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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정의 (창 38:1, 마 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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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는 '정의' 또는 '의'라는 말을 히브리어로는 '체다카', 희랍어로는 '디카이오 슈네'라고 적고 있다. 이 말은 윤리적, 법적, 심리적, 종교적, 정신적인 규범에 적합하게 행하는 행위 일반 자체를 일컬는 말이 아니다.

성서가 이 말을 사용할 때는 언제나 그 관계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두고 하는 말이든,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를 두고 하는 말이든 그 말은 어 디까지나 그러한 관계 속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성취하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성서적 '의'는 하나님과 인간, 또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의 문제이지 그 어떤 윤리적, 도덕적 상태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관계라는 말의 성서적 용어는 계약 관계를 가리키기 때문에 성서적인 정의의 개념은 개인윤리적 또는 정적인 개념이 아니라, 공동체윤리적 또는 역동적인 개념이다.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이러한 관계 개념적 성격을 뚜렷이 부각시켜주 는 성서적 전거는 수없이 많으나 그 중의 하나인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정한 엣언약의 말씀과 새언약의 말씀을 중심으로 정의에 관한 관계 개념 적 의미를 더욱 분명히 이해해 보고자 한다.

 먼저 옛언약의 말씀 창세시 38장에는 유다지파의 족장 유다와 그의 며 느리 가나안 여인 다말과의 관계를 통하여 정의를 말하고 있다.

유다공동체의 대를 이어가야 할 의무를 연속적인 아들의 죽음으로 인하 여 그냥 피하려고만 하였던 유다의 '의' 보다는, 그 공동체의 하나인 이 른바 신전에 종사하는 여인('키데샤'-거룩한 창녀)의 관습에 따라 과부의 옷을 벗고 신전여인의 옷으로 갈아 입고 분장한 후 그의 시아버지를 유인 하고 속여 육체관계를 맺음으로써 그 가문의 대를 이을 아들을 낳게 한 이방인 며느리 다말의 그 '의'가 더 낫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 하면 창세기 38장의 성서기자는 '의'의 문제를 한 여인의 육체적인 도덕 성의 차원에서 보지 않고 한 가문의 흥망과 한 공동체의 미래라는 차원에 서 보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창세기 38장의 결론은 유 다지파의 족장인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의 이 행위에 대하여 "너의 의 가 나보다 낫구나!"라고 선포하는 것으로 그 끝을 맺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한 가문, 또는 한 계약공동체에 대한 의무와 책임에 성실하는 것이 곧 '의'라고 하는 성서적 의미의 새로운 개념을 발 견하게 된다. 즉 다말의 의가 유다의 의보다 더 낫다고 선포함으로써 이 선포는 감히 마태복음 5장 20절에 나타난 예수의 한 선포 "너희의 의로운 행실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인들의 의로운 행실보다 더 낫지 않으면 결 단코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선포한 뜻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 맥은 공동체적 '의'는 남으로부터 사랑을 취하는 (taking) 행위 보다는 남에게 사랑을 내어 주는(giving/sharing) 행위를 통하여서만 바르게 수립될 수 있다는 점이다.

 새언약의 말씀 마태복음 20장 1절에서 16절까지에 나타난 '포도원의 품 꾼들'에 관한 예수의 천국 비유를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의'의 이러한 계 약적 특성이 여실하게 드러난다.

 포도원 주인은 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 그리고 오후 5시에 각각 한 데나리온씩의 품삯을 약속하고 품꾼들을 부른다. 일을 모두 마친 후 품꾼 들에게 처음 약속한 대로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씩을 품삯으로 주자 맨처 음에 와서 일한 사람들이 주인의 이러한 처사를 불의하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주인은 오히려 그에게 연대성을 갖고 부르는 '친구여'(헤타이레) 라는 호칭을 부르면서 약속, 합의에 성실한 자신의 '의'가 공격불가의 정 당성이 있음을 역설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인간의 법에 의하여 측정된다면 그 의는 정당하게 다루 어지지 못한다. 계약에 성실하시는 하나님의 이러한 의는 하나님은 인간 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보상보다 무한히 더 많은 것으로 보상해 주신다 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성격의 것이라고 하겠다.

여기서 문제는 하나님의 의가 지닌 그 계약적 관계의 성격이다. 그리하 여 '포도원의 품꾼'들에 관한 천국 비유는 단호하게 "친구여(헤타이레), 나는 그대에게 불의하게 대한 것이 아니오, 그대는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마태 20:13)"라는 포도원 주인으로 표상된 하나님의 반 문으로 마무리된다. 이와 같이 성서가 말하는 의의 개념은 철저히 바로 이러한 관계의 맥락안에서 이해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결국 구약과 신약을 포함하여 성서 전체가 말하는 의(義, 체다카 / 디 카이오 슈네)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이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이든 간에 그 관계가 그 계약관계 속에서 요구하는 사항들을 성취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타락한 인류 모두와도 계약관계라는 형식 의 관계를 맺어왔으며, 인류는 위로는 하나님과 그리고 아래로는 다른 이 웃과의 관계를 갖고 그 관계에 대한 의무를 지고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이 다. 그러므로 '의'라는 것은 관계의 맥락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으며 관계 밖에서는 그 어떤 것도 그 자체로서만은 '의'가 될 수 없다.

 '나눔'이 관계성 속에서 가능하듯이, '정의'도 역시 관계성 속에서 실 현되고 지켜져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올 94년 서울공동체의 목표인 [정의실현 나눔공동체]는 위로는 하나님과 아래로는 이웃과의 관계 속에 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하나님의 정의'의 개념을 바탕으로 다음 주일에는 그 정의를 실현하는 과제를 살펴 봄으로써 정의는 그 어떤 이상적인 이념 이나 정신적인 규범이 아니라, 정의는 회개를 위하여 심판으로 개입해 들 어오는 구원의 사건임을 고백하는 믿음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하려고 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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