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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진합시다 (히 10:3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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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산속의 종교, 기독교는 거리의 종교라고 합니다. 그것은 불교의 경우 입산, 수도, 득도, 성불에 중점을 두기 때문이며, 기독교의 경우에는 현실, 역사, 삶, 구원에 중점을 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교를 명상과 사색을 중요시하는 정적인 종교라고 한다면 기독교는 변화와 중생과 전진을 중요시하는 동적인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당시 고통당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지녀야 할 신앙 생활의 태도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교훈한 말씀입니다. 특히 뒤로 물러가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통이나 실패나 박해같은 여건들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위협하더라도 그런 것들 때문에 뒤로 물러서면 안된다는 것이 본문의 교훈인 것입니다. 본문의 교훈이 어떤 것인가를 찾아 보겠습니다.

 1 담대해야 상을 받습니다.

35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34절을 보면 그 당시 기독교인들이 예수 믿는 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옥에 갇히고 재산을 빼았기고 직장에서 쫓겨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 때문에 용기를 잃어버리거나 믿음을 포기해 버리면 상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6을 보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고 했습니다.

본문 35절과 11:6을 연결시키면 담대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힘쓰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시험이나 실패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담대한 믿음으로 이기면 상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상은 두가지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최고의 영예와 상은 대통령 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는 상은 하나님이 주시는 상입니다. 최고의 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세계의 지성인들이 받기를 소망하는 상이 있습니다. 그 상이 바로 노벨상입니다.

노벨(Alfred Bernhard Nobel)은 스웨던의 화학자이며 발명가였습니다.

1863년 폭약을 발명하고 공장을 설립하여 폭약을 제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공장이 폭파되어 동생과 종업원 4명이 희생되는 비운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후 폭약 때문에 갑부가 되었고, 그의 유언을 따라 1901년 노벨상 제도를 만들어 시상을 해나오고 있습니다. 그는 1895년 11월 27일 유언장을 통해 “인류 복지에 가장 구체적으로 공헌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며 자신의 유산 3100만 크로나를 스웨덴 왕립 아카데미에 기부했습니다.

상은, 물리, 화학, 생리, 의학, 문학 및 경제, 평화 부분에 걸쳐 시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한 사람도 수상자가 없습니다. 시상식은 매년 12월 10일 스웨덴 국왕이 임석한 가운데 진행되며 수상자에게는 금메달과 22만 달러 정도의 상금을 줍니다.

그러나 용기와 인내로 자신의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 받는 상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노벨상과는 비교도 할 수가 없습니다. 천군천사가 부르는 승리의 노래 속에서 하나님이 상을 베풀어 주십니다.

얼마나 영광입니까 저는 몇 년전 스톡홀름을 방문했을 때 노벨상 시상식장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텅빈 방에서 상을 받는 흉내를 내면서 장차 받을 상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둘째 영원한 상입니다.

노벨상이나 올림픽상은 지상에서만 그 가치와 영예가 인정되는 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상은 영원한 상입니다. 그 영광과 가치가 영원히 인정되고 평가받는 상입니다.

영원한 상이란 없어지지 않는 상, 녹슬지 않는 상, 그 가치가 영원히 존속되는 상인 것입니다.

 2 인내해야 약속을 이룹니다.

36절을 보면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인내는 스리스도인이 지녀야할 가장 소중한 품성입니다. 나아가 인간이 지녀야 할 품성이기도 합니다.

짐승도 단번에 성을 내거나 단번에 자기 감정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사람이라면 인내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태리가 낳은 세계적인 바이얼리니스트 니꼴로 파가니니 (Niccolo Paganini)가 어느 날 연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주도중 바이얼린 줄 하나가 끊어졌습니다. 숨을 죽이고 있던 청중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파가니니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남은 세 줄로 연주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줄이 또 끊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두 줄로 연주를 계속 했습니다.

그때 세번째 줄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끊어졌습니다. 그는 잠시 연주를 멈추더니 한 손으로 바이얼린을 높히 치켜들며 “줄 하나와 파가니니”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노련한 솜씨로 연주를 했습니다.

그의 연주가 끝나자 관중들은 우뢰같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포기하면 안됩니다. 인내가 없으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세줄이 끊어지고 단 한줄만 남았더라도 그 한줄 믿음으로 성공을 연주해 낼 수 있는 용기와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암놈 펭귄이 알을 낳으면 숫놈 펭귄이 날개로 덮고 따뜻하게 하여 새끼가 나오게 한다고 합니다.

최소한 두달동안 먹지도 않고 영하 40도의 한냉과 싸우며 시속 40Km의 강풍을 견뎌 낸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인간의 인내란 너무나 나약하고 무력합니다.

신앙인의 인내도 예외가 아닙니다. 참을성도 없고, 기다릴 줄도 모릅니다. 조그만 괴로워도 짜증내고, 약간만 고통스러워도 신경질을 내는가 하면 쉽게 절망하고 포기해 버립니다.

크리미어 전쟁 당시 부상으로 다리를 잘라야 하는 병사가 있었습니다. 나이팅게일이 그 병사에게 “최대한 용기를 갖고 아픔을 참아야 된다”고 말하자 그 병사는 막대기를 하나 달라고 했습니다.

그 병사는 막대기의 끝부분을 입으로 깨물면서 수술이 끝날 때까지 단 한마디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습니다. 수술이 끝난 후 막대기를 보니 그 끝부분의 거의 짓뭉개져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의미깊은 교훈을 줍니다.

고통이나 좌절로 아픔을 겪을 때 실패나 절망으로 괴로움을 당할 때 우리가 붙잡을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이유는 십자가보다 더 억울한 사건도, 십자가보다 더 쓰라린 아픔도, 십자가보다 더 골깊은 상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붙들 때 우리에게 평화와 위로와 소망과 승리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인내하지 못하면 약속을 이루지 못합니다.

인내해야 소망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인내해야 영원한 구원을 이루게 됩니다.

 3 전진해야 기뻐하십니다.

38절을 보면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뒤로 물러간다는 말의 뜻은 “철회하다”, “뒤로 끌다”라는 것입니다. 뒤로 물러가는 사람은 자신의 목적이나 계획을 쉽게 철회해 버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남을 뒤로 끌어내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뒤로 물러가는 사람은 자신도 주저앉고 남도 끌어내리는 사람입니다.

굼벵이도, 지렁이도, 개미도 앞으로 갑니다. 하루살이도 앞으로 날아갑니다. 자동차도, 비행기도, 사람도 앞으로 갑니다. 지구도 뒤로 돌지 않습니다.

금년 설날 귀성도 전과 같이 고행길이었습니다. 부산, 목포는 20시간, 대전은 10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20시간이 걸려도 목적지인 고향을 향해 앞으로 갔기 때문에 가족을 만나고 명절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뒤로 가는 것은 30분도 지겹고 힘이 듭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경우를 보면 애굽을 떠나 40년만에 가나안 땅에 도착했습니다. 참으로 지루하고 험난한 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떠났던 애굽으로 되돌아 가자고 대들었고 소리쳤습니다.

출애굽기 14:12을 보면 홍해 앞에 선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다고 소리치며 저항했던 사건이 기록되어 있고, 출애굽기 16:3을 보면 신 광야에 이른 그들이 광야에서 굶어 죽는 것보다는 애굽의 고기 가마 곁에서 실컷 먹다가 하나님의 손에 편히 죽는 것이 좋을 뻔했다고 원망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전진에는 관심이 없고 되돌아가는 궁리에 바빴습니다.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과거 지향적인 사람입니다.

늘 옛날을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 지난 날의 향수와 미련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곳엔 “과거에”,“소시적에”,“나 어렸을 때”라는 말이 일상어로 사용됩니다.

 둘은 현실주의자들입니다.

오늘 여기가 제일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겐 과거가 필요없듯이 미래도 필요없습니다. 이들은 수단과 한탕주의와 단발적인 삶에 만족하고 현실을 엔조이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언론사에서 압구정동을 서성대는 젊은이들을 붙잡고「꿈이뭡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꿈이요” “왜 꿈을 꿔요” “꿈이 밥먹여 주나요” “오늘 저녁 디스코텍에 가는 거예요” “그런거 몰라요” “여기 있잖아요(엄지손가락을 보이며)”라는 것들이었다고 합니다.

의외로 현실주의자들이 많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도 당장 오늘 나한테 무슨 복이 떨어지느냐, 나한테 득되는게 뭐냐, 유익한게 뭐냐를 따집니다. 그들은 바로 현실주의자들인 것입니다.

 셋은 미래지향적인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뒤로 물러서지 않고 전진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에 보내시고 열가지 재앙을 내리시며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은 그들로 가나안이라는 미래지향적 복지를 향해 전진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걸핏하면 뒤로 되돌아갈 궁리를 했던 것입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은 그것을 싫어하셨고,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히브리서 10:28은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부산을 가기로 했으면 24시간이 걸려도 한 발짝씩, 그리고 시속 10킬로의 속도라도 부산을 향해 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을 시작했으면 힘들고 느리고 괴롭더라도 뒤돌아서거나 중단하면 안됩니다.

범죄심리학자들은 범죄자에겐 귀소본능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자기가 죄지은 현장을 남몰래 둘러보고픈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전진해야 합니다. 불행했던 과거, 불미했던 지난날, 상처였던 그 사건, 죄짓고 살았던 과거로 되돌아가면 안됩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영원한 가나안입니다.

되돌아가면 목적지에 못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노래불렀던 이스라엘은 애굽으로도 못갔고 가나안 땅에도 못들어 갔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산 교훈이 됩니다.

주님 바라보고 전진합시다. 곁을 보고 사람보고 사건보고 경치보면 전진못합니다.

주님이 최종 목표이며 영원한 세계가 죄종 목적지입니다.

뒤로 물러가지 맙시다.

계속 전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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