.

이 치열한 싸움터에서 영적 중무장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복음은 성령님의 역사에 의하여 전파되는 것이지 세속적 방법이나 수단에 의 하여 전파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인간의 방법에 맡겨 놓고 있습 니다. 가장 훌륭한 수단을 고안해낸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요. 결국은 신의 자리까지 점령 합니다. 그것을 당연시 하는 논리까지 수긍하고 마는 세태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계는 한없는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가장 보수적이라 는 사람들까지도 성경을 왜곡하는 것은 마찬가지 입니다. 성경을 성경 대로 믿지 않고 해석방법이라는 척도에 매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를 아십니다.처절한 영적 싸움 앞에 서 있는 당신 의 백성들을 아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약속 하십니다. 엘리사는 성령 을 달라고 몸부림첬지만 우리에게는 이미 성령을 선물로 주시마고 약 속 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성령을 어떻게 받습니까. 성령은 부흥사의 손 바닥을 통하여 주시지 않습니다. 기도로 받지 않습니다. 헌금하는 양 에 따라서 주시지도 애습니다. 전도 많이 했다고 상급으로 주시는 것 도 아닙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에서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 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하였습니다.

이 은사는 그리스도인 속에 내재하시는 성령이십니다. 내재하시는 성령님은 세례를 통하여 받습니다. 많은 물에서 침수하는 물세례는 2 가지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죄사함입니다. 즉 구원입니다. 그 리고 성령을 주십니다. 어떤 권위있는 사람이 무엇이라고 가르치든지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론은 시대에 따라 견해에 따라 변하지만 기록된 성경은 불 변합니다. 아무도 기록된 이 말씀을 지워 버릴 수는 없습니다. 내게 맞지 않으면 맞지 않을 뿐이지 성경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합니다 39절에서 이것은 주님과의 약속이라고 합니 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죄사 함과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베드로의 입을 통한 주님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고 하십니다. 모든 먼데 사 람 즉 우리 이방인을 포함한 새 약속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입니다.

우리는 이 새 약속에 의하여 새사람이 되고 주님의 자녀가 됩니다.

40절은 "이 여러 말로 확증하여 권하여 가로되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말합니다. 즉 세례를 말합니다. 아무리 세례가 구원의 약속이라는 말씀에 알레르기성 반응을 하여도 성경은 변경 시 키지 못합니다.

마가복음 16장 16절은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 요" 했습니다. 바로 구원의 문제입니다. 구원이 물에 있는 것은 아닙 니다. 구원이 세례라는 거룩한 의식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물의 능력을 부인하기 위하여 세례의 약속을 부인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세례의 의식화를 나무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세례의 약속까지 제거하는 것은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세례 구원은 세례를 베푸는 매개가 되는 물이나 그 의식 자체에 있 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 면 죄사함을 얻고 성령님을 선물로 받는다고 하는 약속을 믿음으로 순종하는 믿음의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믿음을 확대할 필요도 없고 세례식을 축소할 필요도 없습니다.

기록된 성경의 말씀대로 믿어 세례 받으면 죄사함을 얻고 성령님을 선물로 받습니다. 성경에는 내재하는 성령님을 세례를 통하여 주시겠 다고 하신 약속 외에는 그 어떤 방법이나 통로를 채아 볼 수 없습니 다.그러므로 우리는 성경대로 믿을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오직 성경만이 믿음의 표준이 되어 야 합니다. 주의 약속대로 세례를 받아 성령님을 받으셨다면 성령 충 만을 받으십시요. 그것이 오늘 본문 말씀의 명령이십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의 믿음을 성경이 아닌 미망에 두어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직 성령 충만을 받아 주의 복음을 힘있게 전하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 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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